[JBC 눈]‘오직 파괴만 생각하라', '혁명가의 교리’를 아는가
[JBC 눈]‘오직 파괴만 생각하라', '혁명가의 교리’를 아는가
  • JBC까
  • 승인 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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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단어는 동네 강아지 이름도 아냐
혁명가가 되기 위해선 혁명가 정신을 지녀야

 

이제 혁명밖에 길이 없습니다.” 어느덧 혁명이란 단어가 자유 우파의 아이콘이 된 듯하다. 어느 자리에서든 사람들끼리 모이면 혁명을 운운한다.

무슨 혁명요?”라고 물으면 태극기 혁명을 통해 문재인 정권을 끌어 내려야죠라고 아주 쉽게 말한다. 또 어떤 분은 분명 외부에 의해 혁명적 상황이 오니 그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외부 요인이 뭡니까물으면 미국과 중국의 패권주의에 따른 각종 국제 정세의 흐름을 예시하면서 미국이 문재인 정권을 결국 끌어 낼 것이다는 막연한 기대와 환상의 혁명적 바람이다.

자유 우파 세력들의 각종 집회에서도 혁명적 구호와 슬로건이 난무했다. ‘태극기 혁명 하에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자자유 우파 혁명만이 살 길이다라는 구호는 귀가 따갑게 듣곤 한다.

솔직히, ‘혁명이 남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파들은 혁명을 입에 달고 산다. 문재인 정권을 엎어 버리고자 하는 심경이 혁명으로 표현되는 것은 이해된다. 문 좌파 정권이 촛불혁명에 의해 정권을 잡았다고 하니, 우파들이 태극기 혁명을 통해 좌파 정권을 갈아 치우자는 그 심경은 이해한다.

그러나 혁명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진짜 혁명이 무엇인지 아느냐?”. 혁명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이다.

또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 혹은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다.

그런데 이 같은 혁명을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예컨대, 어떤 사상과 이념으로 무장해야 하는가. 혁명가의 혁명적 자세와 교리, 혁명을 하는 이유와 목적, 그 후 대한민국을 어떻게가져 갈 것인가다.

자유 우파들이 꿈꾸는 혁명은 소박하다. ‘문재인 좌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되찾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또 다른 정권을 세우는 것이 구멍가게를 허물고 그곳에 카페를 여는 거 마냥 간단치 않다.

문 좌파 정권 추종자들은 지난 40년 간 혁명을 꿈꿔 온 자들이다. 그들은 확고한 사상과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다. 무엇보다 강철 같은 강인한 정신력과 행동 철학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 특히 이들의 혁명론에는 남북한이 하나되어 사회주의로 가야 한다는 확고한 혁명 목표가 설정돼 있다.

그런데 자유 우파들은 그저 문재인 정권을 끌어 내리는 것이 혁명의 방향이요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좌파들이 볼 때는 혁명 흉내에 불과하다.

좌파들은 사회주의 혁명 국가 완성을 위해 북한의 남한혁명 전략이자 남한의 NL주사파의 혁명론인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은 체제전복 이념을 도입했다.

좌파들은 혁명의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사상을 다지고 더욱 이념화에 충실해 한다. 그들은 혁명화 과정을 사상 단련의 용광로라고 표현한다. 옛 소련의 혁명작가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의 장편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좌파 혁명을 꿈꿔온 자들은 이 장편소설이 강조해온 강철정신을 떠올릴 것이다. 80년대 전대협 구호가 구국의 강철대오. 지금도 문 좌파 핵심은 이인영·송영길·우상호·임종석 등 전대협 출신들이다.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뜨거운 용광로를 통해 새로 만들어지는 강철처럼 주인공 파벨 코르차킨이 무수한 고난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이겨내 마침내 혁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노동을 사랑하며 어떤 임무도 반드시 수행하는 주인공의 불굴의 투지와 집단에 대한 헌신 등은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이고, 그 한계를 정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을 준다.

강철이 뜨거운 용광로에서 수천 도의 화염 속에 단련되듯 진정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는 노동의 현장에서 정신·육체적인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이 혁명화의 취지다.

그런데 우파들이 목표로 하는 혁명 사상과 이론이 무엇인가. 박정희 부국강병과 이승만 건국정신이 우파의 사상 이념인가. 아님 자유 시장경제 계승 발전인가. 더욱이 우파는 뜨거운 용광로에서도 타오를 만한 강철 같은 불꽃이 있는가.

좌파는 혁명을 위해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고, 어떻게 생산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논했다. 이 논의 속에 을 이끌어 내어 이것을 이론화 시켰다.

설령, 그 이론이 같잖은 내용과 속임수로 가득하다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런데 혁명을 꿈꾼 다는 우파들에게는 어떤 방향과 사상과 이념 가치가 있는가. 또 뜨거운 용광로에서 수천 도의 화염 속에서도 버틸 수 있을까.

그것은 그렇다치더라도 현재 우파의 비극은 우파의 본질적 가치와 보수지향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데 있다. 우파끼리의 논리적 우격다짐만 있다. 뭉매한 우파는 정의로운 척 하는 좌파를 만들어 낸다. 이런 거짓 좌파는 결국 우파의 무능함을 먹고 자란다.

사회는 대립과 갈등속에 얽혀 있다. 우파는 그 대립과 갈등을 너 편, 내 편으로 갈라 세우고 있다. 이 쪽 저 쪽 줄서기를 통해 편을 가른다.

우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런 모습이 오늘날 대한민국 우파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우파는 매순간 옳고 그르고, 맞고 틀렸고의 이분법에 갇혀 있다. 늘 새로운 판단과 결단을 요청하는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고, “내가 옳고, 넌 틀려라는 이분법 사고에 안주한 것이 아닌지 부끄러울 뿐이다. 세상은 ’, ‘영성세속’, ‘순수불순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

세상은 개인의 취미와 성향적인 호불호 경계는 정해져 있지만 이념과 사상의 호불호에서 경계를 지을 경우 결국 논리에서 패배자가 된다.

특정 이슈에 대한 흥행이벤트에 능숙능란 하다. 본질의 접근은 없고, 현상에만 집착한다. 여기에 무조건 ~’하고 따른다. 쌍소리, 욕설, 악담, 저주, 맹독, 외설, 엽기, 억지, 궤변, 흑색, 난폭, ‘아니면 말고인데도 사람들이 믿고 따란다.

일부 우파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영웅주의와 교조주의에 빠진 듯 착각에 살기도 한다. 마치 자신이 기독교적 애수의 삶을 살고 실천하고, 자신이 거룩한 성인전의 주인공 인 거처럼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 정당화가 자기 성찰을 가리는 사고에 젖어 있는 자들이 무슨 혁명을 꿈꾸고 사회변혁을 말하는가. 우파는 좌파 보다 더 악랄해야 하고 지독해야 한다. 혁명에 있어서 감성주의는 적이다.

지금 좌파는 낡은 상상력으로 사회를 속이고 있다. 이들의 정체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우파가 반사이익을 받는 것도 아니다.

우파에게는 혁명 후 미래가 없다. 좌파들에게 혁명 후 미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다. 설령, 그것이 사기이고 거짓일지언정 속이는 미래조차 없다.

그런데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되레, 잘 난척 한다. 이론적 학습과 무장도 되어 있지 않는데도 자신의 논리에만 빠져서 우매한 우파를 이끌려 한다. 그러니 우파끼리 서로간 싸우고 지지고 볶는, 분탕이 일상화 됐다.

보수적 시각은 매우 많은 주제와 관련해 다양한 견해를 포용해야 한다. 좌파 척결은 혁명이 아니다. 좌파가 우파 척결을 혁명으로 보지 않는다. 이는 체제 우위의 논쟁이다. 

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혁명적 삶이 아닌 그저 혁명을 자신들의 조직과 세력 확장을 위한 유행가 가사 레퍼토리로 읊어대고 있다.

혁명가의 교리와 자세 마음가짐을 어떠해야 하는가. 러시아 혁명가 네차예프<사진>혁명가의 교리문답을 통해 혁명가의 관심사는 혁명뿐이어야 하고, 혁명가는 불행한 운명에 갇힌 사람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혁명가는 그 자신에 관한 관심사도 없고, 감정도, 애착도, 재산도 없고, 이름조차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네차예프는 또 혁명가의 목표를 규정했다. 그는 혁명가는 밤낮으로 오로지 한 가지만, 하나의 목표만, 다시말해서 무자비한 파괴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혁명가는 피도 눈물도 없이 한 순간의 휴지도 없이 한 목표를 향해 분투해야 하고, 혁명가는 늘 스스로 재가 될 각오를, 혁명의 승리를 가로막는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자기 손으로 파괴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네차예프가 말한 혁명가의 교리다.

오로지 혁명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네차예프의 극단적 열정, 너무도 강렬해서 뿌리치기 힘든 사악한 마력은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바쿠닌(1814~ 1876년)을 비롯한 수많은 혁명가들을 사로잡았다.

혁명 대의를 위해서라면 육친의 정()까지도 가차 없이 버린다는 철의 규율을 만들었다. 네차예프는 조직원들에게 호된 훈련을 통해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했다.

네차예프는 스스로를 제정 러시아의 농민 반란 지도자 푸가초프(1726?~1775)라고 여겼고,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살인을 포함한 인륜을 저버리는 모든 행위도 정당화된다고 믿었다.

실제 그는 혁명가의 길을 마다한 친구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네차예프가 활동했던 시기는 1870년대다. 한국의 상황과 당시 러시아와는 다르다. 하지만 혁명가가 되기 위해선 최소한 어떤 정신 무장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같다.

네차예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론적 무장과 파괴가 목적이 아니다면 혁명을 논하지 마라.” 이런 강철 같은 혁명론으로 무장해도 네차예프의 혁명론은 그 당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우파들에게 이런 혁명론이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파괴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상 무장과 혁명의 방향, 목표조차 불투명한 세력들이 우파 혁명가'로 자처하는 게 뭔지 뒤틀리고 거북하다. ‘니들이 게맛을 알어라는 말이 있듯, 한마디로 '그들이 혁명을 아는지' 묻고 싶다. 

지금은 혁명() 운운하기 전, 닥치고 탄핵무효무죄석방만 외쳐라. 작금은 이것이 혁명에 버금가는 혁명적 상황을 불러 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