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빠’ 세력이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왔다“
최장집 "‘빠’ 세력이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왔다“
  • JBC까
  • 승인 20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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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법 매우 위험, 대통령에 엄청난 권력 줘

적폐청산을 모토로 하는 과거 청산 방식은 사회에 극단적 양극화

새로운 정치계급 학생운동 세력 문제의 해결자이기보다는 문제 그 자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촛불 시위 이후 문재인 정부의 등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가는 전환점으로 기대됐지만,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진보 성향의 원로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촛불혁명 정부라 자처하는 문재인 정권을 향해 지적한 글이다.

최 교수는 지난 6월초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한국정치연구에 기고한 다시 한국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같이 밝혔다. 최 교수 기고문은 이번 달 게재됐다. 본지가 최 교수 기고문을 입수했다.

최 교수는 기고문을 통해 문재인 정부의 등장이 진보와 보수의 극단적인 양극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최 교수는 이 위기는 학생 운동권 세대의 엘리트 그룹과, 이들과 결합된 이른바 세력의 정치적 실패에서 왔다고 분석했다.

문 정부가 집권하면서 당··청에 유입된 운동권 86세대와 여권 극렬 지지층인 이른바 문빠세력이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최 교수가 운동권 세력들을 쓴소리 한 것이 이번 만은 아니다. 지난 해 12월 초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19주년 학술세미나에선 "이른바 386세대로 통칭되는 이들의 정치화된 엘리트들이 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지난 뒤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정치계급'이 됐다""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방식을 민주화 시대로 되돌린 것은 이들 엘리트 집단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90년대 북한 체제에 대해 분석한 논문을 두고 한 매체가 색깔론을 제기해 곤욕을 치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 교수는 김대중 정부 초기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최 교수가 기고한 주요 내용을 요약했다.

그가 기고한 논문 제목은 다시 한국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위기와 대안이다.

이 글은 문재인 정부의 개혁정책이 한국민주주의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대해 평가한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 간의 극단적인 양극화와 더불어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왔다.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화는 강화됐고, 법의 지배는 위험에 놓였다.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은 위로부터 국가에 통합되면서 사회적 다원화와 정당의 발전에 부정적인 힘으로 등장했다. 한국에서도 포퓰리즘적 정치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이 글은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에 입각하여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의 분산과 새로운 유형의 정당정치에서 변화의 출발점을 찾는다.

주제어: 문재인 정부의 개혁정치, 진보-보수간의 양극화, 민주주의의 양극화, 국가에 의한 시민운동의 통합

한국 민주주의는 양극화의 심화로 위기를 맞고 있다. 진보와 보수 간 정치 갈등의 양극화는 이른바 조국 사태를 통해 분출된, 광화문과 서초동의 대중 집회에서 상징적으로 표출된 바 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나 이념, 또는 가치의 양극화를 넘어, 하나의 집단적 열정과 또 다른 집단적 열정의 충돌을 동반하는 감정의 양극화를 불러온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진영 간 대립이 공론장을 해체하고 사회를 양분하며 극단적인 갈등으로 나타날 때,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제도들은 순기능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그것을 움직이는 윤리와 규범은 효능을 상실하며, 통치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한국정치연구 제29집 제2(2020)

양극화는 한국의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건강하게 작동 또는 발전할 수 없도록 하는, 다음의 세 가지 현상을 동반한다. 그것들은 때로 양극화의 원인이기도 하고, 때로 결과이기도 하면서 서로를 강화한다.

첫째, 대통령은 초집중화된 권력을 통해 정부를 운영 내지 통치한다. 그 결과는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특정의 통치체제가 민주주의일 수 있게 하는, 삼권분립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법의 지배가 가능하지 않은 전제정적 상황을 만들어낼 위험이 크다. 다른 하나는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집행부 권력의 확장은 이성적 공론장을 해체하며 시민사회의 다원주의적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데 있다

둘째, 선거의 승자로서 여당과 패자로서 야당 간 타협과 협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한다. 민주주의에서 집권당은 공공정책을 주도하며 안정적으로 정부를 운영해야 하는 책임을 안고 있다.

당연히 그 일은 야당 없는 일방적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야당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며, 야당과의 상호작용을 타협과 협력으로 이끄는 능력을 통해 실현된다. 하지만 격렬한 여야 갈등 상황은 정치과정을 전체를 일상적 선거 캠페인으로 전환시켜 버린다. 여당은 승자로서 정치과정을 주도하려 하는 동안 패자인 야당은 참을 수 없는 대가를 부과받기때문이다(Przeworski 2019, 8). 이러한 조건에서는 패자는 저항하게 되고, 승자는 여론과 운동을 동원하는 통치에 전념하게 된다. 그 결과 선거가 끝난 이후, 즉 선거와 선거 사이의 평상시에도 정부는 선거 캠페인과 유사한 방식으로 정치를 이끌게 되는데, 이러한 정부를 캠페인 정부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국가나 정부 영역은 물론 시민사회 전체가 과도한 정치화(over-politicization)와 양극화된 대립의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은, 이러한 캠페인 정부가 가져온 부정적 효과와 무관하지 않다.

셋째, 격렬한 정치 양극화의 조건에서는, 사회 저변으로부터 요구되는 이해당사자들의 다원적 의사를 대표하고 반영하며, 체계적이고 일관된 프로그램을 추진해 성과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중요하고 큰 개혁은 의회 다수의 동의는 물론 반대하는 세력과의 타협과 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지난 촛불시위 과정에서 정부에 대해 표출된 수많은 사회경제적 여망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룰 수 있는 정책 기조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정부가 다뤘어야 했는데 다루지 못한 주요 정책 영역들은 다음과 같다. 정책 의제의 최상위에는 빈부격차의 축소와 노동 문제가 있다.

그 아래에는 대기업 거버넌스의 원칙을 세우고, 중소기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설계하며, 자영업 비중의 축소에 대응하는 대안을 만들고, 젊은 세대의 교육 문제와 청년 실업 문제, 노령화에 따른 사회복지 안전망 확대 등의 정책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 과제를 말하기 이전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정치적 조건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우리는 20대 국회를 통해 여야 의원들의 물리적인 격돌로 입법부가 난투장이 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민주적 게임 룰이라 할 선거제도를 바꾸는 입법은 정당 간 합의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불문율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 사실만으로도 필자는 20대 국회를 민주적으로는 최악의 국회라고 평가한다.

그것은 정치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양극화의 거울 이미지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대한 사회경제적 갈등 이슈들이 정당 간 타협과 합의를 통해 입법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문재인 행정부의 개혁자들은 촛불시위 이후의 상황을 1980년대 민주화 이래 최고로 넓게 열린 개혁의 공간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의 민주화는 이행과 공고화를 순조롭게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사회적 요구와 가치, 열정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갈등을 제도화하는 데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세력이 민주주의를 이해했던 방식이 그러했듯이, 촛불시위 이후의 정치 상황에서도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개혁의 사령탑을 자임했다. 사회로부터 개혁의 요구가 강하게 분출할 때, 이를 정치적 다원주의의 방법으로 수용하고 통합하기보다는, 거의 독점적이고 일방적으로 통치권(mandate)을 부여받은 것처럼 이해하고 대응했다.

촛불시위가 중도는 물론 합리적 보수를 아우르는 사회적 대연정탄핵 정치동맹의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은 부정되었다. 개혁의 추진은 대통령에 의해서만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고 다른 정치 세력이나 야당은 배제되어야 했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강한 국가라는 조건과 대통령의 권력 확장은 밀접하게 결부된다. 이는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돌아보면 한국의 국가는 권위주의산업화와 더불어 정부의 행정관료체제, 특히 경제 행정관료체제를 발전시켰다. 이 점이 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에 문제가 되나? 정당 정치인이든, 시민사회 활동가든, 언론사의 기자든, 그가 누구라도 경제 행정관료체제의 운영자들만큼 전문 지식과 정보를 갖추는 일은 쉽지 않다.

정부 정책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고 숙의하고 대안을 구상할 때, 그들은 정부 행정관료체제의 정보에 의존하게 될 뿐 아니라 그들의 가치관과 관점에 의해 지배되거나 큰 영향을 받는다.

신자유주의를 경제의 운영 원리로 삼는 한국 사회에서 국가권력은 사적 경제 영역과 시민사회의 전체 영역으로 팽창한다. 동시에 그것과 병행하여 대통령 권력도 팽창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 광범하게 존재하는 여러 기능적 공간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준() 공적기구들이다.

이를 서구에서는 쾅고’(quango)라 부르는데, 그것은 정부의 공적 역할을 사적 민간기구, 기업이 위임받아 대행하는 기관 내지 업체들을 일컫는다.

또한 한국의 중앙 부처 산하에는 공식적으로 400여 개의 공기업과 공사가 있다. 그러나 정부의 예산이나 운영 자금 지원을 통해 운영되는 준 공적기관들은 수천 개에 이른다. 이 공간은 자주 부정과 비리, 무책임의 온상이 된다. 어쨌든 국가 영역의 확장은 대통령 권력이 동반하는 여러 형태의 부대(附帶) 이익(perk)의 자원이 된다.

민주화 이전 오랜 권위주의 시기 동안 법의 지배는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는 것은 항시적인 것이고, 또 일상적이었다. 민주화 이후 개정된 민주 헌법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산은 쉽게 없어질 수 없었다. 경로 의존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는 법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법을 운영하는 사람이 지배하는 것을 가리킨다. 법이 곧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법과 법 운영자, 집행자 사이에는 넓든, 좁든 괴리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법의 지배를 위해서는 법의 정신과 그것을 지키는 사람의 행위 규범이 중요하다.

한국의 헌법은 제헌 헌법으로부터 87년 민주 헌법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는 자랑할 만한 좋은 내용을 갖고 있었다. 제헌 헌법의 제정자들은, 한편으로 대통령중심제, 개인의 자유 보장 등을 담은 미국 헌법의 장점을 받아들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회 중심제적 요소, 헌법기관으로서의 정당, 개인의 사회경제적 권리 인정, 독립적인 헌법재판소를 담은 전간기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의 좋은 점들을 취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다르다. 청와대 정부의 저자 박상훈은 한국의 대통령제를 민주주의보다는 권위주의 쪽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 것은 청와대였다라고 말한다(박상훈 2018, 13).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헌법 86조가 명기하고 있듯이 현행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도 국회가 국무총리를 선출하게 할 수 있다.

헌법 87조가 말하듯 국무총리가 장관들에 대한 실질적 제청권을 발휘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헌법의 정신과 달리 국무총리와 내각은 청와대의 한 부속 기구에 불과하다.

두루 알다시피 법의 지배는 삼권분립과 함께 통치체제로서의 정부를 구성하는 세 기구 간의 견제와 균형에 의해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때 대통령중심제는 전제정으로 빠진다. 그러나 강력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대통령 중심제는 원천적으로 전제정의 위험을 안게 된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을 배출한 정치 세력, 정당이 사실상 세 기구의 권력 모두를 갖기가 쉽다. 아니 쉽다기보다는 실제로 현실이 그렇다. 미국의 두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두 가지 점을 특별히 강조한다(Levitsky and Ziblatt 2018).

하나는 가드레일의 존중이다. 삼권분립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정당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의 자제와 평등한 권리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전제된 행위의 규범은 그래서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집행부 수장인 대통령이 가져야 할 규범인데, 핵심은 자신의 권력 사용에 대한 절제에 있다. 특히 입법부와 사법부에 대한 대통령 권력의 절제는 삼권분립이 효력을 가질 수 있는 중심적인 규범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에게 제도적으로 부여된 권력 행사의 절제와 관련된 규범이 지켜지지 않음은 최근 사법 행정관료 기구의 수장이 조국 사태로부터 청와대 비서실의 선거 개입 의혹을 다루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행위에서 잘 드러난 바 있다.

또한 고위공직자 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으로 약칭) 제정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법의 결정과정에서도 대통령 권력이 절제의 규범을 존중하면서 행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대통령의 권력 행사 방식은 법의 지배라는 대() 원칙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필자는 일찍이 미국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이 연방주의자 논설10번에서 말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사안에 재판관이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Hamilton, Madison, and Jay 2019, 82). 그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누구도, 어떤 제도나 기관도 법 위에 군림’(legibus solutus)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공수처법은 민주주의에 있어 지극히 위험한 법이다. 이유는 이렇다. 우선 왜 모든 것에 우선하여 검찰 개혁이 그토록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최우선의 개혁 아젠다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 자체에 설득력 있는 답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그 법은 다음과 같은 부정적 결과를 만들어내기 쉽다는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대통령이 신설되는 기관의 수장 임명권을 가짐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대통령에게 또 다른 엄청난 권력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그리하여 새 법은 대통령을 위한 법이 될 위험성이 높다. 따라서 대통령의 전제정화를 제도화하는 가능성을 불러올 수 있다.

민주화 이후 정당 간 갈등이 심해질 때마다, 법은 정치 투쟁의 중심에 섰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몇 년에 이르러서는 여당과 야당 간 쟁투가 언론 보도와 사법 절차에 크게 의존하는 양상이 심화되었다. 그러할 때 민주주의 하에서의 정치가 선거나 정당, 의회의 기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스캔들에 의해 지배하는 현상으로 치환될 수 있다. 언론에 폭로된 스캔들을 중심으로 정치가 여론 동원과 경찰의 조사, 검찰의 기소와 같은 비정치적이고 사법적인 절차에 의해 압도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배하게 되는 우려를 낳는다.

이 법은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표출시킬 수 있다. 국민 청원의 형태를 통해 또는 인터넷 전자소통 매체들을 통해, 법적 고발은 물론 판결 이전에도 고위공직자들의 부정, 비리 등을 공개적으로 여론화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 결과 반대당 인사, 또는 정치적 비판자에 대해 공적, 사적으로 제재를 가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공수처법이 시행된다고 할 때, 그것은 직접 민주주의의 한 제도인 주민소환제 또는 탄핵과 유사한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이 법은 법률 제정자가 천명한 목표와 달리 검찰 관료조직을 혼란에 빠트리고 분열시켜 민주적 사법 절차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우리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코로나바이러스의 전 세계적 확산이라는 엄청난 충격 앞에서, 이 현상이 세계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새로운 문제를 대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에 앞서 세계적 수준에서 전개되고 있던 민주주의의 위기 현상이 많은 정치학자, 법학자들의 큰 관심을 동반하면서 가장 중요한 연구주제의 하나로 등장한 바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만약 민주주의가 붕괴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처럼 파시즘 운동이나 군부 쿠데타와 같은 방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위기 심화를 끓는 물에 던져진 개구리에 비유될 수 있다고 말한다.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뜨거워 얼른 튀어나온다. 그러나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데우면 그 물에 적응하면서 여유를 즐기다가 결국 나중에는 뜨거운 물에서 죽게 된다.

기존의 민주주의가 나쁜 법과 나쁜 실천으로 서서히 나빠질 경우,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위기를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퇴행을 거듭하다가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Ginsburg and Huq 2018, 77-119; Przeworski 2019, 176). 필자 역시 그러한 관점이 설명력을 갖는다고 본다. 법의 지배 원리가 서서히 침식되는 사이 민주주의도 위기에 처할 수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와 국가 간 관계와 관련해, ‘강력한 국가 대() 쟁론적 시민사회라는 말만큼 그 특성을 잘 표현한 것이 없다(Koo 1993, 231-249). 시민사회는 강력한 민주화 운동의 사회적 기반이었다.

21대 총선은 특정 시민운동 출신들이 선거를 위해 급조된 정당의 후보로 선거 경쟁에 나서고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시민운동이 곧 정당이고, 정당이 곧 시민운동인 현상이 현실이 되었다.

정당과 운동 간 역할의 전치(轉置) 현상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전개 과정에 있어 분명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하다. 한편으로 정당은 시민운동으로 협소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시민운동과 지식인 그룹은 국가 영역과 정치사회의 한 하위 범주로 통합되었다. 공론장의 소멸은 이 과정의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국가권력과 시민사회/시민운동의 결합은 호혜적인 상호의존 관계를 발전시키게 됐다. 이는 이들 양자 사이에는 특혜와 지원을 대가로 정치적 지지를 교환하는 관계’(clientelism)가 자리 잡았다. 이는 지방 정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대의민주주의보다 직접민주주의가 강조된 것은 이런 변화를 정당화하는 한 방편이었다. 시민참여 민주주의, 시민참여 거버넌스 등의 모토로 방대한 예산이 시민운동이나 시민운동 출신들로 구성된 유사 공적 기관으로 분배된 것도 새로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과정을 주도한 것은 시민운동이 아니라 관료행정 체제였다는 사실은 지적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어디까지나 시민운동과 그 활동가들은 관료행정 측의 예산 집행과 평가체계에 종속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앙정부와 지방자치체 수준 모두에서 시민운동 활동가들이 정부의 공적 행위의 하위 파트너로 광범하게 참여하기에 이른 것은 한국 시민사회의 구조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과거 유신 시대에 사용됐던 행정적 민주주의라는 형용 모순적 말을 연상시킬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정치학자 테오도어 로위는 노동조합, 직능조합, 농민단체, 기업단체 등 미국의 여러 기능적 영역에서 이익집단에 관한 연구를 한 뒤, ‘타락의 철칙’(the iron law of decadence)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처음 이익결사체들은 사회 저변으로부터 노동자, 농민, 직능인, 중소 기업인들을 조직하고 확대해 나간다.

그렇게 힘을 키운 단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국가의 정부 관료들과도 협력 관계를 발전시킨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운동이나 이익단체의 활동가들은 계속해서 기층 시민들을 동원하고 조직하는, 어렵고 힘든 일보다 상대적으로 쉽고 노력이 덜 드는 정부 관료들과의 협력 관계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결국 운동과 이익결사체들이 국가에 포섭되어 타락한다는 것이다(Lowi 1971, 170-185; Crenson and Ginsberg 2013, 206). 한국의 시민운동이 국가에 흡수·통합되는 메커니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당은 대통령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집행부 수장인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은 가장 뚜렷한 경로 의존성을 보여준다. 대통령의 강력함은 사법부는 물론 의회 권력의 취약성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그것은 곧 대통령 권력에 대한 정당의 취약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의회가 정당들 사이의 갈등, 토론, 타협을 통해 법을 만들어내는 대표기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 안에 정당에 속한 정치인들이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임 민주주의라든가 국민투표식 민주주의라든가 하는 말은 국민의 대표로서 선출된 대통령은 있지만, 삼권분립 원리의 존중을 통해 자신의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책임()의 원리를 실천하는 대통령은 희귀하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런 조건에서 민주주의와 유사(類似) 권위주의 사이의 경계는 애매하고 또 모호하다.

정당이 대통령을 만들기보다 선출된 대통령이 그 자신의 지지기반을 가지면서 위로부터 정당을 창출하고 통제하는 것이 실제 현실에 가깝다. 정당의 정파나 정치인들의 유형적 특징을 말할 때면 그들이 갖는 이념이나 정책 대안이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대통령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흔히들 말하는 친박, 비박, 또는 친문, 비문이라는 말에서 보듯, 대통령과의 거리나 친밀도를 중심으로 하는 당내 파벌 구도가 한국정당 정치인들의 특성을 구분하는 사실상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

그것은 정당을 통제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의 권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 정부 시기 총선 후보 공천은 대통령과 청와대가 직접 관여했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후보 공천 과정 역시 그와 다를 바 없었다.

한국에서 모든 권력은 위로부터 창출된다. 이런 조건에서 정부 여당이 대통령 권력의 하위기구 이상의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통령을 위해서나 민주주의의 건강한 작동을 위해서나 전혀 긍정적이지가 않다. 정당, 특히 정부 여당은 사회의 다원적 기반과 조건들, 의사와 요구들을 통치 체제 내로 투입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통치체제로서의 정부와 사회를 매개하는 기구로서 정당의 관계가 괴리될 때, 강력한 대통령은 쉽게 사회와 단절되고 고립된 이른바 은둔형 대통령으로 귀결될 수 있다.

모든 것이 대통령 선거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위해 조직되고 운영되는 캠프 정치는 움직일 수 없는 특징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캠프 정치는 취약한 정당이 만들어낸 산물 내지 부수적 현상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정당은 더 주변화 되었다.

진보파들의 정치가 보수보다 훨씬 더 캠프 정치에 의존하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캠프 정치는 정당정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캠프 중심 정치는 정당과 달리 민주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 즉 대표와 책임의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선거 캠프는 누구를 대표하고, 누구에게 책임지는가와 같은 정치적 소명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의 행위에 대해 신념이나 책임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다. 캠프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선거기술자들이다. 전략가들이고 정치상담자들이고, 미디어전문가들을 포함하는 스핀 닥터들이다. 그들과 더불어 캠프의 중심을 이루는 또 다른 집단은 교수, 전문가, 전직 관료, 법률가 등 여러 분야를 대표하는 명사들이자, 정책 자문역들이다.

이들이 어떤 공통의 가치와 이념을 지녔는지는 분명치 않다. 정치인들이 가져야 하는 윤리 의식이 필요하지도 않다. 대통령 후보나 정당이 내거는 선거 공약과 이들 자문역들이 기회 있을 때 천명하는 정책 방향에는 정반대되는 것들도 흔하다.

선거 공약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영역인 경제정책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러므로 공직 추구와 권력에 대한 열망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어떤 정치 규범이나 행동 정향을 공유하지 않는 아노미(anomie)’ 집단이거나, 정치 자문역으로서 견지하는 윤리를 발견하기 어려운, 무도덕한(amoral) 집단이다.

그리하여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가 당선될 경우, 캠프 구성원들은 후보와의 거리 내지 그간의 역할과 기여도에 따라 새로 수립된 정부의 수많은 공직에 충원될 수 있는 인적 풀로서 역할을 한다. 이는 정당이 아닌 캠프가 정부를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캠프 정부의 출현이라 부를만한 변화다.

캠프 정치는 그동안 한국 정치의 또 다른 강력한 현상으로 등장한, 말하자면 특정 인물을 열열하게 지지해서, 특정 정치인을 열정적으로 따르는 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일종의 컬트적’(cultist) 운동과 결합되기에 이르렀다.

현상은 강고한 결속력과 공격성을 핵심으로 하는 한 정치운동이라 하겠는데, 그것이 강력한 것은 여러 형태의 인터넷 소셜 미디어가 한국 정치와 선거 과정을 지배하는 힘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 운동이 동반하는 집단적 공격성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점차 진행되어온 사회적 다원주의의 약화와 병행하는 아노미적 시민의 창출을 사회적 자원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의 집단적 행위와 그 역할은 두 방향에서 한국의 정치와 시민사회에서 격변적 결과를 몰고 올 정도의 영향력을 갖는다.

하나는 앞서 말한 시민사회 공론장의 황폐화이다. 이는 동원된 다수의 전제정이라 말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들은 소수의 리더가 이끌어가지만,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소셜 미디어를 수단으로, 가상적으로 조직된 다수이다.

이들 조직된 다수가 공론장을 지배하면서 여론을 주도하고, 이견이나 비판을 공격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며 사실상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다른 하나는 그것이 정당정치와 선거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력이다.

요컨대 그것은 정당을 주변화하고 대통령 중심주의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효과적인 힘이다. 이들은 대통령 선출을 위한 예비선거와 본선에서 강력한 결속력을 갖는 지지자 집단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은 실제로 공천과 선거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선만이 아니라 총선에서도 그 영향력은 발휘된다. 이들 소셜 미디어를 움직이는 몇몇 주역들이 정당 지도자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는 것임은 물론이다.

또한 정당은 대통령만이 아니라 대중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시민으로부터 소외되는 데는 언론과 시민운동이 만든 반()정치 정서의 효과가 크다. 이러한 반정치 정서의 기원은 한국에서 운동에 의해 주도된 민주화 시기는 물론 그 이후의 민주주의의 공고화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는 민주화로의 이행과 더불어 선거공간이 열리고 민주화에 참여했던 젊은 세대들이 시민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을 때이다. 기성의 정치와 선거공간은 권위주의 시기 활동했던 정치인들에 의해 선점되어 있는 환경에서, 민주화를 도덕적인 표상으로 이해하고 구질서의 전면적 개혁을 상념하고 지향했던 젊은 세대의 시민운동 활동가들은 직업정치인들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은 구정치인들을 권위주의와 일정하게 타협하고 공존했던 구질서의 한 부분으로 이해했다. 그 때문에 많든 적든 부패하고 부도덕하고 무능하고 당파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직업정치인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확산하는 데 앞장섰다. 시민운동은 제도화된 기성 정치권을 부정시하고, 선거 과정 자체를 도덕화하려 했다.

이는 정당 중심의 제도권 정치에 대한 시민운동의 개입, 내지는 새로이 개방된 선거 과정에 시민운동이 참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 자신을 점차 정치 세력화하는 동시에 기성 정치집단을 약화시키는 그들 나름의 정치 참여방식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2000년대 초 노무현 정부에 이르렀을 때 이들은 정부의 중심적인 지지 세력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성격의 정치참여 방식, 내지는 정치 운동이 유권자들로서 일반 시민들의 정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한 운동은 정치 그 자체를 도덕적으로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갖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정당은 사회적 갈등을 대표한다. 갈등을 다루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정치 조직체이다. 정치적 경쟁과 갈등이 도덕적인 가치를 함축한다 하더라도, 동시에 쟁론적일 수밖에 없는 것 역시 분명한 현실이다. 시민운동이 주도하는 정치 운동 방식이 민주적 정치과정과 다르다는 것을 시민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어렵다. 즉 사회의 다원적 요구와 의사를 정치과정에 투입해 실제 정책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정당 간 갈등과 타협을 본질로 하는 민주적 정치과정이, 시민운동이 내세운 도덕적이고 비타협적인 자세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원칙의 훼손이나 배신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정당정치와 시민운동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활동이고, 다른 성격의 역할이다. 시민운동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도덕적이고 반정치적인 민주주의관은 역설적이게도 정치의 효율적 가치를 중시하는 산출 중심 정치관과 쉽게 접맥될 수 있다.

언론과 운동이 만들어낸 반정치적 정서는 김영삼 정부 이래 2000년대 초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동안 일련의 정치관계법 개정을 통해 법적, 제도적으로 구체화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당과 시민의 단절은 심화되었고 정당은 왜소화되기에 이르렀다(박수형 2011). 정당의 이러한 왜소화된 모습은 촛불시위 이후 정치의 중심이 제도권 내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를 증오하고 부정하는 진영 간 대립을 둘러싼 열정의 동원과 결합하면서 제도 밖의 광장으로 옮겨져, 심각한 정치위기를 불러오도록 하는 상황과 결코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필자는 20204월에 치러진 21대 총선은 민주화 이후 정당정치의 약화와 왜소화,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현 상황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으로 이해하게 된다. 정당들의 인재영입은 거짓 쇼나 다를 바 없었다. 중계방송에 가까운 여론조사는 물론 단기적 목적에 부응하는 정치 아이디어의 기교들은 언론과 선거 과정을 장악했다. 투표자들은 어느 당이 어느 당인지 이름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급조되고 파편화된 정당 명부 앞에서 혼란에 빠지기 일쑤였다.

21대 총선은 한국 정치사에서 그렇듯 정당정치의 왜곡과 왜소화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대표 사례라는 오명으로 남게 됐다. 지금 우리는 선거 전보다 훨씬 더 거대해진 권력과 영향력을 장착한 대통령과, 훨씬 더 분절화되고 그동안 우리가 지향하려 했던 정치의 모습으로부터 일탈한 정당정치를 바라보게 되었다.

대통령 권력과 의회 권력이 불균형과 부조화를 이루며, 한국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이끄는 현상을 보게 된 것이다.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기초적 조건들, 민주화 운동이 가져온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방식, 줄여 말해 운동론적 또는 운동 중심 민주주의관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위기 극복의 대안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운동 중심 민주주의관은 앞서 지적했듯 반정치적 정치로 정의할 수 있다. 그 특징은 무엇보다 도덕적이고 관념적이고 이념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관은 공익, 내지 전체 공동체를 위한 대의에 복무할 수 있는 민주적 인간형, 말하자면 촛불 시민이나 깨어있는 시민을 전제로 한다. 그들을 우상화하면서 역사적 과제의 성취를 위한 주체로 호명한다. 이것이 제도적 모습으로 구현되고 표현된 것이 직접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이다. 직접 민주주의의 흥기와 포퓰리즘의 위험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여론에 의한 통치와 소셜 미디어 같은 의사소통 매체에 의해 촉진된 동원된 다수의 전제정이라는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

그것은 그들만이 전체 시민을 대표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도덕화한 반()다원주의이자 제도 밖에서 행위하는 인민 개념을 본질로 한다(Müller 2016, 32, 69). 이런 환경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에 의한 판단, 언론의 자유, 이성적 공론장의 활성화가 구현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의 정치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인민의 권력’(demo-kratia, people’s power)이 아니라 인민에 대한 인민의 통치’, 또는 인민을 통치하는 인민의 권력이다(Sartori 1997, 143). 이러한 대전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갈등의 불가피성과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제들이 가진 가치와 역할을 이해할 수 없다.

인민의 평등한 자유와 법 앞의 평등한 권리가 인민 권력의 산물이라면, 누가 그러한 자유를 지켜 줄 수 있나? 민주적으로 건설되고 제도화된 국가/정부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통치체제로서 민주주의를 이해한 다음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찾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시민 개인의 권리에 의해 제한된 국가’(limited state)로의 지향에 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 혹은 그 결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은 다원적 사회의 발전이다. 실제로 국가권력의 강함과 확장은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정신 및 헌법의 조문 그 자체와 충돌하면서 발생한 결과물 이상이 아니다. 이는 두 차원을 갖는다.

하나는 헌법 자체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선출된 정치인과 관료들에 의한 권력 남용, 권력의 자의적 행사 또는 정당하지 못하거나 불법적인 권력 행사의 산물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의 세 권력 부서 사이에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할 수평적 책임성의 취약함은 물론 선출된 대표와 행정관료 사이에서 실현되어야 할 수직적 책임성의 취약함에서 발원한다. 따라서 제한된 국가가 실현될 수 있는 조건들로서는 청와대 정부의 축소와 대통령 권력의 제한, 입법부에 대한 집행부 권력의 통제, 헌법재판소 역할의 강화,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의 상대적 자율성 강화가 우리가 지향할 수 있는 과제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강한 국가의 확대와 더불어, 그 짝을 이루는 것은 국가에 의해 흡수되고 통제되는 약한 시민사회였다. 그것은 국가 중심의 단원주의로 표현될 수 있다.

촛불시위 이후 진보적 정부의 성립과 그 운영 방식은 진보적 정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보적 시민운동의 동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하여 정부의 중심적 지지 집단으로서 시민운동은 지지-혜택의 연결망을 통해 국가에 흡수되었고, 그 결과는 자율적 시민운동의 소멸로 나타났다. 국가/정부와 시민운동의 결합은 그 비용을 치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사회를 다원주의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 정책을 지지하고 여론을 불러들여 정부 지지를 확대하는 운동은, 사회의 전면적인 정치화와 더불어 시민운동의 권력화를 가져왔다. 사회적 가치 지향과 의견, 열정들을 하나로 획일화하면서 전체 사회를 그 방향으로 움직여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는 동안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조직, 기관 또는 운동 단체들은, 이제 명실상부 권력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시민운동단체들의 역할과 성격의 전환은 곧 국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시민사회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국가-시민사회 통합의 과정과 결과가 곧 사회적 다원주의의 취약성, 사회적 공론장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위기는 갈림길을 의미한다. 그리고 뭔가 중요한 것이 변해야 하는 상황을 뜻한다. 그리하여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위기는 과거를 극복하는 어떤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쁜 상황으로 빠져들어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오늘의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현재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좋은 선택을 필요로 한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옛것은 죽어가고 새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상황을 위기라고 정의했다(Gramsci 1971, 276). 이런 문제의식을 통해 우리는 촛불시위 이후 전개되는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의 위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오늘날 정치위기의 중심에는 민주화 이후 보수 대 진보로 대표되는 정당체계와 그것을 이끌었던 정치세력에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그것이 표출해 보이는 정치적 리더십의 위기가 있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정치 상황을 위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먼저 보수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연원은 대통령탄핵을 불러온 박근혜 정부만이 아니라 앞선 이명박 정부를 포함하는 보수의 통치위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촛불시위 이후 문재인 정부의 등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는 전환점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한다. 그 위기를 만들어 낸 데는 진보의 위기가 중심에 있고, 그것을 선도했던 학생운동 세대의 엘리트 그룹과 그들과 결합된 이른바 세력이 있다. 필자에게 지금의 정치위기는 이 두 집단 사이의 내밀한 친화성을 발전시킨 것의 결과물로 이해된다. 오늘의 정치위기는 이들의 정치적 실패를 표현한다.

촛불시위 이전 보수의 위기는 무엇보다도 보수적이면서도 일정하게 권위주의적인 정부 운영 방식을 고수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민주주의 하에서 그것은 허용될 수 없다.

그렇다면 현재 진보의 위기는 무엇인가? 그들이 선도하는 위기는, 민주화를 위한 투쟁 하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초현실주의적이고 관념적인 개혁을 중심으로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개혁 방식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식이라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적폐청산을 모토로 하는 과거 청산 방식은 한국 정치와 사회에 극단적 양극화를 불러들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 분열을 초래함으로써 개혁의 프로젝트가 무엇을 지향하든 성과를 낼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들은 한국의 현대사가 잘못됐다는 전제 위에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 자체를 바로 세우겠다고 나섰다. 이는 국정교과서 만들기와 다름없는 역사관이 아닐 수 없는 일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진보 정치가들을 거의 항구적인 개혁을 주창하게 만드는 개혁꾼”(reform monger)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설사 개혁의 주체들이 스스로를 도덕적 개혁자로 자임했다 하더라도, 실제 현실은 그들이 설정한 높은 도덕적 기준과 규범들에 비슷하게라도 다가가지 못한다. 현실은 변화되지 않는 데 개혁의 목표나 담론은 과도한 조건에서 창출되고 확산된 갈등은 더욱 극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성적 정치 행위의 결과물로서 양극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상대에 대한 굉장한 거리감을 인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자, 서로의 공유할 수 있는 갈등이 아니라 나눌 수 없는 갈등”, 감정과 열정이 충돌하는 갈등 상황으로 한국의 정치공동체를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지금은 새로운 정치계급으로 등장한 과거 학생운동 세력이 문제의 해결자이기보다는 문제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은 큰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들과는 다른 가치나 경험을 가진 새로운 정치가 요구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이 균형을 이루고, 앞선 민주화 운동 세대들로 인해 가로막혔던 새로운 젊은 세대들의 광범한 정치참여가 가능할 수 있는 길을 말한다.

새로운 정치를 위해서는 문제를 두 가지 수준으로 구분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정치적 실천의 상위 수준에서 사회적 요구를 대표하는 비전과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곧 지적, 이론적, 담론적 문제를 포괄한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실천의 하위수준, 즉 직접적인 정치 행위 수준에서의 문제이다. 이 영역은 담론을 사회적 권력으로 실질화 하는 자율적 결사체 내지 조직을 만드는 문제이다. 앞의 것이 담론 창출의 공간 내지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이성적 공론장을 창출하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라면, 뒤의 것은 정당 정치의 새 영역에 관련된 문제라 할 수 있다.

만약 경쟁하는 진보와 보수의 정당들 사이에 그들이 지향하는 이념, 가치, 비전이 일관되고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게 된다면, 권력 획득만을 추구하는 배타적이고 강도 높은 열정은 점차 안정화되고 합리적 근거를 갖는 경쟁으로 전환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오늘의 한국정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에 대해 논할 때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원리와 규범에 부응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이다. 이론이 현실을 포괄하고 현실이 이론과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는 민주주의의 두 이념적 기둥이라 할 수 있는 평등과 자유의 가치를 중심으로 각각 그들의 정치적 역할과 존재 이유를 합리적으로 정립하고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정책적으로 프로그램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국가 행정관료체제와 사회의 자율적 결사체 사이에서 공적 영향력은 어떻게 배분되어야 하는지, 경제 운영의 방식에 있어서 성장과 분배, 기업과 노동 사이에 공공정책의 비중은 어떤 우선순위로 나뉠 수 있어야 하는지, 한반도의 평화공존을 위해 대북정책은 어떠해야 하고, 미국과 중국, 일본 등과의 국제관계는 어떻게 설정돼야 하는지 등, 그 해답은 결코 하나가 아닐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정당들은 이에 대해 답해야 하고, 그것을 정책화해야 하고,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이념 갈등에 역겨워진 사람들은 또 무슨 이념이냐고 반문하면서 비판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의 본질이 갈등에 있다고 할 때, 그 갈등은 이념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명시적으로 언표되고 천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 우리가 지금까지 충분히 살펴보았듯이, 명시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비이성적 열정과 적대를 둘러싸고, 우리 스스로를 동원된 다수의 폭력적 상황에 내던지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적대와 열정의 대립은 몽매주의에 가까운 갈등, 그 이상이 아니다. 필자는 덮어놓고, 타협과 협력, 협치를 정치의 덕목으로 강조하는 접근방식에 분명히 반대한다. 차이와 다름이 가치 있게 다뤄지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또한 필자는 의사소통 매체의 발전된 기술로 민주주의를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다. 의사소통 기술이 제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그것으로 갈등을 조정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미디어 매체들에 대한 무비판적인 의존이나 접근이 적대적 열정의 동원에 의한 갈등의 확산과 심화를 낳는 점에 주목해야 하고, 정당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통합하는 고전적 방법이 여전히 민주주의 정치의 중심적 기능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