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프레임, 박근혜와 이재용 회장 [제4화]
소설 프레임, 박근혜와 이재용 회장 [제4화]
  • JBC까
  • 승인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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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세상이 소설 투성이다. 현실이 소설, 소설이 현실이다. 이글은 소설이다. 오로지 소설로만 읽어야 한다. 글 속에 등장하는 개인, 기관의 이름은 모두 소설적 장치일 뿐이다.

진보와 보수, 남녀노소 모두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바라보는 관점은 달랐다. 그러나 아무리 시각차이가 있어도, 박 대통령은 96%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의 탄핵을 바라보는 시각은 전국민의 찬성인가. 물이 흐르듯 지금도 박근혜 탄핵 정국은 그렇게 흘러만 가고 있을까.

이것은 오성그룹 이재영 회장 특검수사와 법원의 기각을 바라보는 시각의 연장선상이다. 현재 언론이 진보와 보수 어느 쪽이냐에 따라 이 회장에 대한 입장과 시각차가 제각각이다. 해석 또한 다르다.

인간의 시각과 관점은 개개인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조직과 또 이해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박근혜 탄혜 정국에서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냉-온탕이 더욱 극명했다.

어찌 보면, 박근혜 탄핵에 대한 시각과 관점만으로 놓고 볼 때 ‘그럴 수도 있다’ 따라서 ‘이해 된다’로 보느냐’라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애초부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거나, 혹은 외쳤을 경우 SNS든, 다른 공간이든 인민재판식의 가혹한 형벌을 각오해야만 했다.

 때문에 박근혜 탄핵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 였다. ‘이해 안 된다’ 전 국민의 여론이었다. 그런데 타오를 것만 같았던 그 여론이 점점 식어가고 있다. 이것은 또다른 해석을 낳고 있다. 

분명하고 아쉽운 것이 있다. 이 사건은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을 이용해서 국정을 농락한 것에서 출발했다.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 안된다는 '부정'의 시각이 국민 개개인 뼈속 깊이 박혀 있다. 

이 시각이 얼마나 인간의 생각을 바보같은 분노로 섞이게 하느냐. 이제는 박근혜 이름만 들어도 울분이 생긴다든지, 때문에 대통령이 밥을 먹는 일상까지도 가식처럼 보인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무식으로 포장된 같잖은 것이다. 

사실 이런 부정을 더하도록 한 것은 내가 아니다. 언론이다.  지난 4개월간 의혹제기와 ‘카더라~’를 더욱 사실화 시킨 언론의 허위, 선동보도가 결정적이었다.

사실 확인이 안 된 추측성 보도를 남발하면서 여론이 악화되는 데 기여했다. 부실한 근거와 정황이 주를 이룬 추측보도가 이어졌다. 거기에 또 다른 의혹을 부르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언론이 사실보도라는 기능 대신 선동기관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최순실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이 재단 두 개를 만들고 재벌들로부터 800억원 가까이 걷어 최씨 일당에게 맡긴 사건이다. 국가를 위해 재단을 만들었다면 왜 공개된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사적 인연뿐인 무자격자들에게 맡겼는지 의문이다. 마사지센터 운영자가 국가 스포츠 진흥을 이끌 수 있는가. 그래서 이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익명의 취재원 일방의 주장을 검증 없이 보도하면서 최순실 의혹에 대한 사실 규명은 사라졌다. 대신 최 씨 일가에 대한 인신공격과 인격말살 위주의 마녀사냥 정국이 펼쳐지고 있다.

때문에 최순실 씨가 어느 정도로 국정에 개입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특정인을 아예 악으로 규정한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 행태가 정작 국민의 알권리를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 왜곡과 부정된 언론의 시각은 대다수 국민의 의식마저 마비시켰다.

"선동은 한문장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반박을 위해서는 수십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반박을 할려고 할때는 이미 사람들은 선동 되어 있다." 독일 나치의 괴벨스가 한 말이 이다.

이제 박 대통령은 괴벨스가 말한 수십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이것은 선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과연, 수십장의 문서와 증거를 제출해도 이 탄핵 정국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박 대통령의 어떤 문서와 진술도 ‘이해 안 된다’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있다’는 부정이 버티고 있는 이상, 진실이 이를 뚫고 새벽을 열기엔 너무나 버겁다. 

이 부정적 시각이 버티고 있는 이상 아무리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진실과 위증을 분리해서 따져본들 그것은 박 대통령이 살아남기 위한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은 인간의 프레임으로 해석된다. 한번 각인된 사건의 프레임은 여전히 뇌의 늪에 빠져 있다. 바로 여기에 마녀사냥법의 악순환적인 프레임이 존재한다. 어차피 박 대통령은 마녀사냥감이 되었다. 마녀에 대한 비난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마녀사냥감으로 몰리면 진실을 다시 정립하려든지, 아니면 진실을 처음부터 다시 파헤쳐야 한다는 주장은 들리지 않는다. 사실은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은 언론과 검찰, 대중도 그 해석에 일치하며 형성된다. ‘코끼리를 보여준 후 코끼리를 떠올리지 마라’고 했지만 뇌리 속에 자리잡은 어쩔 수 없는 의식의 프레임에 갇히고 만 것이다.

프레임에 갇히면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이것은 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반론이 끼어들 틈이 없다.

여기서 우리가 뒤돌아봐야하는 것은 “나는 잘못없다”고 말하는 박 대통령의 진정성과 의도다. 진실이 박 대통령 몸속에 숨어 있다한 들, 박 대통령은 그 진실을 잉태하지 못할 것이다. 국민의의 눈엔 애초부터 아니, 더이상 진실 따위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최순실 게이트를 놓고 바라보는 시각차.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또 인정해야 한다.  오도와 왜곡, 선동으로 점철된 이런 거짓과 사실의 현실에서  '진실'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입을 닫아버렸다.

정 팀장은 박근혜 탄핵 사건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비열하고 야비한 지 뼈속 깊이 깨달았다. 멍청하면 피곤하다는 단순 인간의 현명론이 아니다. 

배신과 이합집산, 그리고 음모가 그 음모를 죽이는 '음모의 또다른 함정.' 이것을 압축한 사건이 있다

1582년 6월 2일 새벽 일본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일명 ‘혼노지(本能寺)의 변이다. 교토 인근 혼노지 절서 일어난 모반이다. 군웅이 할거하던 다이묘(大名)들을 제치고 일본 전국의 통일을 눈앞에 둔 풍운아 ‘오다 노부나가(識田信長)’가 죽음을 맞았다. 

 

“울지 않는 새는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는 불같은 성정을 가진 결단력의 소유자 였지만 그는 부하인 ‘이케츠 미츠히데(明智光秀)’에 암살되었다.

 

정신적으로 추존되는 ‘노부나가’의 죽음은 “적(賊)은 혼노지에 있다”는 내부 적을 일컬으며 일본 사회 관용구로 쓰이고 있다.  ‘미츠히데’가 일으킨 반란은 ‘시저’에 칼을 겨눈 ‘브루투스’ 비유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선 10. 26 사태나 위화도 회군에 비유하기도 한다. 적은 언제든 내부에 있음을 알린 혼노지 변은 박근혜 대통령 적이 결국 박 대통령에 있었다는 모순의 역설을 던져준다. 

탄핵의 급박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방식이든, 대중이 요구하는, 즉 촛불이 요구하는 방향과 지시대로 그 측근중의 측근들이 박근혜를 매도하고 있다. 이미 촛불의 힘은, 대중의 힘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진실의 불이든, 아니든 그 촛불은 헌법을 초월했다. 그 촛불의 돌변을 지켜본 그 측근들은 박근혜를 향해 외쳤다.

"박 대통령이 지시했다." 

인간은 그런 상황에서 때론 선택을 강요당한다. 이럴 경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은 '배신'이다. 배신을 선택한 이후부터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를 합리화 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 일수록, 관료에 물든 인간일 수록록, 권세에 사로잡힌 인간들일수록, 더욱 비열하게 합리화 시킨다.

촛불의 흐름만을 볼때 ‘박근혜는 무능자요, 국정을 망친 장본인이다.’ 이런 완벽한 이분논리까지 버티고 있는데 양심 따위와 군주를 모시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논리는 이미 고리타분한 해석이다.

박근혜 수사를 진행하는 특검과 재판, 헌법재판소의 이분법 잣대는 민심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너무나 대중의 벽으로 포장되어 있다. 박근혜가 배신자들을 향해 "그대들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미츠히데"라고 한들, 그 외침은 초라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사건의 경우 시간의 흐름이다. 그 흐름에서 역류의 시점이 분명 일어난다. 그 함정은 지금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이 함정을 못 보는지, 안 보는지, 그리고 그 함정을 봤는데도 자기중심의 1인칭 시각에 갇혀서 자신이 외면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무수한 의문을 품고 퇴근해 집으로 가던 정 팀장은 정노천 시인이 생각났다. 자연에 묻혀서 그저 사랑의 새태에 대해 글을 적고 유희낙낙 살아가는 가난한 선비 시인이다.

정 시인은 한때 현실을 촌철살인화 해서 글을 적기도 했다. 그런데 6년전 서울이 싫다면서 고향인 지리산 부근 산청으로 가버렸다.

정 팀장은 문득 정 시인을 만나고 싶었다. 그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 볼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