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프레임, 박근혜 탄핵 본질을 묻다 [제6화]
소설 프레임, 박근혜 탄핵 본질을 묻다 [제6화]
  • JBC까
  • 승인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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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세상이 소설 투성이다. 현실이 소설, 소설이 현실이다. 이글은 소설이다. 오로지 소설로만 읽어야 한다. 글 속에 등장하는 개인, 기관의 이름은 모두 소설적 장치일 뿐이다.

지리산에는 눈으로 듣고 귀로 그리는 소리의 풍경이 곳곳에 배어 있다. 정호윤 팀장이 지리산을 반겼는지, 지리산에 속세에 찌든 정 팀장을 반겼는지 점점 지리산 속으로 한걸음씩 들어갔다.

정 팀장은 해 뜰 무렵, 지리산 노고단 등산길로 올랐다. 높이 1507m의 노고단은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을 대표하는 봉우리다.

노고단에는 지리산을 지키는 삼신할매(산신할머니)를 모시는 제단이 있다. 이곳에선 신라시대 때부터 제사를 지냈다. 국운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로 추앙받는 곳이 노고단이다.

이곳 삼신 제단에서 하늘과 땅을 보니, 인간은 모두가 하나인데 왜 우리는 그토록 서로를 못 잡아 먹어 안달일까 라는 생각이 눈이 내리듯 머릿속에 쌓이기 시작했다.

정 팀장은 어제 정노천 시인이 토로했던 말들이 생각이 났다. 산에서만은 이런 저런 잡생각을 잊으려고 했지만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기존 신문·방송의 의혹제기로부터 시작된 박근혜 대통령 탄핵. 하지만 의혹 뉴스를 퍼뜨린다고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정통성과 권위의 가치를 누구보다 강조했던 대통령이 무자격 민간인에게 국정을 맡겨놓다시피 했다가 이런 사태를 빚은 '초현실적' 상황이다. 대통령 7시간 이니 미용시술이니, 한 남성과의 섹스 의혹 등 대중의 상상력이 나래를 펴는 것을 어찌 탓 할 수 있을까요.”

산속에서 그저 세상을 향해 혀를 찼던 정 시인이지만, 그가 모처럼 지인 정 팀장을 만나자 쏟아낸 말들이 달구지 한가득이다.

그는 비열하고 거짓 인간들이 보기 싫어 세상과 담을 쌓아 지리산 부근에 삶의 터전을 잡았지만 사실 그는 세상과 담을 쌓은 것이 아니다.

박수무당이라는 그의 별명이 말해주듯 그는 거짓에 가짜에 항변한들, 그 항변이 촛불에 녹여들 수밖에 없기에 그저 꾸욱 참는다고 한다.

1837년 2월 사랑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투 끝에 세상을 떠난 러시아 시인 푸시킨.

그가 남긴 ‘삶’이란 시 한구절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푸시킨은 이 시를 통해 절망, 고통, 이별, 희망, 기쁨, 재회가 공존하는 삶의 본질을 읊었다. 순응하지 않으면 인간은 균형을 잃고 죽음을 만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싶어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삶은 원래 고달픈거다.

스스로를 아름답게 위로해줘야 한다. 아침이슬의 촉촉함을 가슴속에 한방울 떨어뜨렸을 때의 신선함이 때론 인생의 희열이다.

상대를 공격해서 흠집을 내게 해서 희열을 느끼는 자, 상대를 구속시켜 대리만족을 느끼는 자들, 거짓과 의혹만을 제기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 비열과 배신을 밥멋듯이 해서 마치 신뢰와 정의로운 사람으로 포장된 자들---

세상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이 말은 말그대로 ‘나쁜 돈이 좋은 돈을 쫓아낸다’는 뜻인데 실은 인간사가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정 시인은 그 악화의 첫 출발이 언론이었다고 단호히 강조했다.

정 시인은 어제 저녁 선동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가 말한 선동의 본질은 분노와 증오였다.

이 분노의 심리가 결국 사회심리, 군중심리, 집단 심리 등에 영향을 미쳐서 이성을 마비시켰다는 게 정 시인의 설명이다.

그의 말 요약이다.

“세계적으로 선동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히틀러 정치선동장관 괴벨스입니다. 나치 독일에서 국민 계몽 선전부 장관 자리에 앉아 나치 선전 및 미화를 책임졌던 인물이죠. 그의 유명한 어록은 많지만 작금의 상황에 걸맞는게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 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는 겁니다. 그 밑바탕은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게 하는 선동입니다. 선동이나 선전도 계속 반복하면 진리처럼 보입니다. 요즘 이런 선동을 이끄는 언론이 많습니다. 제가 어느 매체라고 콕 짚을 수 없겠네요. 전부 다니까요.”

이 말은 정 팀장도 일부분 공감을 했다.

사실 현대인은 메스미디어의 노예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정보는 우리의 의식을 만든다. 그리고 모두가 프레임에 갇혀 있다. 현재 언론은 선전선동으로 국민의 의식을 재단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언론은 온 종일 박 대통령의 사소한 거까지 도마 위에 올려놓고 마구 '까'고 있다. 언론이 까는 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매일처럼 쏟아지는 까는 뉴스가 혼돈스럽기만 하다.

노고단 산길을 걷고 또 걸었지만 이 생각들이 발거움을 무겁게 했다.

“선동과 선전, 분노와 증오, 그리고 진실과 거짓, 시각과 관점···”

몇 번을 되새겨 봐도 이런 단어의 조합들이 개체가 아니다. 연동적이고, 묶여 있다.

이런 조합의 단어들은 언론의 가치관과 그 윤리 마저 무너지게 했다.

기자가 권력의 재단사인가. 기자는 왜곡과 거짓을 알려도 되는 것인가. 흔히들,  팩트와 진실은 엄연히 구분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팩트에 충실해서 알리면 그것이 진실일까? 아닐까?’ 이는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몫이지, 기자는 사건의 전시물을 있는 사실 그대로 드러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하산했다. 정 팀장은 다시 정 시인이 사는 집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혼돈스러운 이런 상황에서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그와 좀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정 팀장이 굳이 지리산을 찾은 것도 산의 정취에 취해서 정신없이 오르고 내리면 마음이 홀가분 해지기 때문이다.

갈수록 산의 아름다움, 그 섬세함, 그 근엄함, 그 장엄함에 매료를 느끼고 있었다. 변함없이 묵묵한 산, 산과 가까이 하면 할수록 그 신비함을 느끼게 되고, 그 신비 속에 빠져들고 신성함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산에 들어가면 우리가 곧 산이 되고, 산이 곧 우리가 되어간다는 그 평범함을 이제야 느끼는 듯 했다. 정 부장은 산을 정복했기 위해 산을 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그 산에 올라갔을 뿐이지, 어떻게 정복할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세상사 사람들은 정복하기 위해 일을 하고, 정복하기 위해 내일의 삶을 살아간다.

회사 일에 쫒겨서 산에 올랐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제는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산이 달라보이니, 세상사가 달라보였다.

역시 정신적 여유가 생기니,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보인다는 말이 새삼 와닿았다.

어제 저녁 술이 은근히 달아오른 상태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않고 그냥 헤어진 게 찝찝한 구석도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산에서 내려 가니 차 한잔 합시다.”

“하이고 그냥 등산이나 즐기시지 뭐 또 야기 할게 있는교.”

정 시인이 말을 그렇게 하지만 실은 자신도 좀더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정 팀장은 지금의 언론 환경이 점점 싫어져갔다. 언론은 갈수록 죽어만 갔다. 언론이 사실 관계를 조금 전달할지는 모르겠지만 언론의 정신은 이미 죽었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클릭은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언론의 역할은 단순한 사실 보도에 있지만은 않다. 언론은 진실을 보도하고 사건의 본질을 파헤침으로써 올바른 여론 형성과 사회 계도의 역할을 선도하는 매체이다.

이러한 언론의 역할과 힘을 빗대어 '언론은 제4의 권력'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론은 갈수록 이러한 언론의 본연의 역할을 망각한 채, 단순한 흥미 본위의 기사로 소중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는 언론의 역할보다는 자본주의적 경제성 이론에 집착해서 언론 매체를 상업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언론은 기본적으로 대중 매체를 통해 대중과 상호 작용한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특성인 대중성과 상업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진실의 보도보다는 시청률이나 구독률을 문제 삼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선정주의적 문제점이 나타난다. 즉, 박근혜 대통령의 사소함의 보도. 보더라도 그 진실 여부를 떠나 잊혀진 사건을 감정적으로 보도했다. 보도 과정에서도 그 원인이나 배경 같은 본질적 측면보다는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사사로운 면에 치중했었다.

그 사건이 왜 발생했는가 등 근본원인을 따지기 전에 이미 언론이 상대편을 만신창이로 만든 후 감성과 감정, 그것을 혼합시킨 후 국민들이 그럴듯한 분노를 일으키게금 보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중들의 시선을 묶어 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올바른 여론 형성에 기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중들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할, 언론 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언론 본래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진실 보도에 있다. 대중들의 사사로운 관심을 끌려고 하거나, 언론 외적인 힘의 압력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진실을 파헤치고 그것을 알려야 한다.

정 팀장은 언론, 그 힘이 올바로 행사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선정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진실 보도라는 본래의 사명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진실은 무너졌다. 언론사는 기사보다 광고 수입에 더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인터넷 발달로 인해 종이신문의 위기가 원인인 것도 있지만 취재 현장에서 오직 한 우물을 판 선배들이 회사로부터 무언의 압박으로 광고를 강요당했다.

진실과 정의를 추구한다는 기사는 점차 사라지고, 돈이 되고 회사 수익과 직결되는 뉴스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되었다.

거기에는 진실보다 흥미 호기심을 자극하는 뉴스가 진실로 포장되어 졌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정 팀장은 산을 걸으면서 느꼈던 몇가지 사실을 메모했다.

‘시각은 의식을 낳는다. 시각속에 관점은 그냥 잉태 되어 진다. 그 시각 관점이 의식의 축적화를 거치면 거대한 이데올로기로 중무장된다. 이것이 행동으로 옮겨질 경우 인간의 방향이 되고 때론 신념으로 굳어진다. 우리는 상황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할 때 신념이란 자기의 소신을 더하는데, 그 신념속에 피어난 소신은 글쎄 잘 바뀌지 않는다. 촛불에 대한 신념 탄핵의 신념. 사실 그 신념과 고집이 무지에서 시작되고 왜곡을 본 후 의식 속에 그 왜곡이 사실로 둔갑되었을 경우 인간의 몸엔 거짓이 잉태되어 지고 그게 훗날 괴물이 되어진다. 탄핵 정국을 바라보는 촛불을 든 자들만의 시각. 또 태극기를 든 애국보수자들의 시각. 그 시각은 인정해야 하고 또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못했을경우 사회가 둘로 쪼개지고 급기야 그 분열은 혼란이다. 그 분열 혼란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 이건 그 분열과 혼란의 이후를 대비하는 기획자가 있지만 실은 의식속에서의 일치다. 그 흐름의 바다에선 언제나 쌍곡선과 맞닥뜨리는 지점이 있다. 이는 마치 자기가 태어난 곳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연어가 고향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듯 각각의 기획자들 역시 그 쌍곡선에선 의식의 합을 이루고 그 합이 정반이란 변증법적 합과 일치를 이룰 경우 하나가 된다. 연어의 귀속본능처럼 행동의 귀속 본능이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 시국을 악용하는 자들이 촛불이란 합을 형성시켰다. 촛불의 생중계. 그 광풍의 미디어가 대중을 일깨우고 불러 모았다. 검찰 정치인 그 많았던 이 땅의 지식인들이 한순간 촛불에 휘둘리고 눈치보고 배신과 이합집산을 하는 것은 의식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야비한 인간의 기회주의 전형인데 이런 자들은 애초부터 의식이 없다. 자기의 사소한 것을 지키는 게다. 그 지킴이로 인한 또다른 권세의 잉태자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하이고 정 팀장 지리산 한번만 더 갔다오면 도인 되겠소.”

정 시인은 정 팀장을 반가이 맞아줬다.

정 시인은 좀더 현실적 접근을 허용했다.

“정 팀장 탄핵의 본질이 뭘까요?”

엷은 미소를 띄우며 그가 던진 질문이 알 듯 모를 듯 했다.

“극좌파의 본질을 아시오.”

“뭡니까?”

“박근혜 탄핵은 그 본질들의 이합집산이 자연스럽게 일치되어 진행된 게 아니겠소.”

정 팀장은 그의 말에 동의를 할 수 없었다.

극좌파와 종북세력 세력들의 보이지 않는 힘이 전술로 나타났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정 시인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하나 하나 나열했다.

그도 지리산의 프레임에 빠진 것일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