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프레임, 박근혜를 향한 복수의 부메랑 [제13화]
소설 프레임, 박근혜를 향한 복수의 부메랑 [제13화]
  • JBC까
  • 승인 2017.10.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러두기=세상이 소설 투성이다. 현실이 소설, 소설이 현실이다. 이글은 소설이다. 오로지 소설로만 읽어야 한다. 글 속에 등장하는 개인, 기관의 이름은 모두 소설적 장치일 뿐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처음 언론을 통해 보도된 후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어 정치권, 검찰, 특검, 법원으로 이어지면서 프레임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졌다.

이 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때 언론은 처음 의혹과 카더라 보도를 통해 알렸다. 그런데 여론이 들고 일어난 것은 몇몇 의도된 제보자 기획에 의해서다라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로인해 최순실 국장농락 사건이 마침내 터진 것이다.

이런 비슷한 사건이 2014년에도 터졌다. 당시 언론은 청와대 참모와 비서진들이 국정을 아무렇게나 주무른다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 여론은 팽배했었지만 지금처럼 폭발된 것이 아니었다. 인터넷을 통한 댓글 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 분노만 표출되었다.

당시 언론이 보도했고, 그 보도를 본 국민이 공분했고, 또 그 보도를 네티즌들이 가공했고, 그 가공된 것이 다시 국민공분으로 재생산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국민공분이 수사로 진행되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는 알고보면 박근혜 대통령 식솔쯤으로 되는 평범한 아줌마가 소위 '까분' 사건이다. 그러나 그 아줌마 최순실이 까불었던 범위의 한계다.  사실은 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건과 상황 그리고 본질이 달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런 것은 무시한다. 이를 틀어쥐고 있다. 계속 프레임을 고착화 시키고 있다. 

언론에 의해 이 사건이 더욱 굳어지면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프레임의 덫에 국민 모두가 걸려든 것이다.  박 대통령이, 최순실이 아무리 억울하다고 항변해도 세상 사람들의 귀에는 반성도 하지 않는 뻔뻔자들의 외침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정 팀장은 애초부터 언론은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의 차이는 다소 다를 수 있겠지만 ‘최순실에 의해 국정이 농락 됐다’는 프레임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언론은 지난 5개월 동안 매일 같이 최순실 국정농락 게이트로 보도했다. 때문에 ‘국정 게이트’라는 그 굳은 프레임 속에 갇히 시각은 인권적 측면까지 외면한다.

박 대통령이 기자회견 하는 거 조차 못마땅하다. 또 최순실이 재판을 받지 않고 바로 실형을 내려야 한다는 여론까지 비등하다.

그가 구치소에서 몸이 아프다는 말은 거짓말이요, 치료 조차 해주면 안된다는 논리다. 박 대통령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여론은 국정을 파괴하고 농락한 최순실을 치료 해주는 것은 명백히 인권 남용이라고 판단했다.

최순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최순실은 아주 악마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그의 이름은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경멸한 이름이 그 였다.

국정농단이란 덫은 최순실을 통속적 프레임에 갇히게 했다. 언론은 그 통속적 프레임을 나열하면서 연일 부연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특례 입학,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던 사람들이 함께 마녀사냥이 되었다. 최순실 딸 정이라의 ‘특례 입학’을 허용해준 것만으로 죄인이 되었다. 

이것이 다른 학교 체육특기자도 그렇게 하는 지 안하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은 이화여대 교수들이 특례 입학을 시켜주었다고 단정했다. 그후 특검은 이들을 구속시켰다.

언론은 이대 교수들을 계속 부당한 교수로 낙인찍었다. 이것은 특례 입학시켜준 교수라는 프레임 등식화를 형성시켰다.

국가는 3심 제도를 통해 재판을 받을 권리를 줬다. 그러나 이대 교수들은 재판이 진행되기 전에 이미 ‘특례 입학 교수’로 판결을 받은 셈이다.

언론의 사설과 칼럼은 더욱 부채질 했다.

의심의 고정관념은 또 다른 의심의 고정관념을 낳는 형국이다. 이것은 사회 질서를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도록 허무는 것이다. 이 의식은 다른 의식도 완전히 파괴시킨다.

그래서 국정농단을 저지른 최순실에 대해 비난은 언론과 사법부 그리고 국민이 일치한다.

그 판에 박힌 비난은 재판과정에서도 계속 리바이벌 된다.

정 팀장은 그래서 사람들은 ‘악마같은 인간들보다 더 악마 같이 변한다’고 한다. 이 사건만을 놓고 볼 때 복수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자들도 누군가 나서서 이들을 응징하길 바란다.

그래서 복수의 대상이 된 박 대통령과 최순실에서 절대로 동정심 따위는 베풀지 않는다.

언론은 늘 복수자의 관점에서 그들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해주기 때문이다.

잔혹한 인간에 대한 응징은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유신론자들은 그것을 신의 형벌로 해석한다.

이 국정농단의 최대 피해자는 국민이다. 국민은 대통령 탄핵과 저주스러운 비난이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방어라고 규정할 것이다.

국민이 피해를 입었으니 그 해를 입힌 자들에게도 백배 천배의 피해를 입히겠다는 처절한 복수에 대한 생각이다.

국민은 일종의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어떤 죄를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

국민이 복수를 할 때 그 복수의 계산을 하는 것이 우둔함이다. 복수의 답은 그냥 복수다. 이럴 때 국민은 두뇌를 한번쯤 들여다봐야 한다.

국민 복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복수로 인한 피해와 상처는 복수를 한 사람은 물론 복수 당한 사람까지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이 최순실 사건에서는 왜 복수에 열광하는 걸까?

국민이 이 사건을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즐기고 있다. 가슴 한켠 쌓여있던 마음속의 앙금을 폭발해 버리고 유쾌하고, 속 시원해 한다. 또 언론의 무차별적 폭격 보도를 보면서 즐거워한다.

이 복수가 불타오르는 데서 누군가 용서라는 말을 끄집어 낼 수 없다.

이것은 성선설과 성악설의 이분법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순자의 성악설을 믿던 안 믿던 복수와 용서는 늘 성악과 성선설의 논리만큼이나 같은 축을 형성하며 따라다닌다.

‘성선설은 용서 쪽 성악설은 복수 쪽’ 이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복수보다는 용서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국민이 당한 고통을 배로 갚아 돌려주겠다는 입장은 성악설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쪽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너무 주관적으로 편파적인 것 같아 그런 생각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둬야 하지 않을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한 방법이 복수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복수는 정신적 통쾌함이 있을 뿐이지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어쩌면 복수심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수도 있다. 인간 본성에는 복수심과 용서하는 능력이 함께 있다.

용서하는 능력! 인간의 기본적 능력 중에서 가장 활용하기 어려운 능력일 수도 있다.

최순실을 향해 용서란 단어를 쉽사리 생각할 수 있을까.

이 국정 농락 사건은 아주 간단하고 복잡한 기획설이 존재한다.

정 팀장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자신의 비밀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평생 동안 복수를 한번이라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떤 사람에 의해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치유 받는 방법의 한가지로 복수를 생각하게 된다.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쉽게 하지만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란 어렵다. 복수심은 인간의 본성의 질병이나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참모습이자 언제나 우리 자신의 일부인 것 같다. 국민이 복수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복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일단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이 생기면 그 복수심 때문에 옆과 뒤를 보지 못하고 복수심만을 바라보면 앞만 보고 전진한다. 그렇게 되다보면 이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되고 복수는 연결고리를 물면서 계속 이어지게 될 수도 있다. 만약 이 중간에 누구 하나 용서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 복수가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용서는 가해자에 대한 당신의 사악한 의지를 극복하고 선한 의지를 회복하며, 가해자와 새롭고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열어놓는 내적인 과정이 아닐까. 이에 반해 화해는 당신을 해친 사람, 즉 복수의 대상자에게 다정하게 다가가 나빠진 관계를 바로 잡는 것이다. 용서를 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복수심에 불타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과 똑같은 마음의 인내가 필요한 거 같다. 그 사람에게 용서를 하는 것도 그 사람에게도 복수하는 것도 둘 다 마음이 복잡하고 무거운 것은 같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보다는 용서를 했을 때 그 사람이 마음이 더 편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세상이 복수심에 들끓는 세상보다는 용서와 화해가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 팀장이 노트에 기록한 이 복수와 용서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지 모른다. 이것은 책에서나 성직자 입에서나 내뱉을 수 있는 유치한 단어였다. 이미 용서가 프레임의 먹잇감이다. 

이번 탄핵사태는 이런 결과를 예측하고 이끌고 있는 주도 세력이 프레임을 기가 막히게 잘 활용하고 있다. 

이들은 그 용서마저 프레임에 녹여버렸다. 탄핵사태에서 용서와 관용은 악취가 베인 폐기물이다. 종북좌파 좀비들이 주도하는 이 탄핵정국 속에 용서와 관용은 없다. 이것은 태극기를 든 자들의 역설이다. 왜냐, 이 탄핵 정국은 이들이 만든 혁명적 기획들이기 때문이다. 

종북좌파들의 탄핵 기획들이 일치했든, 안했든 이제 태극기가 거대한 공감의 프레임을 형성시키고 있다.  

태극기. 그 태극기 복수의 칼날이 종북 좌파들을 향해 점점 다가가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