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표 굿바이
이영표 굿바이
  • JBC까
  • 승인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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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신문사 야근 당직때 나타난 이영표, 이제 '은퇴'라니

 

이영표(36).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이영표는 안양공고와 건국대를 졸업하고 2000년 안양 LG(현 FC서울)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했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을 묘사해서 흔히 ‘초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영표는 빠른 스피드로 인하여 ‘바람’이라는 별명도 얻기도 했다.

이영표가 한국의 유망주로 자리 잡기란 쉬운게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늘 근면성실이 몸에 배어 있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이영표

필자가 이영표를 만난 것은 1999년 4월쯤으로 기억난다.

당시 신문사 체육부장과 함께 야근 당직을 했을 때다.

올림픽 대표팀에 뽑힌 이영표는 청소년대표와의 친선경기에서 등번호 19번을 달고 후반교체투입 됐을 때 였다.

이영표가 교체 투입됐을 때 야근 당직자들은 “저 친구 누군지 프로필 함 자세히 보자”라는 말이 나왔다.

체격(177cm·66kg)도 축구선수 치곤 약했고, 청소년대표 경력도 없는 무명출신이 올림픽 대표팀에 출전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당시 왼쪽 윙백으로 출전한 그는 상대를 따돌리는 기술이 마치 바람의 아들이 마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필자는 곧이어 벌어진 코리아 컵이 열렸을 때도 야근 당직을 했었다.

이영표는 유상철 하석주 등의 부상으로 대신 출전한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전에서 A매치 데뷔를 치렀을 때다.

그 때 필자는 이영표의 활약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이영표를 소개한 별도의 박스 기사를 적었었다.

그는 무척 빨랐고, 나쁜말로 표현하면 공을 영악하게 찼고, 좋은 말로는 아주 영특하게 찼다.

상대 공격진은 그의 수비에 막혀서 꼼짝달싹 못했고, 이영표는 자신보다 신장이 큰 선수에게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그는 한국형 오버래핑을 선보였다. 100m 11초대 빠른 스피드. 바람처럼 공격했다가 바람 처럼 내려와 명품 수비를 선보였다.

성실성, 안정된 체력. 정확한 볼배급과 완벽한 크로싱.

그리고 환상의 개인기와 테크닉을 겸비한 한국최고의 유망주 였던 이영표.

한국 축구계는 모처럼 능력 있는 유망주 발굴로 기뻐했다.

#시련은 있어도 포기는 없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영표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축구선수라면 겪는 부상을 당했다. 99년 7월. 지금의 소속팀인 안양과의 경기에서 오른쪽 무릅인대 파열로 인해 큰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이영표는 힘겨운 재활훈련을 통해 이를 힘겹게 극복했다.

그는 2002년에도 부상 암초를 만났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부지런한 움직임과 끈기 있는 수비, 정확한 패스 능력으로 일찌감치 히딩크 감독의 눈길을 사로잡은 그는 부상을 당했다.

평가전 일정을 모두 마치고, 결전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대표팀 자체 연습 도중 차두리와 충돌해 종아리를 다친 그에게 치료에 3주가 걸린다는 진단이 나왔다.

주위에선 ‘월드컵 출전이 어렵겠다’는 회의론이 일었다.

이를 보기 좋게 깨뜨린 건 이영표 자신이었다.

포기하지 않은 이영표는 히딩크 감독의 기대를 저 버리지 않았다.

극적으로 회복된 이영표는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전부터 출전해 4강 신화를 이끌었다.

한·일월드컵을 마치고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 지휘봉을 잡은 히딩크 감독은 한국 대표팀의 박지성과 이영표, ‘애제자’ 두 명을 에인트호벤으로 데리고 갔다.

입단 초기부터 빠르게 팀에 적응한 그는 박지성과 함께 ‘코리안 듀오’로 활약하며 팀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이끌었다.

2004년에는 에레디비지에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는 등 유럽무대에서도 기량을 인정받았다.

이듬해 마틴 욜 감독이 이끄는 토트넘 핫스퍼에 입단했다.

박지성에 이어 한국인 2호 프리미어리거가 된 이영표는 단숨에 주전 자리를 꿰차는 등 맹활약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도 한국 대표로 출전한 그는 토트넘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리자 2008년 독일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입단했지만 더 큰 도약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2009년 7월, 주변의 예상을 깨고 사우디아라비아의 강호 알 힐랄로 이적했고, 2009∼2010시즌 알 힐랄 소속으로 리그 전 경기에 출전, ‘철인’이란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축구 인생을 바꿔준 마라도나

이영표의 인생을 바꾼 건 마라도나 였다.

1995년, 이영표가 중학생 때였다.

보카주니어스의 한국 내한 경기를 통해서 당시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였고, 펠레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로도 뽑힌바 있는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직접보는 행운을 맞이했다.

이영표는 마라도나 플레이에 감탄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이영표에게는 잊혀지지 않을 사건이 생겼다.

바로 마라도나의 왼손과 자신의 왼손이 맞닿았다.

이영표는 당시 우상과도 같았던 마라도나의 손이 자신과 스쳐지나간 것이 오늘날 이영표를 만들었다.

이영표의 트레이드마크로 불리는 ‘헛다리짚기 드리블’. 어렸을 때부터 이영표가 유독 드리블 훈련에 정성을 쏟은 건 마라도나 때문이었다.

마라도나의 드리블에 마음을 뺏긴 이영표는 마라도나 경기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반복해보며 훈련에 열중했다.

그가 마라도나를 만난 것은 2010년 남아공월드컵.

그는 어렸을 때 우상을 월드컵 경기장에서 만났다.

마라도나는 한국과 같은 B조에 속한 아르헨티나 감독으로 남아공을 찾았다.

이영표는 한 때 자신의 우상이었던 마라도나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굿바이 이영표

그런 이영표가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비록 고국에서 은퇴경기를 치르지 못했지만 지난 2년동안 이영표와 함께 했던 미국메이저리그사커(MLS) 밴쿠버 화이트캡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배려와 예우로 ‘초롱이’의 마지막 순간을 화려하게 빛냈다.

이영표는 28일(한국시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콜로라도와의 은퇴경기를 마친 뒤 ‘메트로뉴스 캐나다’를 비롯한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늘 은퇴했지만 너무나 행복하다.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순간이기 때문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이영표는 “훌륭한 팀과 좋은 동료들 곁에서 은퇴할 수 있었다. 고맙다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모두에게 감사드리고 특히 팬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밴쿠버에서 머물렀던 지난 2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밴쿠버는 이날 은퇴경기를 갖는 이영표를 위해 최상의 배려를 했다. 제이 데메리트는 주장 완장을 이영표에게 양보했고 카밀로는 첫 골을 넣은 뒤 이영표에게 무릎을 꿇고 공을 바치는 감동의 세리머니를 펼쳤다.

이영표는 “나는 오늘 주장이었다. 그러나 진짜와 가짜는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나는 오늘 ‘이미테이션’ 주장이었다”고 웃으며 “정말 고마웠다. 모두 나의 마지막 경기를 배려해줘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마틴 레니 감독은 후반 추가시간에 이영표를 교체했다. 스포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문화로 이영표가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도록 무대를 꾸며준 것이다. 이영표는 팬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걸어나왔다.

그 장면을 지켜본 레니 감독은 “어떤 말로 그 순간을 표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감격을 숨기지 못했다.

이영표를 “환상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한 레니 감독은 “그는 지난 2년동안 우리 팀의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했다”며 고마운 마음을 나타냈다.

이영표는 밴쿠버에 남아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에서 스포츠 마케팅을 공부할 예정이다.

대한축구협회도 이영표를 위한 별도의 은퇴 경기를 마련해주길 바란다.

헛다리짚기 명수 초롱이 이영표.

이제 팬들은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러나 팬들은 이영표 플레이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영표 앞날에 늘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