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DJ 처남, 이성호
비운의 DJ 처남, 이성호
  • JBC까
  • 승인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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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씨(85)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남이다. 이희호 여사 남동생이기도 하다. 지난 24일 이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서울 종로경찰서는 지난 24일 오후 3시30분쯤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남성 지인의 신고를 받고 오피스텔로 출동해 숨진 이 전 회장을 발견했다고 27일 밝혔다.

경찰은 "오피스텔 문 앞에 20일 이후의 신문이 쌓여있던 것으로 미루어 이 전회장이 숨진 시점을 19일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씨의 빈소는 26일 서울 중구 인제대 백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8일 치러진다. 나는 27일 오후 이 씨의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이날 장례식장에는 아내는 없었다. 20년 전 쯤 아내와 이혼했다. 아들 두명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아들 둘은 이 씨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 26일 오후 한국으로 왔다. 이 씨의 빈소에는 경복고 동기 서너 명만 지킬 뿐 이었다.

영정 사진 옆으로는 누나 이희호 여사가 보내온 조화가 놓여져 있었다.<사진 위> 이 씨 빈소에는 이날까지 누나 이 여사가 오지 않았다.

이 여사는 현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 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 인사는 “4월 이후 몸이 급격히 약해져서 현재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이 여사에게 동생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 쇼크를 받을 거 같아 말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전날 조카 김홍걸은 문상을 했다.

27일 오후 까지 김홍일과 홍업 형제는 문상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희호 여사 핏줄이 아니다. 김홍일은 건강이 좋지 않다. 동교동계 국민의 당 권노갑 고문, 박지원 원내대표,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등이 다녀갔다. 김경재 전 의원은 조의금과 조화만 보내왔다. 

이날 빈소로 온 조문객들은 하나 같이 인생 무상론을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이런말을 했다.

 "인생은 말년이 좋아야 하는데---."

이씨는 말년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남, 이희호 여사의 동생으로 살아가는 게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게 그의 말년 인생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말이다. 이 씨가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으면 DJ 처남이 돈 받았다고 수군 거리고, 또 식사를 했는데 밥값을 계산하지 않으면 DJ처남이 2만원 밥 값도 계산 안하는 아주 '짠돌이'라는 비아냥 소리를 들어야 했었다.

인생은 돈이 전부가 아니지만 인간은 말년일수록 가치를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돈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돈을 ‘품위 유지비’라고 표현하는데, 이 씨는 그런 품위 유지비가 다른 사람에 비해 서너배 더 들어갔을 것이다.

이 씨가 은둔형 인간이라면 모를까. 이 씨는 워싱턴DC 한인회장과 여행사 회장을 역임했다. 때문에 이 씨에게는 매일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씨는 신세 지는 것을 싫어했다. 식사를 하면 반드시 본인이 계산했다. 상대가 계산하려고도 해도 만류하곤 했다.

미국 두 아들도 보태주곤 했지만 이씨는 뚜렷한 수입원이 없었다. 때문에 이씨가 식사 값을 계산하면 일각에선 누나 이희호 여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걸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 씨는 누나로부터 돈을 받은 적 없었다. 김 전 대통령도 한푼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씨의 딱한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를 향해 야속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씨는 "그런 말 하지 마라"고 손사래 친다.

일반인들은 그가 명색이 대통령 처남에다, 누나가 이 여사인데, 경제적으로 아주 힘들게 산다는 것을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이씨는 나이가 여든다섯이다. 그 나이에 노동을 할 수가 없다. 만약 모아놓은 재산이 있었다면 이씨는 많은 이들에게 베풀고 살았을 것이다.

이 씨는 모아놓은 재산도 없었다. 그런 그를 경제적으로 도와준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그는 지난 몇년 간 경복고 동창들, 혹은 몇몇 지인을 통해 일주일에 십만원 정도 지원 받으면서 살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 장례식장에서 그가 고독사와 영양실조로 사망했다는 말이 나왔다. 여든 다섯 노구로 오피스텔로 가면 누군가 밥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가 굶는 것은 다반사였다.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 한 채 혼자서 침대에 누웠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이날 그를 아는 지인들은 그가 스스로 식사를 끊고 이런 고단한 삶과 작별을 하려고 했을 것이란 이야기도 나왔다.

최근 그는 빚보증을 섰다. 자기보가 더 힘들다는 후배가 찾아와서 보증을 서 달라 했는데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빚 독촉에도 시달렸다. 지인들은 그가 워낙 빚독촉 전화에 시달려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했다.

지인들은 그가 전화를 받지 않자 빚독촉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짐작했다. 그러나 그는 전화 받을 힘 조차 없었다. 침대에 홀로 누워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인은 24일 그와 저녁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 지인은 이날 오후 쯤, "이성호 회장에게 수십번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저녁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날 저녁 다시 전화를 했다. 전화기에선 이 씨가 아닌 경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성호 씨 핸드폰 맞는데 그가 별세했습니다.”

이씨의 인생 여정은 여든 다섯의 나이로 이렇게 막이 내려졌다.

인생은 참 덧없고 허무하다.

한없이 인생무상이 느껴지는 하루다.

이씨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