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취재 X파일
길은정 취재 X파일
  • JBC까
  • 승인 2017.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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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정씨 미안합니다. 명복을 빕니다"

26일 오전 북한산 중간쯤 오를 즈음, 한 지인의 전화가 왔다.

“편승엽씨가 방송 출연했는데 봤냐”고 물었다.

방송은 보지 못했고 북한산 등산로 바위에 기대어 폰을 통해 인터넷을 뒤적여 봤다.

편 씨가 어느 방송에 출연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했다.

인터넷 뉴스를 보니 편승엽이 한 방송에 출연 “길은정이 직장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길은정 본인도 몰랐다”며 “마음을 잡아주는 게 도리인 것 같아 병원에 있을 때 혼인신고를 했다”고 밝혔다는 내용을 전했다.

편승엽. 그는 고 길은정(1961년-2005년)과 이승에서 짧은 연을 쌓은 부부였다.

그가 출연한 방송 화면을 보니 외모적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머리 곳곳엔 흰머리카락이 배어 있고, 얼굴은 이제 완연한 중년의 모습이었다.

늦었지만 이 지면을 통해 안부라도 전하고 싶다.

 

방송화면 캡처

#9년 전 어느날

필자가 편씨를 만난 것은 9년전쯤이다.

그가 ‘찬찬찬’ 노래로 ‘가수 주가’가 폭등한 후, 길은정과 이혼해서 내리막길을 걸을때 즈음이었다.

그후 9년만에 방송 화면을 통해 편 씨를 처음 봤다.

필자는 편 씨와 인연을 강조하기 위해 이 글을 적는 게 아니다.

작고한 길은정과 취재 과정에서 얽혔고 설힌 것을 풀고, 길은정씨에게도 사과하고 싶어서다.

무슨 사연이 있었길래 사과까지 한단 말인진 궁금해할거다.

9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길은정 편승엽 명예훼손 사건이 발단이었다.

아마 당시 필자는 편승엽·길은정 이 사건을 거의 특종하다시피 보도를 했었다.

당시 기자들 사이에선 편승엽 이혼 진행 사항과 길은정 폭로 전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필자에게 물어보면 알 거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편승엽은 길은정의 직장암 투병 사실을 알고도 1996년 결혼했다.

하지만 7개월 만에 이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6년 뒤 길은정은 인터넷상에 공개일기를 썼다.

그러면서 편승엽을 향한 비방과 사기 결혼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편승엽의 주장이 맞서면서 법적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암 투병중이었던 길은정은 무척 신경이 예민했었고, 당시 우울중 치료까지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두사람은 법적 분쟁에 돌입했다.

법정 출두하는 길은정

#법정에서  마주친 길은정

두사람의 법적 분쟁이 극으로 치달았던 2004년 2월 16일 오후 서울 서부지방법원.

당시 407호 법정에서 형사 6단독 이철규 판사 심리로 열린 6차 재판에서 이 판사는 길은정에게 감치결정을 내렸다.

감치결정은 재판부의 명령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거나 위신을 훼손시키는 사람들을 재판부 직권으로 제재하는 조치다.

문제는 구속피고인 대기실로 간 길은정이 신체마비 증상을 보여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는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발단은 편승엽이 신청한 증인심문에서 시작됐다.

이 판사는 편승엽이 신청한 증인 김모씨를 상대로 질문했다.

이 과정에서 길은정은 “김씨가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항의했고,

이 판사는 길은정에게 “피고인, 피고인 조용하세요”라며 여러 차례 주의를 줬다.

그러나 길은정이 이 판사의 주의 명령도 듣지 않고 거칠게 항의하자 결국 감치됐다.

이날 재판에 앞서 필자와 길은정은 재판부 복도앞에서 마주쳤다.

필자가 길은정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필자를 본 길은정은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당시 필자는 편승엽·길은정의 취재를 줄기차게 해오고 있을 때다.

문제는 재판 과정에서 벌어졌다.

길은정이 갑자기 당시 재판장에게 울면서 호소했다.

재판장 방청석에 앉아 있는 필자를 지목하며 “저기 뒤에 앉아 있는 저 기자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재판을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며 엉엉 울었다.

그러자 이 판사가 “어느 분이 기자냐”라고 확인을 한 후 “원활한 재판 진행을 위해 밖으로 나가달라”라는 ‘퇴장명령’을 받았었다.

당시 재판은 길은정이 제기했던 비방글에 대해 증인들이 법정에 출두한 후 “길은정 글이 사실이다 아니다”고 증언하면서 재판이 길은정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길은정은 다시 악수를 뒀다.

길은정·편승엽 법적 공방이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을 즈음이다.

 길은정 인터넷 일기장

#길은정 일기장엔

2004년 4월초로 기억된다.

“P모씨는 일본의 ‘호스트 바’ 출신의 남자접대부였다.”

길은정은 자신의 홈페이지 인터넷 일기장 통해 이렇게 폭로했다.

‘P씨’는 당연 편승엽을 지칭했다.

길은정은 ‘진술의 눈’이라는 제목으로 올리고 있는 시리즈의 4번째 일기인 이 글에서 “근래 방송가에서 공공연하게 떠돌던 ‘P씨는 호스트 바 출신’이라는 말을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이 등장했다”고 밝혔다.

길은정이 인터넷에 올렸던 비방글 중 ‘편승엽이 일본에서 호스트바 생활을 했다’란 글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러나 필자가 취재확인 한 결과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필자는 길은정이 지목했던 증인이라는 여인을 경기도 화성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었다. 채모씨라는 사십대 여인이었다.

그녀 역시 길은정과 함께 편승엽으로부터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했던 여인이었다.

현재 편승엽이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있는 마당에 편승엽과 그녀와의 구체적 관계는 적지 않겠다.

그녀가 편승엽이 길은정과 결혼하기 전까지 연인관계라는 정도만 밝히겠다.

당시 그녀는 “제가 공개적으로 ‘편승엽은 일본 호스트바 출신’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친구로부터 ‘일본의 한 클럽에 갔는데 편승엽이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자기 테이블로 와서 술을 따라주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길은정에게 말해주었는데, 이것이 와전돼 인터넷에 오른 거예요.”

길은정은 이것을 편승엽이 마치 일본에서 마치 호스트바 한 것 판단, 비방한 것이다.

당시 필자는 이 기사를 내보냈고, 길은정의 주장은 신뢰성을 잃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2004년 7월  재판부는 길은정에게 명예훼손죄를 적용 징역 7개월를 선고했다.

그러나 건강상 이유로 법적 구속은 시키지 않았었고, 

그후 필자도 편승엽·길은정 취재에서 벗어났다.

#시월의 마지막 길은정

2004년 시월의 마지막 밤.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가을저녁을 수놓았을 때였다.

필자는 그날 미사라 라이브 카페를 찾았다.

저녁 12시쯤 그때 다른 라이브카페에서 공연을 끝낸 길은정이 카페 입구 계단에 우두커니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당시 길은정의 그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길은정의 맑고 초롱한 눈빛, 마치 죽음을 앞둔 한 여인이 마지막 가을 하늘을 보는 듯 했다.

그해 겨울 누군가 길은정의 소식을 전해줬다.

암세포가 골반으로 전이되면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

그 소식을 전해들은 지 한달이 지났을까.

2005년 1월 7일 길은정은 마흔네살 일기로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1984년 ‘소중한 사람’으로 가수로 데뷔한 길은정은 끝내 소중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블루를 사랑한 길은정

필자는 2008년 10월 길은정을 만났다.

그를 만난 장소는 길은정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청아공원.

필자는 길은정 안치단 앞에서 “길은정씨 당시 취재 미안합니다. 아픔 없는 저 하늘나라에선 블루처럼 사세요”라고 명복을 빌었다.

청아공원측은 길은정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는지, 사망 한 달 전에 공원을 찾아 직접 안치단 위치를 고르기도 했다고 전해줬다.

블루를 사랑한 길은정.

길은정은 하늘로 먼저 간 천사였다.

암 투병은 천사였던 그의 성격과 정신마저 다 바꿔놓은 것이다.

25일 방송에서 편승엽이 길은정을 떠올리면 흘린 눈물도 아마도 길은정을 향한 연민의 정일거다.

 

‘깊어만 가네 저 하늘은/ 날 두고 높아만 가네~ / 커져만 가네 나의 사랑은/ 님 향한 나의 마음은 하얀 눈속에~’  

2004년 시월의 마지막 밤 미사리 하늘을 쳐다본 길은정은 아마도 자신이 보고 싶었던 하늘이 블루였는지 모른다.

그 하늘을 바라보던 길은정의 초롱한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다시한번 길은정씨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편승엽씨도 청아공원을 찾아서 초롱한 그녀의 눈을 보면서 명복을 빌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