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 46주기
역도산 46주기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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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글을 올리려 했었는데 이틀이 지났습니다. 우선 늦었지만 명복을 빕니다. 15일이 무슨 날이냐고요. 지난 15일은 재일한국인 역도산이 일본 야쿠자 칼에 찔려 죽은 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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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도산


 역도산은 1963년 12월8일 야쿠자 칼에 찔렸고, 일주일 뒤인 15일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일본에서 12월15일만 되면 역도산 추모일이라 해서 특집 방송이 편성되고, 언론도 이에 대한 보도를 잇따라 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작고한 지 46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역도산은 일본에서 추앙받는 영웅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가난과 전쟁의 폐허속의 일본에 희망을 안겨 주었던 사람이 바로 역도산이었습니다.  
 지난해 12월에도 이와 유사한 글을 적었습니다. 가라데 한방으로 서구의 레슬러들을 때려 눕혔고, 역도산은 강인함 그 자체였습니다. 1950년대 일본. 무엇보다 국민의 단합과 강인함이 요구됐던 시절, 역도산 등장은 패배 주의에 젖었던 일본인들에게 "하면 된다"는 희망을 안겨줬습니다. 
 당시 일본 어린이들은 천황 이름은 몰라도 역도산 이름은 알았다는 사실만으로 역도산이 얼마나 일본서 유명했는지 알 수 있죠.
최근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백과사전을 편찬했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단체에 한번 묻고 싶네요. 역도산도 친일파인지?
 워낙 자의적 해석과 판단을 잘하는 단체이기에 어떤 대답을 할 지 궁금하네요. 역도산 관련, 친일 논쟁은 지금은 많이 희석됐지만 여전합니다. 때문에 역도산을 바라보는 이들 단체의 시각이 궁금합니다. 
  역도산은 함경남도 출생입니다. 14세 때 전국씨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 역도산이 1939년 일본에 건너가 모모타[百田]로 개명하고, 1940년부터 역도산이라는 별명으로 스모를 시작했습니다. 일각에선 그가 조선어(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친일파로 규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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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도산
 
그러나 정말 무식하고 한심한 소리죠. 역도산이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과 관련, 역도산이 건너간 곳은 일본입니다. 일본에서 일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가 친일파일까요. 당시 역도산은 15세 때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지금 15세는 중학교 2학년생입니다. 그 어린 소년 역도산이 일본으로 건너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한번쯤 내 동생 형이다 생각하고 떠올려 보십시요. 
 그 일본 땅에서의 고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는 역도산의 대변인도 변명인도 아니지만, 그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38세에 야쿠자 칼에 찔려 숨을 거둔 조선인 역도산을 다시 한번 재평가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조선인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박치기 왕 김일 선생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재일한국인 여건부 선수와 고트네 선수도 있었고, 1958년 동경 아시안 게임때 한국 선수 스폰서도 자처했습니다. 그 뿐입니다. 한국 최초의 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를 후원했고, 재일 야구 영웅 장훈 선생도 후원했습니다. 역도산은 재일한국인들에게 꿈과 희망이었습니다. 
 역도산은 1963년 1월 한국에 와서 1964년 동경올림픽 지원도 약속했고, 한국의 체육발전을 위하여 서울에 스포츠센터의 건립도 약속습니다. 나아가 남북 통일을 위한 통일 전사가 자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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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묘지 묘역의 역도산 흉상
 
그런 역도산이 현재 일본 니시마고메엔 혼몬지 (本門寺) 묘역에서 외롭게 잠들어 있습니다.  혹시라도 일본 여행가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한번 가보셨으면 합니다. 전철역에서 내리면 가깝습니다. 
늦었지만 이국땅에 잠들어 있는 역도산을 추모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