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두얼굴(?)
세종대왕의 두얼굴(?)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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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중 최대  성군이지만, 그 이면에는--- 

 9일 한글날 입니다.

한글날 하면 떠오르는 임금이 조선 4대 세종대왕(재위 1418~1450) 아닙니까.

역대 임금 중 최고 성군으로 추앙 받으셨고,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군주상입니다.

세종의 업적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한글을 창제하고, 대마도를 정벌했는가 하면 6진을 개척하고 박연 등을 발탁하여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천민 출신인 장영실을 발탁하여 과학 발전을 이루었으니 치적으로 보면 성군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이 같은 세종대왕 업적을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겁니다.

필자는 오늘 세종대왕 업적을 나열하기 위해 글을 적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한글날, 세종이 진정한 성군이었는가, 아닌가.

나아가 진짜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을까 등에 대해 한번쯤 다양하게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적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폄하하거나 비하하는 것이 아니니 눈으로만 보세요.

며칠 전, 서울 인사동 한 주막촌에서 역사연구 활동 멤버와 막걸리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습니다.

이들도 세종의 업적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세종에 대해 재연구 및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뭔 말이냐면요.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세종은 고려 역사를 파묻고, 조선을 중국의 소국으로 전락시켰다고 합니다.

사실 일부 사료에는 세종이 고려 역사 서적을 불타우고, 고려사에 대해 수정했다는 흔적이 있습니다.

세종하면 ‘성군’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아마도 일반인들 입장에서 볼땐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항변할 수 있겠지만

한글날 세종의 양면성에 대해서도 한번 더 생각해보자는 의미입니다.

■태종과 세종

세종에 대해 접근하려면 세종의 가계도를 함 봐야 합니다.

세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올랐는지요.

세종이 왕위 오른 것은 형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동생인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해서 왕이 된 것이 역사적 정설입니다.

그러나 인사동에서 만났던 역사연구가들 시각은 약간 달리합니다.

세종은 국왕이 되기 전에 큰형 양녕대군, 둘째 형 효령대군과 치열하게 왕위를 다투었고 그 승리자라는 것입니다.

태종은 생전인 1418년(태종 18년) 8월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태종은 왕위를 물려주기 2개월 전 장자인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대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입니다.

세종의 아버지는 이방원 태종(1367~1422, 재위 1400~1418)입니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 태조를 도와 조선왕조 개창기에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전 등에 의해서 견제되었습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재기에 성공, 그러나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나 왕위에 오른 뒤 계속된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는 500년 조선조 국가 운영의 밑그림을 완성한 군왕이었지만 아버지 태조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 군주였습니다.

왕자의 난에 성공한 태종은 형 정종을 즉위시킨 후 정종 재위 2년 만에 왕위 올랐습니다.

 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세종은 권력과 그 권력이 지향하는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태종은 세종을 세자에 책봉하자마자 바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눌러 앉았습니다.

여기서 의문점은 태종이 물러났다는 점입니다.

 태종은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그런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자신은 상왕이 된다.

권력의 속성상 이것이 가능할 것으로 봅니까.

이는 태조가 권력에서 물러나 아들 태종의 뒤를 봐줬다는 논리 아닐까요.

조선의 역사는 왕위를 양도한다는 것은 신하들의 충성심을 엿보기 위한 미끼로도 활용했지만 실질적으로 살아생전 양위를 한 경우가 없습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왕위를 빼앗고,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왕위를 빼앗았다게 일부 연구가들의 주장입니다. 

■세종은 성군?

성군이 가장 먼저 덕목으로 삼아야 할 것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입니다.

몇가지 정책만으로 세종을 성군이 '아니다' '맞다'라고 평가는 할 수 없지만 일부에선 그렇다는 것입니다.

애민정책 입니다. 세정은 즉위하자마자 ‘부민고소법’을 폐지했습니다.

당시 부민고소법은 관리의 행포로부터 백성을 보호해지는 법이였습니다.

그런데. 세종은 이를 폐지시켰습니다.

훈민정음도 처음에는 한문을 쉽게 배우려는 의도로 만들었다가 후에 백성을 가르치면 좋겠다하여 ‘훈민정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백성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백성을 어리석게 봤다는 것은 논란과 해석의 소지가 있습니다.

■세종과 한글

세종 최대 업적은 한글입니다.

세종이 독창적으로 한글을 창제했다고 하지만, 진짜 그럴까요.

어떻게 글자란 것이 한 시대에 갑자기 창조가 될 수 있습니까.

한글을 전세계가 감탄하는 글입니다.

그 글이 세종 재위(1418∼1450)

25년~26년 사이 만들었다는 것이 가능할법 합니까.

한글과 같은 글자는 동·서양을 넘나든 엄청난 과학적 기반이 있어야 가능한 글자입니다.

한글은 원시대에 쿠빌라이의 명을 받은 라마승 파스파에 의해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의 문자등을 참조해서 만들어진 파스파문자라는 것입니디.

이것이 몽골글자로 창제를 했고 이런 지식기반이 원나라가 망하면서 조선으로 넘어와서 한글의 창제에까지 이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세종이 그런 글자를 한글로 창제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한글은 말 그대로 ‘훈민(訓民)’하는 ‘정음(正音)’입니다.

세종때까지 남아있는 조선의 흉노식 도덕질서를 유교적 도덕질서로 바꾸기 위한 유학자들의 극단적인 몸부림이란 시각도 있습니다.

세종은 왕권을 장악하자마자 유학의 나라를 만드는데 매진합니다. 집현전을 만들어 기존의 흉노, 몽골적 요소의 국가 체계를 일신합니다.

또한 흉노적 분위기에 젖어 있을 백성을 계몽하기 위해 한글 만들어 직접 백성들에게 유학의 도를 전파합니다.

그래서, 한글창제하고 조선건국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 뿐 아니라 여인들을 유교로 교화시키기 위해 ‘언문삼강행실도’, ‘언문열녀도’, ‘언문효경과’ 같은 유고적 덕목을 담은 서적을 편찬하였습니다.

■22명의 자손 단종 비극 단초

세종은 무려 22명(18남4녀)의 자식을 두어 조선왕중 최대 중 가장 자식이 많았던 임금중 한명입니다.

한편에선 왕실번창을 위한 것이라면 또 한편에선 성생활이 약간 문란했다는 방증이라고 합니다. 

세종 죽음에 대해선 피부병 등 다양한 설들이 있지만 일각에선  성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자식 관계가 결국 조선 최대의 비극 사건 단초를 제공합니다.

세종은 태종과 달리 죽을때까지 장자승계원칙을 내세우며 병약한 문종(재위,1450 ~ 1452)에게 보위를 넘겼습니다.

이로 인하여 세종 왕자중 가장 뛰어난 수양과 단종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갈등이 생겨났으며 정유년에 난과 사육신의 난으로 얼마나 무고한 사람이 죽었습니까.

이는 세종이 장자승계원칙에 과도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결국 조선 비극의 최대의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만약 세종이 수양에게 보위를 넘겼으면 그러한 비극이 일어났을까요.

조선시대 성군을 보면 모두 후계구도를 확실히 해놓았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세종은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만든 조선최고의 임금이란 것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는 결국 권력에 의해 포장되고 씌어진다는 점에서 세종이 신이 아닌 이상 그의 업적과 치적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적은 글입니다.

좋은 한글날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