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박근혜 돌로 치라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박근혜 돌로 치라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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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돌로 치라 했는데, 어찌 하오리까?

예수께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끝내지 아니하는 지라, 일어나 이르시되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8장 1-11절 요한기자 번안)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인간에게 죄와 벌은 무엇일까. 러시아 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사람을 살인하고도 감추는 자는 영혼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고 말했다.

‘죄’를 짓고 자백하지 않지만 그런 자에게는 이미 양심의 가책이라는 ‘벌’이 주어지므로 차라리 회개하고 형벌을 받아 영혼이 치유되는 길을 선택하라고 권면했다.

성경은 살인의 기원을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미움과 분노에서 찾는다. 우리는 그녀를 그렇게 마녀사냥 했고, “나는 마녀가 아니다”고 외쳤던 그녀를 향해 “더 악랄한 마녀다”고 세찬 돌팔매질을 해댔다.

그녀는 그렇게 마녀사냥을 당한 후 31일 새벽 힘없이 끌려갔다.

과연, 그녀에게 돌을 던진자들은 죄가 없단 말인가.

인간의 잔혹성, 그 끝은 어디인가. 권력을 가진 인간에 대한 마키아벨리와 토인비의 일갈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는 늑대이다”(homo homini lupus).

그 늑대는 자기 탐욕과 자기 기만에 쉽게 빠진다. 그리고 그 늑대는 잔혹한 야수로 돌변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해 존재토록 하기 위해 선동을 울부짖고, 탐욕이 하늘을 찌르고, 무서운 이빨을 드러낸 그들은 인간에게 마녀사명을 주입시킨다. 그 대상이 된 인간은 포악해지고, 잔혹해진다. 

인간은 난징대학살과 유대인 학살을 한 자들 못지 않게 그보다 더 잔혹해질 수 있다.

난칭 학살과 유대인 학살 등에서 인간은 인간이 얼마나 잔혹한가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그녀의 육체는 둔 채, 그 여인에게 정신적 난징,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 

한 여인의 육신은 살아 있지만 그 여인을 그렇게 죽이는 방식과 절차는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향해 저주의 마녀사냥을 하며 그토록 잔혹하게 죽이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녀가 이제까지 누려왔던 인간의 가치, 존엄성은 한낱 코를 푼 휴지에 불과했다.

인간은 인간이 존엄하다고 말한다. 그 존엄의 전제 조건은 인간다움이다. 그 인간다움은 사람냄새다. 그 사람 냄새의 밑바탕은 사랑이요, 베품이요, 용서와 자비다.

인간의 존엄 명제는 이런 가치를 잃지 않을 때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은 죽었다. 그  존엄이 없는 세상에 그들이 판을 친다. 

이제 거짓과 가짜의 위선자들이 쳐 놓은 저들의 경계선에서 가면을 쓴 자들의 극악 무도한 축제가 펼쳐질 것이다. 

거짓과 배신, 야비, 상식이 사라지고, 법치가 무너지고, 헌법이 이미 사라졌다. 그래서 저들의 놀이터가 된 대한민국에서 한 여인의 존엄성과 가치를 외치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으로 다가온다.

상식과 합리의 이성은 정치와 사회를 바꿀 수 있으며, 인간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상식과 합리는 결국 무너졌다. 우리는 상식과 합리가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상식과 합리의 이성이 세상을 바꿔놓을 수 없었기에, 인간은 외부의 무언가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 피아노 건반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피아노 연주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 연주는 위선자들이 깔아놓은 사회 전반적인 묵시적인 또다른 충성심과 매국적 요구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사이의 애매모호함'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아주 치밀하게 깔아놓은 그들의 경계선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이성마저 지배를 당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정치, 언론, 법의 계산된 세뇌, 그 세뇌속에 길들여지면서 이성을 상실했다. 

거기에 울분을 느끼고 있다. 그 울분이 분노가 되었다. 그 분노가 강물을 이루고 있다. 또 한편에선 샴페인이 사뭇 유쾌하게 솟구쳐 오르고 있다. 

신은 보시고 계실까.이스라엘 예루살렘에는 골고다 언덕이 있다. 예수는 이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바위 동굴에 묻혔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순례객들은 줄지어 서서 예수의 부활, 그 초월적 신비의 공간을 목격 했다.

그녀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은 외친다. 그녀는 죽은 게 아니다. 그녀는 다시 부활 할 것으로 믿는다.

성경에는 죽은 나자로를 예수가 되살리는 대목이 나온다. 위독한 상태의 나자로가 아니다. 이미 죽어서 온몸에 천을 두르고 무덤 속에 누워있던 나자로다. 그런 그가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장면이 성경에 있다. 과학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이 불가사의한 대목에 강한 물음을 제기한다.

사람들은 그녀도 언젠가는 진실로 부활되어 그렇게 세상밖으로 나올 것으로 믿고 있다.

그들은 모르는 게 있었다. 그녀의 구속이 모든 것을 깨우게 할 것이다. 잠든 자를 깨울 것이다. 침묵했던 자들의 입을 열게 할 것이다. 머뭇 거렸던 자들의 걸음을 멈추게 할 것이다. 숨겨왔던 분노와 증오를 깨우게 했다. 민심의 양심을 깨우게 했다. 세상에 눈을 뜨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분을 깨우게 할 것이다. 거룩한 신이다. 

지상이 더욱 혼란해졌다. 거짓 예언자가 출현했다. 그 입에서 개구리와 같은 더러운 악령 셋이 뛰어나와 온 천하의 임금들에게 갔다. 

신은 지켜보고 있다. 이윽고 신의 옥좌 앞에서 최후의 심판이 시작될 것이다. 

이젠 더이상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신의 영역이다. 

그들은 그 눈보라가 쳤던 그 추운 겨울, 오직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을 외쳤다.

그들의 외침은 천심이 되었다. 천심은 하늘을 움직인다.

더 이상 슬퍼할 이유가 없다. 더 이상 분노할 여유가 없다.

이제 신에게 맡겨여 한다. 

그녀가 말한 진실, 그 역시 진실인지, 아닌지는 신이 판단 할 것이다. 

그녀를 단죄했던 그들 역시 과연 그들의 죄와 벌은 신의 영역이다.

신은 교만한 그들에게 이렇게 다시 묻는다. 

문재인, 박지원, 김무성, 유승민 그리고 그대들이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박근혜를 먼저 돌로 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