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미사와, 그리고 이왕표
굿바이 미사와, 그리고 이왕표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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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미사와 미츠하루
역도산, 김일-이왕표, 자이언트 바바-미사와

 14일 새벽 인천 을왕리에 있었습니다. 이날 12시 30분쯤 일본의 한 지인으로 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정상! 미사와 작고했습니다."  취기가 오른 상태라, 처음엔 누가 작고 했는지 못 알아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노아 대표 미사와!"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술이 '확' 깨더군요. 미사와 미츠하루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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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미사와 사망을 보도한 일본 신문 캡처

  미사와는 일본 프로레슬링 재건을 위해 온 몸을 불사르다 링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미사와는 13일 오후 8시45분께 히로시마시 중구 현립종합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레슬링 '노아 히로시마' 메인 이벤트를 하던 중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습니다. 
                                   
미사와의 추억

 미사와는 특별한 추억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2006년 3월초 박치기왕 김일, 후계자 이왕표 등과 함께 일본을 갔습니다. 당시 미사와가 대표로 있었던 '노아'도 방문했습니다. 그 때 미사와를 처음 만났습니다. 우직하고 무뚝뚝하게 보였던 미사와는 김일 선생님을 깍뜻한 예의로 맞이했습니다.  허리를 90도 숙이고 인사 하고, 김일 선생님 건강에 대해 묻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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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젼 김일(왼쪽)과 미사와의 모습. 두사람은 프로레슬링 발전을 위해 온 몸을 불사르다 지금은 고인이 됐다. 사진=이호형 기자 

미사와는 김일 선생님에게 노아 직원을 소개시켰고, 노아를 구경시켜 줬습니다. 미사와가 왜, 김일 선생님에게 깍뜻한 예의를 갖췄을까요. 프로레슬링 원로에 대한 예우라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미사와가 예의를 갖춘 것은 일본프로레슬러 정통성에 대한 대우라 생각됩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겠죠. 
 일본 역대 프로레슬러 중 최고 영웅은 1963년 12월 작고했던 역도산 입니다. 함경도 출신인 역도산은 조선인입니다.

참고로, 제 블로그 '역도산을 추모하며'를 읽어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맨 마지막에 그 글이 있습니다>

역도산과 세 명의 영웅   

역도산 다음으로 세명의 프로레슬링 영웅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오오키 긴타로로 불렸던 박치기왕  김일, 두번째가 요미우리 투수 출신 자이언트 바바, 그리고 안토니오 이노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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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일(가운데 벨트 찬 사람)이 자이언트 바바(왼쪽)와 안토니오 이노키(오른쪽) 등과 함께 우승 기념 건배를 하고 있다. 세 사람은 역도산 사후 일본 프로레슬링 영웅이었다.

그 다음 영웅 계보도 있지만 일본선 미사와 만한 영웅은 없었습니다. 미사와는 일본 프로레슬러 중 의리와 신의의 대명사였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1963년 12월 역도산 작고 후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는 역도산 정통성을 이어받은 전일본프로레슬링 단체와 이노키가 새롭게 만든 신일본프로레슬렁 단체로 양분됐습니다. 
 전일본프로레슬링 대표가 자이언트 바바였습니다. 현재 노아는 전일본프로레슬링 후신인 셈이죠. 말하자면 노아 미사와는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의 정통성을 이어온 인물 입니다. 한국에선 이왕표가 김일 선생의 후계자이듯, 일본에선 노아의 미사와가 자이언트바바 후계자로 불립니다.  미사와가 일본서 역도산 정통성과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면, 한국에선 이왕표가 역도산 정신과 정통성을 이어온 것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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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 프로레슬링을 상징하는 이왕표(왼쪽)와 미사와. 두 사람은 역도산 정신을 이어받아 프로레슬링 발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사진=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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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일이 자이언트 바바를 향해 몸을 날리며 박치기 하고 있다.

사진설명:이왕표는 김일의 후계자였고, 미사와는 자이언트 바바의 후계자로 불렸다. 사진은 김일이 온몸을 날려 자이언트 바바에게 박치기를 하고 있다. 


                   이왕표와 미사와

이왕표 레슬링 군단과 미사와 레슬링 군단이 매년 프로레슬링 교류를 하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미사와는 K1과 각종 격투기 등장으로 인해 일본서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점차 떨어졌지만 그는 한 눈 팔지 않았습니다. 오직 프로레슬링 한길만 걸었습니다. 이왕표도 마찬가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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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지난해 11월 밥샵을 꺽은 이왕표가 관중들을 항해 포효하듯 환호하고 있다.

그건 바로 역도산 정통성을 이어받은 정신 때문 입니다. 미사와는 일본 프로레슬링 영웅 안토니오 이노키가 각종 격투기 경기를 만들어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거부했습니다. 
  바로 노아에는 조선인 역도산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와 역도산이 무슨 관계냐고요..?
 '노아'에선 유명한 여성 프로모터가 있습니다. 이름은 레미 모모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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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역도산 친손녀 레미 모모타. 노아의 프로모터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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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역도산 둘째 아들 미치오 모모타, 친손녀 레미 모모타. 레미는 미치오 딸이 아니다. 레미 아버지는 역도산 첫째 아들이다. 첫째 아들은 사고로 사망했다. 사진=이호형 기자


 그녀는 역도산 친손녀  입니다. 그리고 역도산 둘째 아들 미치오 모모타가 노아의 부사장 입니다. 또 1958년 김일 선생의 첫 데뷔 상대였더던 조히구치가 노아의 고문입니다.
  
 
굿바이 미사와 

 미사와 사망은 한 일본 프로레슬러의 단순한 사망으로 해석하기가 곤란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미사와는 조선인 역도산의 프로레슬링 정신을 계승하고, 프로레슬링 부활을 온 몸을 불사르다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미사와는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도산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프로레슬링의 영광을 재현하겠다---" 이왕표도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도산과 김일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프로레슬링 의 영광을 재현하겠다---"  
     다시한번 미사와 명복을 빕니다.  굿바이 미사와!!!

      -다음은 지난해 역도산을 추모하며 올린 글-.
 12월15일은 무슨 날일까요. 결혼기념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만남, 그리고 생일과 추모일 등. 
 12월 15일이 기념일로 자리잡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닌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격투기를 좋아하는 올드팬들은 12월15일이라면 그 때 그 사건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마도 한국인 보다 일본인이 이 날을 더 기억하겠죠. 이날은 재일한국인 역도산이 일본 야쿠자 칼에 찔려 죽은 날 입니다.
 역도산은 1963년 12월8일 야쿠자 칼에 찔렸고, 일주일 뒤인 15일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일본에서 12월15일만 되면 역도산 추모일이라 해서 특집 방송이 편성되고, 언론도 이에 대한 보도를 잇따라 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역도산이 사망한 지 4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일본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가난과 전쟁의 폐허속의 일본에 희망을 안겨 주었던 사람이 바로 역도산이었습니다. 
 가라데 하나로 서구의 레슬러들을 때려 눕혔고, 역도산은 강인함 그 자체였습니다. 1950년대 일본. 무엇보다 국민의 단합과 강인함이 요구됐던 시절, 역도산 등장은 패배 주의에 젖었던 일본인들에게 "하면 된다"는 희망을 안겨줬습니다. 
 당시 일본 어린이들은 천황 이름은 몰라도 역도산 이름은 알았다는 사실만으로 역도산이 얼마나 일본서 유명했는지 알 수 있죠.
  저는 2005년 말, '박치기 왕' 김일 선생 살아 생전 그의 구술을 받아 <굿바이 김일>이란 책을 2006년 12월 출간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저술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김일 선생의 업적을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일 선생의 스승, 역도산의 영웅담도 전해들었고, 그의 생애와 업적도 재조명 했습니다. 
 저는 역도산에 대해 대충 알았던 시절, "역도산은 친일파였다"라는 사실을 각종 책과 언론 자료를 통해 알았습니다. 
 역도산이 친일파가 된 것은 간단한 이유 때문입니다. 역도산은 함남 출생입니다. 14세 때 전국씨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 역도산이 1939년 일본에 건너가 모모타[百田]로 개명하고, 1940년부터 역도산이라는 별명으로 스모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조선어(한국어)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가 그를 친일파로 묶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말 모르는 소리입니다. 역도산이 친일파다 아니다란 논의자체가 거북스럽지만, 역도산에 대해 광범위하게 취재를 하고, 증언을 들었던 결과 역도산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좀 무리한 해석이란 견해입니다. 
 역도산이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과 관련, 역도산이 건너간 곳은 일본입니다. 일본에서 일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가 친일파일까요. 만약 지금 일본으로 출장을 갔거나, 여행을 간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일본어를 모르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지 일본어를 배워, 그 쪽 구석 구석을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당시 역도산은 15세 때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지금 15세는 중학교 2학년생입니다. 그 어린 소년 역도산이 일본으로 건너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한번쯤 내 동생 형이다 생각하고 떠올려 보십시요. 
 그 일본 땅에서의 고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는 역도산의 대변인도 변명인도 아니지만, 그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38세에 야쿠자 칼에 찔려 숨을 거둔 조선인 역도산을 다시 한번 재평가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조선인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박치기 왕 김일 선생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재일한국인 여건부 선수와 고트네 선수도 있었고, 1958년 동경 아시안 게임때 한국 선수 스폰서도 자처했습니다. 그 뿐입니다. 한국 최초의 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를 후원했고, 재일 야구 영웅 장훈 선생도 후원했습니다. 역도산은 재일한국인들에게 꿈과 희망이었습니다. 
 역도산은 1963년 1월 한국에 와서 1964년 동경올림픽 지원도 약속했고, 한국의 체육발전을 위하여 서울에 스포츠센터의 건립도 약속습니다. 나아가 남북 통일을 위한 통일 전사가 자처했습니다. 
 국내서 개봉됐던 영화 <역도산>은 이런 역도산의 본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실존 영화가 픽션이 가미됐다고 하지만 이는 역도산을 매도한 영화입니다. 이미 개봉관에서 사라진 영화에 대해 뭐라 비판하기가 때늦은 감은 있지만 김일 선생은 살아 생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도산 영화를 만들었던 제작진들이 나를 한번도 찾아 온 적이 없다"라고 비난했습니다. 
 김일 선생만큼 역도산 선생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있을까요. 더욱 가관은 그 영화에서 김일 선생은 엔딩에서 나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역도산이 칼에 찔린 후 스승님이라며 울부짖는 한 컷 입니다. 실제 상황으로 돌아갈까요. 김일 선생은 당시 미국에 있었습니다. 
 미국서 세계프로레슬링 권좌에 올랐습니다. 또 그 영화를 보면 역도산은 완전 깡패같은 레슬러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런 역도산이 화장실 입구서 야쿠자와 시비가 붙었습니다. 역도산은 발을 한번 밟힌 이유로 야쿠자를 죽도록 패고 있습니다. 그런 장면을 보노라면, 저라도 생명 방어차원에서 어떤 물체로 역도산의 폭행을 뿌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건 기록을 보면 역도산은 야쿠자 조직원에게 무례하다며 빰 한대를 때렸습니다. 
 헌데 영화에선 역도산이 얼마나 잔혹하게 야쿠자 조직원을 폭행합니까. 또 역도산이 아내의 뺨을 때리는 장면도 있습니다. 일본선 제 아무리 역도산이라 해도 아내를 폭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역도산 아내 게이코 여사는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남편이었다고" 이 영화를 보면 감수자가 나옵니다. 그는 재일한국인이자 역도산 마지막 제자인 고트네 입니다. 
 그는 당장 한국으로 달려가 영화 관계자들을 혼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스승을 그렇게 엉터리로 묘사할 줄은 몰랐다고 혀를 찼습니다. 그는 "한국의 영웅 역도산을 한국인이 삼류 양아치로 만들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는 일본 사람들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일본인은 역도산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데 한국인들은 역도산을 삼류로 만들었느냐고요? 이런 질문 받으면 민망합니다.
  이렇듯 역도산은 상업주의와 이데올로기,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등이 결합되면서 그의 삶의 업적과 철학, 생애가 철저히 왜곡돼 있습니다.
 12월15일. 이제 4일 남았습니다. 저는 이날만은 니시마고메엔 혼몬지 (本門寺) 묘역에서 외롭게 잠들어 있는 역도산을 마음속으로나마, 추모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