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청송교도소에서 만났던 김태촌
10년전 청송교도소에서 만났던 김태촌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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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작고한 주먹계 대부 김태촌씨. 취재 수첩을 뒤적이다 보니 10년 전 청송교도소에 수감중이었던 김씨를 국내 언론 최초로 단독 인터뷰 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당시 청송교도소에는 김씨가 큰형님으로 모셨던 김두한 후계자 조일환씨(2009년 7월 작고)도 동행했습니다. 교도소에서 대면했던 김씨가 절규하듯 외쳤던 말이 기억납니다. “난 권력의 희생양이다”  그는 자신이 왜 권력의 희생양인지 소상히 밝히지 않고 눈을 감았습니다.

10년 전 청송교도소에서 김씨를 인터뷰 한 것 자체가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당시 김씨와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김태촌. 그는 조직폭력의 대명사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대한민국 최고의 깡패" "주먹계의 대부"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그가 이끌던 서방파는 양은이파·OB파와 더불어 지난 70∼80년대 한국의 대표적 폭력조직으로 암흑가를 주름잡았다.

특히 우리 사회의 굵직한 폭력사건에는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장 각목사건, 1990년 "김태촌 비망록"사건 등은 그가 저지른 대표적 사건이다.

이외에 권력층과의 유착관계를 드러낸 사건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는 90년 범죄와의 전쟁 당시 범죄조직결성 혐의로 구속돼 징역 15년과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고 14년째 복역 중이다.

그가 최근 아내 이영숙씨(54)에게 편지를 보내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하소연은 절규에 가깝다"고 전했다.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받은 후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그가 이제와서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뭘까. 김씨를 단독 면회했다.

 김씨와의 면회는 일반 재소자와 다른 면회실에서 이뤄졌다.

그가 청송교도소 특별관리대상 재소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3명의 교도관과 함께 접견실 창구 아크릴 창문 앞에 나타났다.

수감번호 11××이 새겨진 하늘색 줄무늬 수의를 입은 그는 단정해 보였다.

 그러나 얼굴은 수척해 보였다.

그는 지난 89년 폐암수술을 받았다.

말을 할 때마다 방음벽 구멍 사이로 불규칙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과거의 강렬한 눈빛은 볼 수 없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으레 건강에 관한 얘기가 먼저 나오기 마련이다.

그는 지난해 말 경북대병원으로부터 "폐암이 재발할 우려가 있고, 우울증 증세가 있는 만큼 입원 치료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그는 독방에 수감돼 있다.

한평 공간이다.

그곳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그는 "한평 공간이지만 내게는 우주요, 운동장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곳에 수감된 것과 관련, 재소자 인권침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곳에 수감돼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지난해 초 몸이 좋지 않아 청송에서 비교적 의료시설이 괜찮은 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그런데 그곳에서 "특혜" 수감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그해 10월 청송교도소로 재이감됐다.

그는 이 사건과 관련,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나 "정말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 나는 권력의 희생양이었다.

권력은 "주먹"을 철저히 이용했다.

그것을 이제는 모두 밝히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희생양으로 14년간 옥살이를 했으면, 살만큼 살았지 않았느냐"며 법의 선처를 호소했다.

 그는 "내가 지은 죄가 많은 탓에 아내도 암에 걸렸다"며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어떤 잘못을 뉘우쳤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에게서는 더 이상 조폭 두목의 날카로운 눈빛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자궁암에 걸린 아내를 하루만이라도 치료해 주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법조계 인사들은 그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면"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면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는 앞으로도 11년 더 교도소 바깥 구경을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