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원조', 강종헌 정체 [제2탄]
'이석기 원조', 강종헌 정체 [제2탄]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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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헌 자서전 통해 정체 드러내

 『사형대에서 교단으로-내가 체험한 한국 현대사』저자는 강종헌씨다.

 자서저전 성격인 이 책에는 혁명가적 강씨의 오류와 한계,  교만한 ‘혁명가’들이 어떻게 거짓말과 억지를 부리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혁명을 꿈꾸며 모국유학 길에 오르면서 정체를 감추려고 시작한 거짓말이, 시간이 흐르면서 더 큰 거짓말로 발전되고 얽히게 되니 앞뒤가 맞을 리가 없다. 

 이 책에 대한 주변의 비판에 대해 강씨는 부인하지만 그의 책은 그의 정체를 짐작하기엔 충분하다.

 강씨는 1951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서울대학 의학부에 들어가 모국유학하고, 그 재학 중에 국가보안법 위반 즉 북쪽 스파이 혐의로 구속되어 1977년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정변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1988년 가석방될 때까지 13년 간, 수감 생활을 했다.

그의 저서전은 말그대로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오사카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 정치를 공부해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될 때까지 개인의 자서전이지만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고 대한민국을 부정했다.

이 책에 따르면, 1988년 12월 21일 대구교도소에서 가석방된 강종헌은 교도소 정문을 나서는 순간 통일운동 임무를 재개한다.

이 책은 강씨의 모순과 좌파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

자서전이다.

 한국에서의 통일운동 투쟁의 흐름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집어넣어 자서전으로 만들었다. 

강씨는 석방 나흘 후인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엔 박형규 목사가 주도하는 거리 예배에 참가했다.

 예배의 마지막에 강 씨가 작사·작곡한 ‘그날이 온다’를 모두가 함께 불렀다(자서전 123쪽). 1989년 문익환 목사 집에도 식사 초대를 받았다. 

이 책에 따르면 강씨는 한국의 민중운동이 1989년에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정리한다.

 즉, 1980년대 후반부터 ‘민족민주운동’이라는 용어가 정착했는데, 이는 통일운동과 對美(대미)관계 등 민족문제를 향한 지향성이 강해졌음을 반영한다고 총괄하고 있다(同 124쪽). 

 강 씨는 1989년 1월21일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결성대회에도 참석한다.

자신을 ‘在日(재일)한국인정치범’으로 규정한 강 씨는 1989년 4월4일 일본으로 귀환하자마자 휴식과 적응 시간도 마다하고, 일주일 만에 일본 전국을 돌며 ‘한국 내 정치범 석방운동’을 시작한다.

강 씨는 밀입북 후 동경에 체재 중이던 문익환 목사를 만났고, 문 목사가 귀국 후 수감된 뒤엔 문익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는 광범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1989년 여름부터 과로로 쉬고 있던 강 씨는 10월에 在日한국인 3세 여인을 알게 되어 1990년 5월3일 京都(교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강씨는 1989년 11월22일 오사카市 키타구(北區)에 있는 작은 빌딩에 ‘한국문제연구소’를 열었다. 11월22일에 연구소를 개소한 것은 1975년 학원침투간첩단사건 발표가 11월22일이었던 것을 상기하여 정했다고 한다. 

 강씨는 歸日(귀일) 후에 알게 된 조총련 청년 십수 명이 축하해주었고 “교육의 권리를 비롯해서 在日조선인의 민족적 諸(제) 권리를 획득하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同 134쪽)라고 한 것을 보면, 그를 도와준 새로운 친구들이 거의 조총련임을 짐작할 수 있다.  

1991년 4월에는 연구소 기관지 <한국의 소리>를 창간한다. 매 호마다 ‘민족단체 청년들’과 일본 친구들이 기고해주었다고 하는 등, 자서전을 보면 그가 歸日 후에 그를 전폭 지원한 것은 대부분 反국가단체인 조총련과 한통련이었음을 할 수 있다.

강 씨는 1991년 봄부터 범민련 해외본부 공동사무국 사무처장이 됐다고 간단히 적고 있다(同 140쪽). 

강 씨가 어떤 경위로 해외본부 공동사무국 차장이 되었는지, 교토에 사는 그가 어떻게 동경에 있는 사무국 일을 볼 수 있었는지, 당시에 직속 상관은 누구며 동료는 누구였는지, 범민련 북측본부, 남측본부, 여타 해외 지역과는 어떻게 연락을 취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설명이 없다.  

 그가 해외본부 공동사무국 차장으로서 첫 번째로 관계한 사업이었을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1991년 4월, 일본 치바현 마쿠하리 개최).

그는 남북한이 ‘통일팀’을 파견했다고 기술(同 141쪽)한다. 

강씨는 동구와 소련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북방외교로 인해 “외교적 위기상황에 직면한” 평양 측이 남쪽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 내어 놓은 민족공조 전술을 외치기 시작하는 일로 범민련 해외본부 공동사무국 차장으로서의 평양 측 대변인 역할을 시작한다.

“한국의 통일운동단체가 특히 남북의 평화공존과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조선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베트남 식 무력통일이든, 독일 식 흡수통일이든 체제 타도를 통한 통일 추구는 그 과정에서 심대한 피해를 쌍방에 초래합니다. 조선반도에서 한 쪽이 다른 쪽의 체제를 부정하고 그 제압을 기도하면 반드시 군사충돌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확대됩니다. 그것은 과거 동족 전쟁을 체험했던 조선 민족이 배운 피(血)의 교훈입니다. 연방제는 ‘통일’의 논리이기보다 ‘공존’의 논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북 간의 격차가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압도적인 격차가 발생하고 말았기 때문에 두 체제의 장기적인 공존을 보장함으로써 상호의 불안을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동 142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