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역도산 칼로 찌른 야쿠자 공개
[단독]역도산 칼로 찌른 야쿠자 공개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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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4월 병사, 살아생전 필자의 전화를 받더니---

 역도산을 칼로 찌른 무라타. 60대 후반때의 모습

1963년 12월8일 일본 도쿄 아카사카 뉴라틴쿼터 나이트클럽.

건장한 체구의 한 남자가 화장실 입구에서 야쿠자 조직원과 시비가 붙었다.

그 남자는 야쿠자 조직원이 건방지다며 뺨을 한대 때렸다.

그러자 야쿠자 조직원은 숨겨놓은 칼로 그 남자의 복부에 칼을 꽂았다.

피로 범벅이 된 배를 움켜쥔 채 쓰러진 남자.

그가 바로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역도산(力道山)’이다.

이날 칼에 찔린 역도산은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12월15일 역도산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당시 역도산을 칼로 찌른 야쿠자 조직원은 야마구치조(山口組)와 함께 당시 일본 밤의 무대를 주름잡았던 스미요시가이(住吉會) 소속의 스물네 살 무라타 가쓰시(村田勝志)였다.

그는 역도산을 칼로 찔러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인물이다.

그는 일주일 뒤인 12월 15일 역도산이 사망하자 살해 혐의로 기소돼 7년형을 선고받고 1970년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에 보도된 24세때의 무라타

한국에서 만든 영화 ‘역도산’ 장면을 보면 역도산이 심한 폭행을 하자 무라타가 방어 차원에서 역도산을 칼로 찌른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러나 일본 수사 자료와 당시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역도산은 뺨을 한대 때렸고, 그는 얼굴에 약간의 멍만 들었을 뿐이었다.

때문에 영화장면처럼 역도산이 심한 폭행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야쿠자 논리를 그대로 재현시켜 일본내에서도 논란이 많았었다.

1970년 석방 이후 무라타는 일본 동경 롯번기에서 야쿠자 조직 무라타구미 오야붕(두목)으로 건재를 과시했다.

‘무라타구미’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조직명이다.

일본 야쿠자 조직 야마구찌와 함께 하는 스미요시가이의 한 분파다.

야쿠자 조직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아마도 역도산을 칼로 찌른 후 자신의 이름을 딴 조직을 만들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그런 무라타가 지난 4월 사망했다.

일본 경시청에 따르면 스미요시구미계의 무라타 마사시(74)가 병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직접적인 사인은 당뇨로 인한 합병증인 것으로 전해진다.

필자는 2006년 5월 무라타 살아생전 통화를 했었다.

그는 필자에게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가. 누가 가르쳐줬는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안 것에 대해 놀라워 했다.

필자는 무라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역도산을 왜 칼로 찔렀는가”

그는 “난 할말이 없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왜 할말이 없는가. 이제라도 한마디만 해달라”고 되물었다.

그는 "할말이 없다. 전화를 끊겠다"면서 끊어버렸다.

필자는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부하가 받았다.

“무라타 오야봉을 만나고 싶다. 거기가 어딘가 찾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한 후 “무라타상은 누구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필자가 끈질긴 취재를 하자 일본 야쿠자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한 인사는 “정상(필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여기서 취재를 멈추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무라타 조직원이 해코지 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당시 필자는 무라타 조직원의 취재 보복등이 두려웠다면 그에게 전화를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날 필자는 아카사카 한 야쿠자 조직원에게 무라타의 거처를 알려줄것을 부탁했지만 그는 "큰 일 당할 수 있다"며 취재를 그만 하라고 했었다.

무라타 취재는 여기까지였다.

그렇다면 무라타는 왜 역도산을 찔렀는가.

 

사진은 특정 기사와 관련없음

이를 알기 위해선 당시 일본 야쿠자 조직간의 관계를 짐작해야 한다.

1960년대 초 일본 동경 밤의 무대는 스미요시가이가 지배했다.

여기에 동경 긴자에서 조선인으로 주축된 활동했던 '동성회'(東聲會)도 있었다.

동성회 두목은 도쿄 밤의 경찰서장으로 불린 마치이 하시유키 정건영(일본명 町井久之 아래 사진)이었다.

동성회는 조선인으로 주축된 야쿠자였던 관계로 당시 도쿄 야쿠자 사회에서는 이단자로 취급받았다.

 

역도산은 이 동성회 두목 정건영과 의형제처럼 지냈다.

정건영은 역도산과 출생년도(1924년)가 같았다.

역도산은 레슬링 흥행 차원에서 이들과 매우 절친했고,

정건영은 역도산의 스폰서 역할을 해줬다.

당시 무라타 칼에 찔리자 역도산은 가장 먼저 정건영에게 전화를 걸어 “스미요시 조직원이 나를 칼로 찔렀다”며 피격 사실을 전했다.

무라타가 역도산을 칼로 찌른 것은 우발적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온다.

이는 당시 야마구치와 스미요시 야쿠자간의 세력 싸움에 알 수 있다.

1960년대 초 야마구치는 도쿄에 진입하지 못했다.

오사카를 근거로 활동한 조직이었다.

야마구치가 동경 진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동성회의 도움이었다.

동성회는 당시 야마구치와 의형제 결연식을 가졌을 정도로 막연했다.

야마구치가 동성회간의 결연식이 가능했던 것은 야마구치의 핵심들도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그 핵심의 인물이 바로 역도산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스미요시는 바로 그 핵심을 제거하기 위해 무라타에게 역도산 살해지시를 내렸지 않았냐는 시각도 있다.

무라타의 당시 직책은 일본 흥행 업무, 즉 조직을 알리는 임무였다.

스미요시가이는 동성회와 대립각을 세웠던 최고의 라이벌 조직이었다.

역도산은 스미요시가이 나와바리(구역)인 아카사카에서 사고를 당했다.

단순한 사고였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무라타는 경찰 조사에서 “절대 죽일 생각은 없었다. 사소한 시비가 붙어 찔렀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역도산을 찌른 후 달아났고, 뒤쫓아 온 동성회 부두목 노쿠치까지 칼로 찔렀다.

역도산이 사망하면서 동성회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스미요시가이가 동경 최고의 조직으로 급부상했다.

또 동성회와 스미요시간의 대전쟁을 멈추도록 중재한 야마구치도 큰 선물을 받았다. 바로 스미요시가이의 묵인 하에 동경 입성에 성공한 것이다.

역도산 죽음이 우발적이 아니라 야쿠자간 세력 다툼으로 인해 의도됐다는 냄새를 풍기는 대목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