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정신을 가장한 ‘좀비’들에게
518 정신을 가장한 ‘좀비’들에게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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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학생들이여, 경찰이 곧 진입합니다. 모두 전투 태세에 돌입합시다.”

1987년 4월 말 부산의 한 대학에서 광주 학살 진상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틀자 경찰이 이를 차단 하기 위해 전경과 백골단을 투입했을 때 한 장면이다.

518이 다가올 때 마다 광주의 추억이 새록 새록 떠올려진다. 80년대 5월 대학가는 하루도 최루탄 냄새를 맡지 않고선 캠퍼스를 거닐 수 없었다. 학교 정문앞에는 늘 전경과 백골단이 상주해 있었다.

학생회관 앞에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회가 열렸다. 집회 때 마다 어김없이 틀어졌고, 불렀던 노래가 최근 ‘제창’과 ‘합창’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학생들의 집회가 끝나면 학교 정문 앞으로 몰려갔다. 교문 앞은 학생과 경찰의 ‘대치선’이었다. 돌, 화염병, 최루탄, 지랄탄----쫓고 도망가고, 여기저기선 비명소리가 들렸다.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에게 이런 장면은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어 5월18일이 다가오면 전국의 대학생들은 그 전날 17일 광주로 집결한다. 광주는 거대한 집회장이 되었다.

그 집회장 광주에선 경찰과 학생간의 충돌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80년 발생한 광주민주화 항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광주에선 광주 항쟁이 진행 중이었다.

518 집회가 끝나면 학생들과 민주 단체 동지들은 518 묘역을 참배했다. 이 참배도 쉽지 않았다. 경찰은 이 참배도 저지했다. 학생들은 이 저지선을 뚫고 참배를 강행했다. 마찬가지 518 묘역 부근에서도 학생과 경찰의 대립으로 인해 희생자가 발생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경험한 80년 5월의 추억이다. 지금 생각하면 추억이지만, 80년대에는 참혹한 지옥 같은 현장이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은 왜 학업을 포기하면서까지 광주로 갔을까. 또 강의실 대신 차가운 아스팔트에 앉아서 집회에 참석했을까.

80년대 암울했던 독재정권은 희망과 꿈을 잃게 했다.그 희망이 보이지 않아 투신 자살을 했다. 경찰에 검거되어 개돼지 같이 끌려갔다. 감방은 청춘을 병들게 했다. 그래서 첫째도 독재 타도, 둘째도 독재타도, 셋째도 독재 타도를 외쳤다.  그 대가로 청춘을 바쳐야 했다. 보상 따위도 없었다.  오직 하나, 민주주의를 위해서였다.

17일 정치인은 물론 많은 인사들이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광주로 모이고 있다. 나는 오늘 TV를 통해 많은 광주묘역에 참배하는 정치인 모습을 지켜보았다. 518 묘역에 가서 고개 숙이고 방명록에 글만 적으면 518 정신이 살아난다 말인가.

이들 중 80년대 518 묘역에 참배한 정치인이 몇명 쯤 될까? 나는 특정 정치인을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17일 안철수 국민의 당 공동대표가 518 묘역을 참배하는 모습을 보았다. 안 대표가 80년대 5월 최루탄에 뒤덮여, 눈물로 뒤범벅 된 아비규환 같은 광주를 가보았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또 80년대를 외면했던 자들이 어느날 ‘광주의 정신’이니 ‘민주’가 어떻고 떠드는 그 모습을 보니 속이 비틀어진다.

시퍼런 독재정권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숨죽였던 자들, 도서관에 틀어박혔던 자들, 혹은 부모 잘 만나 유학 갔던 자들. 이들이 민주화가 되니 '좀비'처럼 되살아나서 ‘광주 정신’ 이니 ‘518 정신’이니 지럴들 한다.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관련, 정부는 당연히 제창을 허용 해줘야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 그 곡은 518 아픔에서 나온 곡이다. 518이 없었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오지 않았다.

광주민주화운동기념식에서만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어야 한다. 문제는 ‘애국가’는 거부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만 부르겠다고 고집하는 골빈 놈들에게 당부한다.

애국가도 제창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