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묻지마식 범죄 대응법
강남역 묻지마식 범죄 대응법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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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말 쯤으로 기억난다. 한 50대 초반 남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했다. 정 기자님을 꼭 뵙고 싶습니다.”

3일 뒤 그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왜 15년형을 살았는지 이유와 억울한 심경 등을 토로했다.

오갈 데가 없다고 밝힌 그는 ‘대전교도소’가 자신의 주소지라면서 알려주었다. 그의 기분은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차분하게 말하다가도 복수를 해야겠다는등 눈빛이 남달랐다. 그는 나에게 “진심으로 대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10여 일이 지났을까. 대전 중부경찰서 형사라고 밝힌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사람을 죽이고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 핸드폰에 나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경찰은 “그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며 전화를 건 것이었다.

10년이 지난 이 사건이 새삼 생각나는 것은 최근 전 국민에게 충격을 던진 강남역 묻지마 살해사건 때문이다.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서울 강남역 화장실 살해 사건에 대한 사회적 반향이 폭발적이다.

사건 현장 주변인 강남역에는 임시분향소가 설치됐고, 추모객들이 바친 국화꽃이 무릎을 덮을 만큼 쌓였다.

강남역 외벽에는 피해자의 죽음을 추모하고 여성 차별 사회를 고발하는 내용의 쪽지 수천장이 빼곡하게 나붙었다.

언론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떠들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런 비슷한 사건을 많이 접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을 저지르는 자는 대부분 또라이 즉, 정신분열증상을 앓았거나, 분노충동 장애가 있는 자들이다. 이번에 강남역에서 묻지마 살해를 했던 자도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이런 자들이 여성에 대한 혐오와 피해망상을 보이면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 이와 유사한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출처=구글이미지

분노를 억제 못해, 욱해서 저지르는 범죄인 충동분노에 의한 범죄가 극에 달하고 있다.

이런 사건이 늘어나는 것은 비정상 사회와 무관치 않다. ‘갑’질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을’의 분노가 클 수 밖에 없다.

계층 간의 갈등, 극심한 차별, 부당함의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이 때로는 사회에 대한 무차별적인 증오를 표출한다.

우리 사회는 너그러움이 사라졌다. 차가운 냉정함이 지배한다. 관용과 너그러움이 실종됐다. 이에 따른 스트레스가 분노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하다. 지나친 경쟁시스템은 ‘너죽고 나 산다’는 식이다. 회사에서 학교에서도 그렇다. ‘금수저’에 분노하고 ‘흙수저’는 절망 뿐이다.

강남역에서 발생한 여성 살해사건은 범인이 정신병력이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분노 충동 범죄와 연관성 있어 보인다. 사회에서 소외된 개인적 스트레스가 대개 범행동기로 작용됐다.

따지고 보면 ‘묻지마 범죄’도 70% 정도는 분노상태에서 저질러진다. 문제는 이런 범죄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국가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책을 내놓아야 하지만 사실 국가가 무슨 뚜렷한 대책이 있을까. 분노충동자들, 정신분열증 자들은 겉으론 멀쩡하다. 멀쩡한 이들이 순식간에 범죄를 저지른다. 대비 할 겨를이 없다.

만약 이들이 총기라도 갖고 있으면 난사 했을 게다. 미국에서 안 태어난 걸 천만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이런 범죄의 예방과 대비는 이제부터 ‘내 생명은 내가 지킨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의 중요한 역할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라면 국가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세월호’에서 이 교훈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럼 내가 나를 어떻게 지켜주어야 할까. 국민적 협조가 필요하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듯, 전 국민이 몽둥이를 들고 미친 개가 날뛰면 협치하면서 후들겨 팰 수밖에 없다.

이보다 더한 대비가 있다면 ‘댓글’로 제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