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가 던진 역사의 역설
영화 덕혜옹주가 던진 역사의 역설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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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가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이 영화에선 덕혜옹주와 관련해 워낙 왜곡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나는 사실 흥행에 약간 걱정을 했다. 

그런데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영화는 영화로만 본다’는 관객들의 일상적 영화 이론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이 영화에 대한 역사왜곡 논란이 일자 나도 줄 곧 "이 영화가 덕혜옹주를 미화했든, 왜곡시켰든 영화는 영화만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영화는 다큐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시각에선 덕혜옹주와 관련해 잘못 알려졌거나 오도된 부분들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본다. 덕혜옹주와 관련해서 오도되거나 확대 해석된 부분은 한도 끝도 없이 많다. 그래서 나의 생각은 고종, 영친왕, 이구, 덕혜옹주로까지 튀었다.

나는 이런 생뚱맞은 생각을 해 본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 고종<아래사진>에 관한 거다. 고종이 덕혜옹주를 낳았을 때 언론과 역사 자료에는 이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1912년 5월 25일, 경운궁에 아기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라를 잃은 음울한 기운이 경운궁에 깔려있을 때, 60세인 고종의 고명딸이 태어난 것이다. 고종이 할 일 없이 이 궁녀 저 궁녀를 보아오다가 키크고 얼굴 이쁜 양귀인을 만나 낳은 아기였다. 나라를 잃어버린 군주로서의 죄책감과 텅빈 궁궐에서 아무 할 일도 없던 폐위군주 고종에게 덕혜옹주의 탄생은 삶의 근거요 희망이었다. 그것은 만백성의 꿈이었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해는 1912년.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것은 1910년. 나라 잃은 비통함에 전 백성이 비분강개 하고 있을 때 고종이 덕수궁에서 궁녀 계집질, 혹은 자손 번손짓거리를 했다는 방증이다. 그것도 당시 고종의 나이 60때다. 

나는 인간이 나이 60에 애를 낳든, 소를 낳든 상관안한다. 그러나 고종이 누구인가. 조선을 일본에 빼앗긴 군주였다. 그런데도 고종은 궁녀를 상대로 짓거리를 했었다. 대단한 정력가 고종이다. 

또 고종의 아들 영친왕(1897년 - 1970년 5월 1일)이다. 네어버 지식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1907년 형인 순종이 즉위한 뒤에 황태자가 되었고, 1926년 순종이 죽은 뒤에는 이왕의 지위를 계승했다.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족인 마사코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며, 일본 왕족으로 대우를 받으며 일본군 장성을 지냈다.'

<아래 사진>

나는 영친왕이야 말로 대단한 일본 제국주의에 복종한 인물로 본다.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하여 1940년 육군 중장이 되었다. 1943년 일본의 제1항공군(第1航空軍)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복무하다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에 예편되었다. 

일본 제1항공군 부대는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부대다. 영친왕은 그 부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일제에 순응하는 무기력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영친왕의 한국으로의 귀환은 반대에 부닥쳐 실현되지 않았다. 

좋다. 이 역시 일제 강점기 때라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 다음 영친왕의 뒤를 이구씨(1931년 12월 29일 - 2005년 7월 16일)다. 이 씨는 대한제국의 황태손(皇太孫)이다. 

이제부터는 이씨를 취재했었던 2001년 2월~2004면 3월까지 나의 X파일이다. 나는 2001년 2월말 의친왕 아들 이석 (75) 황실보존국민연합회 회장과 함께 일본에 갔었다. 

          일본 일왕궁 앞에서 한일병합 무효 시위를 벌이는 이석씨(왼쪽 두번째)

당시 일본의 역사왜곡이 국가적 문제가 되었을 때 이석 씨는 한일병합 무효 선언을 위해 일본으로 갔었다. <위 사진>

나는 당시 일본서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영친왕 이들 이구씨가 일본 동경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즉시 확인했다. 그가 일본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 살았다.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자리는 원래 일제가 영친왕 일가에 내준 저택이었다. 이구도 이곳에서 출생했다. 동경의 가장 중심부 요지인 아카사카의 2만평 대지위에 서 있는 영국풍의 건평 500평의 3층짜리 저택은 영친왕 이은이 살았던 곳이었다.

덕혜옹주도 일본인 대마도 번주와 1931년 결혼하기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나는 2006년 12월 이곳에서 일본에서 발간한 책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누구보다 이 호텔을 잘 알고 있다.<아래 사진>

 

 

당시 나는 그곳에서 이구<아래 사진>와 맞딱뜨렸다. 그를 기습 인터뷰 했다. 그런데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구씨는 한국어를 몰랐다. 일본에서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조선의 왕세손인 그가 한국어를 몰랐다는 것은 치욕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후 나는 그가 한국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2004년 2월 26일 오후 그가 김포공항을 통해 극비 귀국했다. 당시 이씨는 아시아나항공 1035편으로 일본인 동행과 함께 3년 만에 귀국했다. 

나는 그때 김포공항으로 달려가서 출입국장을 나온 후 그에게 접근 인터뷰를 시도했다. 한국어를 모르는 그가 내가 무슨 질문을 하는 지 알 지 못했다. 그는 이씨 종친회 회의에 참석키 위해 한국을 방문한 거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는 일본인 무속인과 한국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종묘제례때와 아버지 영친왕 할아버지 고종 황제 제례 때 일본인 무속인들을 데리고 행사에 참석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제 덕혜옹주로 넘어오자. 영화 ‘덕혜옹주’는 역사왜곡 논란 속에 개봉 7일 만인 9일 200만 관객수를 돌파했다. 기쁜 일이다. 나는 영화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덕혜는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가령, 도쿄부립 마쓰사와(松澤) 정신병동에 덕혜옹주가 강제 입원되었다니, 그녀의 삶 전부가 기구하다는 것에는 절대 동의를 못한다.

덕혜옹주. 그 덕혜옹주가 입원해 있던 도쿄 마쓰사와 정신병원은 100년 넘은 일본 최고 정신 요양 병원이다. 우리는 '덕혜옹주 정신병원 강제입원'이라는 그 자극적 문구에 집착함으로서 일제가 덕혜의 삶까지 그렇게 말살했다느니 확대 오인하는 데 이거야말로 '덕혜 왜곡'이다. 

나는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더 적을까 하다가 여기서 멈출까 한다. 그 역시 기구한 삶을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그에 대해 이런 저런 것을 들추어 낸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라 잃은 조선 황실 옹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삶이 미화된 덕혜옹주. 그러나 덕혜옹주가 삶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팔자를 소유자라 해도 그녀 삶 궤적 하나 하나는 '친일'이었다. 

영친왕과 그의 아들 이구도 마찬가지다. 왜 우리는 그들에 대한 평가를 올바로 하지 못하는가. 

이들이 광복후 한국으로 귀국하려는 데 이승만 정권이 이들의 귀국을 막았다는 데서 할말을 잃는다. 

당시 국민들은 일본 국적을 소지한 이들의 귀국을 막았다.  너무나 친일을 했던 이들이 자칫 한국으로 들어올 경우 신변 위협과 국가 기반이 흔들릴 수 있었다는 게 당시 이승만 정권의 판단이었다. 

나는 감히 말한다. 조선에서 태어난 영친왕 덕혜옹주는 친일파였다. 그리고 영친왕 아들 이구는 뼈속까지 친일이었다. 한국어 조차 몰랐다. 

그런 이들이 조선의 마지막 '적통'이다. 그런 무기력한 사고로 똘똘 뭉친 조선왕족들이었으니 어찌 조선이 일본놈들에게 안넘어갔겠는가. 

그러니 지금까지도 일본놈들이 한국인을 깔보고 있지 않는가. 일본놈들이 외치는 독도는 일본땅, 역사왜곡 등. 그들의 그 역설은 이 근거를 만들어 준 왕족들의 치욕적인 연장선상이다. 영화 덕혜옹주를 영화로만 보아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 덕혜옹주는 역사의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