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기왕 김일 생가를 가다
박치기왕 김일 생가를 가다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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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 TV가 등장한 60년대.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 국민들의 상처를 씻어주는 '영웅'이 있었습니다. 
  전설적인 '박치기 왕' 고 김일 선생 입니다. 반칙을 일삼는 일본의 야비한 레슬러들이나 자이언트 바바와 같은 거구들을 주특기인 박치기로 쓰러뜨리는 장면이 흐릿한 흑백화면에 나오면 모든 국민들은 통쾌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에게 숱한 감동을 안겨줬던 김일 선생은 2006년 10월 26일 작고했습니다. 현재 김일 선생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에 영면해 있습니다. 

 생가를 가다

지난 8일 김일씨 생가를 다녀왔습니다. 김일 선생 후계자 이왕표 등 레슬링 관계자들과 함께 갔습니다. 묘도 찾았습니다. 김일 선생 생가와 묘를 간 것은 오는 26일이 3주기인데다, 전남 고흥군 어전리에 김일 선생을 추모하는 체육관이 건립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전남 고흥군은 지난달 24일 김 선생의 고향인 금산면 어전리에서 김일 기념체육관 건립 기공식을 열었습니다. 국비 등 40억 원이 투입되는 이 체육관은 건축 연면적 2200m²(약 660평) 규모로 전시관 기능도 갖추고 있습니다.
 체육관 안에 설치되는 기념관에는 김 선생이 생전 경기 때 입었던 옷과 챔피언 벨트, 우승컵, 경기 사진 등이 전시됩니다. 생전 경기 모습 등을 보여주는 영상관도 마련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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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표 초대 못받아

문제는 이런 뜻깊은 기공식에 후계자 이왕표는 물론 프로레슬링 제자 등 한명도 초대 받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김일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김일 선생 자서전을 냈습니다. 제목은 '굿바이 김일' 입니다. 그 자서전 발간을 위해 거의 1년 동안 김일 선생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생가도 3번 갔다 왔습니다. 그 책은 김일 선생 작고 후 한달 만에 발간됐습니다. 일본서도 출판 됐습니다. 일본서 가장 큰 고단샤 출판사에서 발간했습니다. 2006년 12월 일본서 출판기념회도 개최했습니다. 김일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저도 기공식에 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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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 선생 추억
 
지난 8일 김일 선생 생가를 향하면서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주마등 처럼 스쳤습니다.  2006년 2월 김일 선생을 승용차에 태운 후 전남 순천시내를 가로지른 후 벌교를 지나 고흥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초행일수밖에 없었던 저는 길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런 것을 짐작했었는지, 김일 선생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조그만 가면 벌교 상고 앞입니다. 저기서 좌회전을 잘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네비케이션 노릇까지 했습니다. 
 승용차가 고흥군에 진입하자 "과거 비포장 도로라 고흥 터미널에서 집까지 가면 버스가 하도 쿵딱 쿵딱 뛰어 마치 탱크를 타고 고향에 가는 기분이었다"며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김일 씨의 가이드를 받으며 부산을 출발한 지 5시만인 오후 6시 마침내 고향인 고흥군 녹도항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거금도였습니다.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20분 가량 들어가야 했습니다. 배 시간에 맞춰 한 장어구이 식당에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녁 8시 배를 타고 생가가 있는 거금도에 도착했습니다. 언제 다시 올 지 알 수 없는 고향집에 다다르자 감정이 복받치는 듯 얼굴에선 무상함이 묻어났습니다. 생가에는 50여장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사진만이 지난 시절 화려했던 김일 선생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벽에 걸려 있는 역도산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제 나도 얼마 안있으면 저 분 곁으로 가겠지"라며 역도산을 너무 그리워 했습니다. 그는 고향 산을 바라보며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듯' 레슬링을 하면서 남긴 모든 것은 사회로 되돌려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국민이 있었기에 김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속의 김일로 남고 싶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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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땅 묘

특히 김일 선생은 죽어도 고향땅에는 묻히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김일 선생은 고향땅에 묻혔습니다.  서울서 그 고향은 너무나 멀었습니다. 8일 오전 5시 서울을 출발했습니다. 고흥에는 11시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생가까지 1시간 더 소요됐습니다. 국민 영웅 김일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렇게 멀었습니다. 일반인들이 큰 마음먹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이 김일 선생 생가와 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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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 선생 묘를 둘러본 후 그 뒤 생가 기념관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 생가 기념관에서 김일 선생과 주고받았던 대화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김일 선생의 사진과 유품이 있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보지 못했습니다. 철문이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고흥군 관계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지난 3년간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 어이없었습니다. 누가 열쇠를 관리하는 지 물었습니다.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3년전 김일 선생과 생가를 방문했을 때 김일 선생이 소장중인 많은 기념품과 사진들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엉망이었습니다. 집안에는 매캐한 냄새와 사진에는 곰팡이 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함께 간 이호형 기자와 함께 큰 맘 먹고 사진 정리와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후 지금까지 생가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고흥군 관계자에게 부탁합니다. 김일 선생 기념관 건립도 중요하지만 현재 있는 기념관이라도 제대로 관리해달라고. 헌데 고흥군 관계자는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라며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그 기념관은 가족 명의로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허락 받지 않고 문을 열수 없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지 궁금했습니다. 김일 선생이 살아 생전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금산면 사무소에서 등기부대장을 확인해 봤습니다. 소유자 김일, 김해 김씨 종친이었습니다. 생가는 종친 소유라는 김일 선생 말이 맞았습니다. 
 10월26일 3주기 입니다.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