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선배 기자의 눈물
일본 선배 기자의 눈물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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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저녁 36년 축하주에 취했습니다. 웬 36년 축하주냐고요?  한 일본 선배 기자가 36년만에 무죄를 받아서 무죄 축하주를 마셨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는 일본 외신 기자 등 1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시작한 술자리가 광화문 사거리 대폿집, 그리고 겨울이란 카페로까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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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는 다치가와 기자와 눈물 흘리는 다치가와 기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위해 36년 전인 1974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과 종교인 등이 민주화와 인권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나 시위, 유인물 배포 등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자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했습니다. 학생들이 수업거부 등의 집단 행동을 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민청학련'이라는 단체가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반체제 운동을 한 정황을 포착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일로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발동시킨 뒤 1000명이 넘는 위반자를 조사, 180여명을 구속·기소했습니다. 
 왜 느닺없이 민청학련 얘기냐면요. 어제 술을 마셨던 분이 이 사건에 연루돼 한국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일본 니칸 겐다이 다치가와 기자였습니다. 그가 36년 전 한국 서대문구치소와 안양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다음은 제가 적었던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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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받고 있는 민청학련 가담자들.

"민청학련 사건은 처음부터 ‘조작’이라고 믿었기에 재심에서도 무죄 판결을 예상했습니다." 
1974년 4월 발생했던 민청학련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에 연루돼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10개월간의 옥살이를 한 일본 니칸겐다이(日刊現代) 다치가와 마사키 외신부장(63). 서울중앙지법 형사 22부는 27일 이 사건 관련,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자 다치가와 부장은 "이제야 진실이 밝혀진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재판 후 일간스포츠 기자와 만난 다치가와 부장은 “무죄 판결이 나서 개인적으로도 기분이 좋지만, 국가의 잘못을 국가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36년 전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중정)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후 내란음모죄,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당시 서울대생이었던 이철 전 철도공사 사장, 유인태 전 국회의원 등을 잇따라 인터뷰 한 것이 빌미가 됐다. 1974년 3월 말 자신이 묵고 있는 서울 삼각지의 여관방에서 유인태(전 국회의원·당시 서울대생)씨를 인터뷰했다. 당시 유씨가 “너무 힘들다. 돈도 없고, 라면만 먹고 산다”는 말에, 불고기라도 한번 사 먹으라며 건넨 1만2000원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 외신기자들은 인터뷰 할 때 취재원에게 일종의 사례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일로 4월5일 그는 경찰에 연행됐다. 그후 5일 뒤 남산 중앙정보부로 옮겨져 조사를 받았다. 당시 중정은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를 전복하려 한 반정부 세력”이라며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했을 때 문제의 1만2000원이 ‘북한에서 받아 전달한 좌익 지원자금’으로 규정했다. 중정은 다치가와 부장이 “재일 조총련 비밀 조직원의 조종을 받는 일본 공산당원으로, 민청학련의 배후”라고 발표했다.
그는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0개월만 복역 하고, 75년 2월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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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사건을 보도한 1974년 4월 26일자 조선일보 1면 

 이 기사를 보면서 불고기 한번 사 먹으라고 건넨 1만 2000만원 때문에 구속이라니, 참, 어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당시 다치가와 기자는 서울에 머물며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야당 정치인과 서울대를 오가며 한국 인권과 민주화에 대해 취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외신기자들은 인터뷰 할 때 취재원에게 일종의 사례를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래서 건넨돈이 1만2000원이었습니다. 돈을 건넨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해 4월 3일 무교동 서린호텔에 머물고 있을 때 서울시경 형사 5명이 와서 “묻고 싶은 것이 있으니 같이 가자”며 그를 끌고 갔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조차 몰랐습니다. 도착해 보니 삼각지에 있는 기동대 외사과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김대중(DJ)와 관계는 어느 정도냐” “학생운동에 관한 유인물을 어디에서 받았느냐”는 등 조사를 받았습니다. 운동권 학생들에게 자금을 지원했고, DJ를 자주 인터뷰 했다는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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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사망 직전 인터뷰한 다치가와. 그는 김 전 대통령을 인터뷰한 마지막 외신기자다 

 그는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5일이 지난 10일쯤 남산에 있는 프린스호텔로 다시 끌려갔습니다. 이어 남산 중앙정보부로 옮겨져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중정 수사 요원들이 'DJ 총책, 서울대생 이철, 유인태 학생조직원, 나는 조총련과 한국을 연결한 좌익자금책'이란 조직표를 보여주며, 일본 간첩으로 인정하라"는 협박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는 "이철 유인태와 인터뷰때 1만2000원 줬던 게 전부다"며 부인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졸지에 74년 4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을 중심으로 180명이 구속·기소된 민청학련 사건으로 비화됐습니다. 그는 이철, 유인태, 장영달 전 민주당 의원, 김지하 시인 등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구속으로 일본 정부가 발칵 뒤집혔고, 한·일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됐습니다. 그는 한국 감방 10개월 책도 냈습니다. 한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던 그는 한국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두달에 한번꼴로 한국을 찾아 각종 사건에 대해 취재를 합니다.
 그는 자신을 '나그네'로 표현합니다. 펜과 취재 노트를 들고 세계 어느 곳이든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그의 거주지는 뉴욕 맨하튼, 활동무대는 전 세계 입니다. 
 유럽은 물론, 동경과 서울, 그리고 북경 등을 쉴새없이 오가며 취재를 하고 있습니다. "다치가와 선배 내일은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으면 "뉴스 있는 곳"이라고 답합니다. 그런 그가 어제 처음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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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쁜 날, 왜 우느냐"했더니 "지난 과거가 떠올라 그 감정을 억제할 수 없네"라고 하더군요. 이 일이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지만,  한국인 여자와 결혼한 그는 둘 사이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지금 하늘 나라에 있습니다. 한국인 아내마저 그의 곁을 영영 떠났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가족간의 이별을 겪었지만, 여전히 "난 한국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젠 한국이 다치가와 기자의 눈물을 닦아줘야 합니다. 그의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