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리도 야구복(福) 없었다던 오승환, 마침내
지지리도 야구복(福) 없었다던 오승환, 마침내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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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7억엔 러브콜에도 "지금은 시즌중이라" 태연 

한신타이거즈 구장

  

'오승환 7억엔'

일본 스포츠 전문지 산케이스포츠가 17일자 한신타이거즈가 오승환 영입을 위해 7억엔(약 77억원)을 준비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마무리 영입이 시급한 한신이 영입 후보를 오승환 1명으로 최종 압축했고, 영입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7억엔으로 책정했다고 전했다. 7억엔은 2년 전 이대호가 오릭스와 2년 계약을 체결하며 받은 총액이다.

오승환은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관심을 표현해주는 한신에 대해 "고맙다. 하지만 지금은 시즌이 끝나지 않아 특별한 반응을 보이기는 힘들다"는 반응을 나타낸 바 있다.

이 기사를 보면서 6년전 지지리도 야구복이 없었다며 웃던 그가 생각났다. 그와의 인터뷰는 부산 동래의 한 호텔에서 이뤄졌다.

아래가 인터뷰 전문이다. 이 기사를 읽으면 오승환 묘미에 더욱 빠질 것이다. <필자주>

 

 

#왜 돌부처 포커 페이스인가

그와 한 약속 시각은 오후 1시였다. 시계를 봤다. 낮 12시 59분. 저 멀리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인 그는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군살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근육질 몸매, 딱 벌어진 어깨, 솔직히 이종격투기 선수가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기 한국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포커 페이스' 오승환(삼성)이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시계는 오후 1시로 바뀌었다. 약속을 칼처럼 지켰다. 초까지 틀리지 않았다. 별명답게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냉철함이 묻어났다. 구단 관계자는 사전에 오승환 별명을 하나 더 귀띔해 줬다. 선수들 사이에선 '돌부처'라 불린다고. 그만큼 말이 없고 감정의 변화가 없다는 까닭이다.

그런 그의 머리와 가슴속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왜 포커 페이스, 돌부처인가? 이제 스물넷밖에 안된 프로 2년차 '애송이'인 그는 어떤 길을 밟아 왔을까?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참 용케도 지금껏 야구를 해 왔구나'란 놀라움과 대견함이 일었다. 그의 지난 야구 과정은 '신밧드의 모험'처럼 늘 모험의 연속이었다. 모험을 탈출하면 또 다른 모험이 도사리고 있고, 그것을 넘고 넘어섰다.

그뿐인가. 그 피말리는 모험의 과정에서 '사람을 잘 만났구나'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타래처럼 얽힌 인간사에서 사람을 잘 만나 한 송이 꽃을 피우는 게 쉽지 않을 터인데.

오승환은 서울 대영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야구의 '야'도 몰랐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5학년 때 야구부가 있는 도신초등학교에서 전근 온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그것이 그가 야구로 접어든 계기였다. 체력장 시간에 던지기를 했다. 작달막한 체구의 그가 중학교 형들보다 더 멀리 공을 던졌다.

그것을 본 선생님은 도신초로 전학해 야구 선수가 돼라고 권유했다. 그 뜻을 따랐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부모와 그는 선뜻 응했다.

처음엔 키가 작아 투수를 하지 못했다. 외야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기껏 알고 있었던 야구 선수는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가 감독님이니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 없다.

이어 우신중학교로 진학했다. 투수·내야수·외야수·포수까지 전 포지션을 다 거쳤다. 전국 대회에서 4강에 올랐던 것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중학교 야구부는 해체됐다.

한서고로 진학했다. 투수·타자를 골고루 소화했던 그가 2학년 2학기 때 이기종 감독이 개인 사정으로 인해 그만 뒀다. 그때 야구부가 흔들렸다. 다행히 그는 경기고로 전학 갈 수 있었다. 한서고 1학년때 경기고와 경기를 펼쳤는데 그때 경기고 감독이 유심히 그의 공을 본 것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면서 경기고로 전학가는 데는 별 문제 없었다. 이름은 밝히지 않지만 고 3 때 대통령배에서 당시 고교 최고 투수로 꼽혔던 선수에게 만루 홈런도 터뜨렸다.

 

 

#부상에 울고 시련에 강해지고

오승환은 흔히 말하는 명문교를 거치지 않았다. 또 야구복도 없었다. 야구복이 많다는 것은 무엇인가.

야구계에서는 부상을 당하지 않으면 '복'이라고 한다. 그는 고교 3학년 때 허리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거의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단국대로 진학했다.

강문길 단국대 감독이 고교 1학년 때 던지는 것을 눈여겨 보았던 것. 단국대 1학년이던 2001년에는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인대 접합 수술까지 받아 투수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다. 선수 생활을 포기하려 했다. 한창 때인 1, 2학년 2년 동안 공을 만져 보지도 못했다, 병원과 재활센터를 오가는 지루한 생활이 계속됐다. 미래는 암울해졌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함께 야구했던 친구들 모두 그만 뒀고, 그 하나만 유일하게 글러브를 끼고 있다. "저도 사람인데 왜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는걸요. 그런데 할 줄 아는 게 야구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정말 야구가 하고 싶다'란 생각이 더 강하게 생겼어요.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2년이 지나더라고요."

#"다시 태어나도 야구할 것"

오승환의 야구는 대학교 4학년이 돼서 꽃피웠다. 2004년 대학 춘계리그에서 우수 투수로 선정됐고, 추계리그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MVP가 됐다. 그리고 삼성에 2차 1순위로 지명받고 고대하던 프로 무대를 밟았다.

그의 얼마 안되는 야구 인생은 쓰러지면 또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였다. 시련은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들 듯 그 시련은 그에게 마무리 투수의 운명을 던져 주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9회 말 2사 만루 역전 위기든,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는 상황이든 언제나 똑같은 표정으로 공을 던졌다. 불의의 일격을 당해도 무덤덤하다. 박빙의 경기를 승리로 확정지은 뒤에도 무표정하게 더그아웃으로 들어간다. 삼진을 잡아도 안타를 맞아도 늘 똑같은 표정, 그래서 포커 페이스가 되었다.

"마운드에 오르면 점수 따위는 신경 안 씁니다. 한 타자 한 타자만 잡으면 되기 때문에 홈런을 맞든 안타를 맞든 공 하나에 온힘을 실어 던질 뿐입니다."

 

 

#"남자를 편안하게 해 주는 여자가 좋아요"

그는 야구 이외의 것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좋아하는 메이저 리그 선수와 팀, 음악, 영화를 물었다. 그의 답변은 한결같이 "없는데요"였다. '없는데요 시리즈'는 이어진다. "여자친구는?"-

"없는데요". "여자 친구 사귀고 싶지 않은가?"-"없는데요." "취미는?"-"없는데요."

 그럼 그는 진짜 돌부처처럼 사는가? 경기를 끝내고 밤늦게 숙소로 오면 그날의 경기를 분석하고, 또 마사지를 받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잔다. 야구가 없는 월요일엔 숙소와 연습장을 오가며 연습한다.

야구라는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그것을 아는 팬들이 책을 많이 보내 준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권 정도는 읽는다. 취미가 없다고 했지만 어쩌면 책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가 아닐까 한다.

"일주일 휴가를 얻는다면 누구와 어디로 가고 싶은가?"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던져 봤다. "혼자서 바다로 가고 싶다"라고 했다. 탁 트인 바다를 보면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아서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교 때 답답할 때면 혼자서 부산 해운대와 강릉 경포대를 갔다"라고 했다.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없는가"라고 했더니 "혼자"라고 답했다. 그동안 여자 친구 한 번 사귀지 못한 숙맥이었나. 아니다. 6명의 여자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헤어졌다.

그는 확고한 여자관이 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편안하게 해 줘야 한다." 그의 결혼 상대 이상형이다. "야구 선수 아내는 남편 뒷바라지를 잘해야지 않습니까"라고 그 까닭을 덧붙인다. 그는 지금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몇 년 더 흐르면 그런 생각이 들겠지만 지금은 야구를 더 생각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어머니가 해 준 찌개

그는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 대신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만든 김치찌개·된장찌개·제육볶음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했다. 보양식으로는 장어를 즐겨 먹을 뿐이다.

그는 "아프지 않으면 국내 최고령 투수로 남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35세만 되면 노장이란 소리를 듣는데 그 등식을 깨고 마흔이 넘을 때까지 던지고 싶은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야구에 대해서 구단 팬북에 이렇게 적었다. "야구는 행복이다." 가장 좋아하는 야구를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게 있겠는가란 의미라고 한다.

다시 태어나도 야구를 하겠다는 그가 불운이 겹칠 때마다 좋은 사람과 인연을 맺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팬들은 지금 세이브 왕 오승환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팬들에게 영원한 포커 페이스로 기억되고 싶어 했다. 지금처럼.

 

■오승환은?

▲생년월일: 1982년 7월 15일, 전북 정읍

▲출신 학교: 대영초-도신초-우신중-경기고-단국대

▲신장·체중: 178㎝·90㎏

▲혈액형: B형

▲가족 관계: 오병옥(55)-김형덕(51)씨 사이 3형제 중 막내

▲술·담배: 안함

▲잡기: 당구·게임 등 전혀 안함

▲계약금: 1억 8000만원

▲경력: 2005년 삼성 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