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계절 김일 선생을 떠올리며
잊혀진 계절 김일 선생을 떠올리며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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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잊혀진 영웅, 박치기 왕 김일

김일 선생 기념관 입구에 있는 김일 선생 흉상

 

시월의 마지막 날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흑백 TV가 처음 나왔을때 즈음인 1960년대.

한국전쟁 후유증으로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시절,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아다준 '영웅'이 있었다.  

그가 전설의 '박치기 왕' 고 김일 선생(1929-2006)이다.

1960~70년대 반칙을 일삼는 일본의 야비한 레슬러들이나 자이언트 바바와 같은 거구들을 주특기인 박치기로 쓰러뜨리는 장면이 흐릿한 흑백화면에 나오면 모든 국민들은 통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에게 숱한 희망과 감동을 안겨줬던 김일 선생은 2006년 10월 26일 작고했다.

김일 선생이 작고한 날이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작고한 날이기도 하다.

김일 선생은 필자에게 "내가 만약 눈을 감는다면 10월26일이고 싶다" 말하곤 했다.

김일 선생은 10월26일 눈을 감으셨다.

 

김일 선생 생가와 묘비

 

김일 선생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에 영면해 있다.

시월의 마지막날 김일 선생이 생각나는 것은 지난 시절의 추억들 때문이다.

필자는 김일 선생 작고하기 2년 전부터 애틋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2006년 11월 김일 선생 자서전을 냈다.

그가 작고한 후 한달만이다.

제목은 '굿바이 김일'.

그 자서전 발간을 위해 거의 1년 동안 김일 선생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에 담았다.

그리고 서울서 여덟시간 걸린다는 거금도 생가도 3번 갔다 왔다.

김일 선생 자서전은 일본서도 출판 됐다.

일본에선 이판 인쇄까지 했었다.

일본은 그만큼 박치기왕 김일을 잊지 못한다.

한번은 김일 선생과 동경 긴자에서 식사를 하는데

한 70대 중반의 여인이 김일 선생을 알아보시곤

인사를 하셨다.

알고보니, 여고시절 김일 선생 팬이었다는 이 여성은

김일 선생이 링에 오를때 팬들에게 손을 잡아주면서

팬들의 환호에 화답했는데, 당시 자신의 손을 잡아 주었던 그 손이

아직도 가슴에 진한 추억의 동경처럼게 남아 있다고 전했다.

그는 마음속에 동경했던 그 영웅을 이 자리에서 만나니 너무 기쁘다며 어쩔줄 몰라했었다.

 

 김일 선생 일본어 초판

 

김일 선생 일본어 재판

 

시월이 되면 많은 올드팬들은 김일 선생을 떠올릴 것이다.

필자도 김일 선생과 함께 보낸 나날은 평생 잊기 힘들다.

세상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분이 김일 선생이었다.

김일 선생의 마음은 하얀 눈 그 자체였다.

노년이 외롭고 힘들었는지, 가끔씩 창가를 보시면서 눈물을 훔치셨고,

고기를 드시며 손수 접시위에 올려주시곤 하셨다.

소주와 맥주 혼합주인 소맥주를 권했고,

노래방에서 노래라도 한곡이라도 부르면 흥미 나서 박수를 치시고,

감자떡과 메밀을 갖고 병실로 가면 남김없이 다 드셨다.

필자의 허리에 챔피언 벨트를 채워주면서 "진짜 챔피언 같다"고 추켜세워줬던 분이 김일 선생이었다.

과거의 추억을 생각하면서 꾸벅 조셨던 김일 선생을 보고 있노라면,

벌레 하나도 잡지 못하시는 분이 어떻게 레슬링으로 세계를 제패했을까 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

김일 선생과 함께 간 국토순례도 잊을 수 없다.

2006년 2월 서울에 폭설이 내렸다.

당시 겨울들어 가장 눈이 많이 내렸다.

첫날 도착지가 강원도 속초였다.

그 많은 눈을 뚫고 그곳에 도착한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왜냐면, 그 험한 미시령과 한계령 둘 중 한 곳을 선택해서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주변의 반대가 많았지만 필자는 이를 무릅쓰고 속초행을 강행했다.

강원도 인제까진 무사히 도착했다.

문제는 한계령과 미시령을 넘는 것이었다.

차량이 전면 통제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었다.

그 때 김장준 전 인제군수가 떠올랐다.

김 군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일 선생이 인제를 지나 강원도 속초로 가시는 데 '인제가면 언제오실지 모르시니' 인제군이 제설 차량을 동원해서하도 한계령을 넘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김 군수는 혼쾌히 제설차량을 앞장세웠고,

필자가 탄 차량은 제설차량 뒤를 따랐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계령 정상에 오르니 눈부신 햇살이 우리를 반겼다.

그랬다. 영웅이 가는 길은 하늘의 눈도 막지 못했다.

길이 열린 것이었다.

속초에서 일박을 한 후 영덕-경주-울산으로 갔었다.

그리고  부산에서도 일박 했었다.

부산에선 1965년 11월 '레슬링 쇼' 파동 이후 반세기 가깝게 갈라섰던 장영철 선생과 조우하며 화해했었다.

두 사람 화해 후 장영철 선생은 8월, 김일 선생은 10월에 작고했다.

 

살아생전 화해의 손을 잡았던 김일-장영철 선생.  두사람의 화해 장면을 취재중인 필자(맨 오른쪽)

 

김일 선생의 고향 거금도행에서도 많은 추억이 남아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거금도다.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20분 가량 들어가야 했지만 지금은 소록대교가 뚫려서 승용차로 바로 갈 수 있다.

2006년 2월 김일 선생을 승용차에 태운 후 전남 순천시내를 가로지른 후 벌교를 지나 고흥으로 가는 길이었다.

초행일수밖에 없었던 필자는 길눈이 어두웠다.

그런 것을 짐작했었는지, 김일 선생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조그만 가면 벌교 상고 앞입니다. 저기서 좌회전을 잘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네비케이션 역할까지 했다.

승용차가 고흥군에 진입하자 "과거 비포장 도로라 고흥 터미널에서 집까지 가면 버스가 하도 쿵딱 쿵딱 뛰어 마치 탱크를 타고 고향에 가는 기분이었다"며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생가 거금도에 도착했다.

언제 다시 올 지 알 수 없는 고향집에 다다르자 감정이 복받치는 듯 얼굴에선 무상함이 묻어났다.

생가에는 50여장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 사진만이 지난 시절 화려했던 김일 선생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역도산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제 나도 얼마 안있으면 저 분 곁으로 가겠지"라며 역도산을 너무 그리워 했다.

 

 

일본에서 개최된 김일 선생 출판기념회 

 

그는 고향 산을 바라보며 이런 말도 했다.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듯' 레슬링을 하면서 남긴 모든 것은 사회로 되돌려 주고 싶다고 했다.

국민이 있었기에 김일이 있었다.

국민속의 김일로 남고 싶어했다.

2006년 3월초 일본도 동행했다.

 

1960년대 김일과 이노키

 

동경에서 역도산 제자 안토니오 이노키

재일 야구 영웅 장훈씨, 역도산 부인과 아들

김일 선생의 첫사랑이자 팬이었던 한 여인도 백발이 되어 김일 선생앞에 나타났다.

필자는 그 모든 것을 기록에 담았다.

필자는 한 영웅의 삶에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김일 선생 자서전을 내기로 했다.

처음 그 자서전 제목은 '내머리를 돌덩이로 만들어'였다.

그런데 자서전 출간 한달 전 10월26일 그가 눈을 감으면서

 

김일 선생 한국 출판기념회

 

자서전 제목이 '굿바이 김일'로 바뀌었다.

김일 선생은 10월26일 오전 12시경 유명하셨다.

필자는 가장 적기 싫은 기사가 부음 기사였다.

그러나 필자는 자서전 편찬 한달을 앞두고 그의 부음 기사를 적었다.

소위, 부음 기사 특종을 한 것이었다.

그는 죽으면 고향 땅에 묻히길 원하지 않았지만 유족들은 거금도로 모셨다.

김일 선생 거금도는 지난 8월말 갔다왔다.

그곳도 많이 바뀌었다.

김일 체육관이 건립됐다.

그리고 김일 선생 유품이 전시됐다.

그의 생가와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생가에서 김일 선생과 주고받았던 대화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시월의 마지막날 김일 선생이 그립다.

그에게 술한잔 올리고 싶다.

잊혀진 계절, 10월.

그 잊혀진 계절 10월에

영웅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가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