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파 협객 '낙화유수' 김태련
낭만파 협객 '낙화유수' 김태련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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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추모식에 전국 주먹들 모여 '형님' 예우

 

그가 작고한지 어느덧 7년이 흘렀다.

인생은 낙화유수(落花流水)…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해서 부쳐진 별칭의 주인공.

낭만파 주먹의 마지막 거장.

낙화유수 고 김태련 씨 (1932-2006)다.

7년 전 2006년 11월1일 오전.

김씨의 후계자 조병용씨 전화가 걸려왔다.

조씨는 "정 선생 큰형님께서 쓰려져셔서 국립의료원 중환자실에 계신다"고 알려줬다.

필자는 급히 국립의료원으로 달려갔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쉴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조씨가 말했다.

"정 선생 형님이 산소호흡기로 연명하지만  들을 수는 있으니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세요."

필자는 "형님(낙화유수) 정의로운 세상에서 여전히 낙화유수처럼 사십시요"라는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어 그다음날 낙화유수는 눈을 감았다.

 

 

맨 왼쪽이 김태련씨

 

살아생전 낙화유수는 필자와 각별했다.

사실 후배들은 '오야봉' 임종 직전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지만, 필자는 마지막 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봤다.

필자가 낙화유수와 인연을 맺은 것은 당시 주먹들의 세계를 연일 취재하면서다.

때문에 낙화유수는 필자를 통해 주먹 세계의 전설적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했다.

그래서 낙화유수는 어디를 가든 필자를 찾곤 했었고, 필자는 낙화유수가 부르면 달려 갔었다.

그와는 수차례 양로원 봉사활동은 물론 전국 소년교도소 강연회도 다녔다.

 

 

 

2일 그의 7주기 추모식이 경기도 장흥에서 열린다.

매년 그의 추모식에는 전국에서 약 100여명의 후배들이 모인다.

요즘 주먹세계에서 의리가 사라졌다지만 이들은 한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으로 깍듯이 모시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낙화유수는 말그대로 참, 유유낙락하게 사셨다.

그의 별명은 서울대 상대(52학번) 시절 여학생들이 붙여줬다.

그것이 별칭으로 굳어지면서 실명보다 낙화유수란 별칭으로 더 유명했다.

 

 

 

그는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단국대 출신 장윤호를 만나면서 주먹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1962년 이정재가 군사혁명 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유지광마저 정치깡패 혐의로 구속돼 힘을 상실했을 때 '동대문사단'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5·16 직후 재판장에 서기도 했다.

당시 재판관들은 대부분 서울대 출신들이었다.

대학 시절 그와 친했던 당시 혁명재판부 양준모 판사가 재판장에 선 그를 보고 "김태련, 아니 자네가 외교관이 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서 있느냐"며 기가 막혀 했는 일화도 있다.

그는 재판정에서도 당당했다.

서울대 출신이면서 주먹을 쓸 수밖에 없었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우리는 절대 깡패가 아니다. 협객이다. 법을 어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약한 사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어.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을 향해 주먹을 날렸지."

그가 석방되자 군사정부는 전라북도 군산시장과 전국구 국회의원까지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쿠데타 정권을 도우며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협객의 길과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생전 필자에게 "내가 걸어온 길이 사람에 따라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협객의 길을 걸어왔음을 자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시 태어나도 협객의 길을 걷겠다"고 덧붙였다.

2000년부터 당뇨 증세가 있어 100kg의 몸무게가 70kg으로까지 줄었든 그는 일주일에 두번씩 투석을 하고 틈 나는 대로 양로원을 돌면서 불우한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았다.

지금도 그의 후배들은 큰형님의 뜻을 받들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낙화유수 후계자 조병용씨는 30년 가까이 보좌했다.

 

 

 

조씨는 김씨가 별세한 이후 2년 동안 ‘현대판 시묘살이’를 한 것으로 알려져 주먹계 선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었다.

살아 있는 ‘형님’도 배신하는 요즘 세태에 고인이 된 ‘큰형님’의 묘소를 돌본다는 게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조씨는 불우한 이웃을 도우며 생을 마감한 김씨의 유지를 받들어 경기도 의정부, 광주 등 외진 곳에 위치한 보육원과 양로원 등에 사랑의 손길을 전달하고 있다.

이권에만 눈먼 조폭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이들을 '협객'이라고 부르는 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