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C의 재팬터치⓹] 한국인 최초 일본 천황궁 앞 시위
[JBC의 재팬터치⓹] 한국인 최초 일본 천황궁 앞 시위
  • JBC까
  • 승인 2019.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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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궁은 시위 금지 구역, '한일병합 무효' 시위
후지산에 한국인 울분 담은 글 새긴 후 파묻어

 

일본 동경 천황궁 전경
일본 동경 천황궁 전경

재일한국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일본을 첫 방문하면서 재일한국인에 대해 실망했다. 지난 시절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느꼈던 실망은 감정과 열정이 앞선 실망인 것 같다.

2001년 3.1절을 앞두고 ‘한일병합’ 무효 시위 취재를 위해 황손 이석 씨 일행과 함께 동경을 방문했었다. 당시 나는 재일한국인을 보면서 실망이 컸다.

당시 이석 씨는 재일교포 사이에 영향력이 큰 한 인사를 만났다. 특이한 성을 가진 그는 이석 씨가 어떤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했었는지 알고 있었다. 조선 순종의 아들로서 비운의 황태자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이석 씨는 노래 ‘비둘기 집’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 그가 당시 오갈 때가 없어 찜질방을 건전하면서 산다고 해서 국내에서 큰 관심을 불러 모았을 때다.

그들도 이석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는 듯 했다. 그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동경에 호텔 숙소는 잡았는지” “돈은 있는지 등” “왜 왔느냐” 등 캐물었다.

이석 씨를 향한 비꼬는 듯한 말투도 섞였다. “일은 하고 계십니까?” “뭘 먹고 사십니까”등을 물으면서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런데도 이석 씨는 웃으면서 답변을 해주었다. 나는 이런 이석씨를 보면서 약간은 화가 났다.

속으로 “저런 사람 질문에 일일이 왜 답변하지” 약간은 좀 모자란 사람 아냐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나섰다. “선생님 질문에 뼈가 있고, 말이 좀 지나칩니다.”

그는 금새 눈치를 차리고 “아, 그렇습니까”라고 웃었다. 그는 자신을 과시하듯 마담에게 발렌타인 21년산을 주문했다.

“이 술이 비싸서 일본에서도 발렌타인 21년산 잘 마시지 않습니다. 오늘 이 술 드시고 가세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속내를 전했다.

“이보세요. 일본 천황궁 앞에서 한일병합 무효 시위를 하신다고 하는데, 괜한 일 벌이지 말고 동경 구경하다가 한국으로 조용히 돌아가세요.”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화가 치밀어 맞받아치려고 했었는데, 이석 씨가 만류했다.

그와 헤어진 후 신주쿠 한 부근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낯선 사람이 우리를 계속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경시청 소속 형사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몇 호실 묵는지 확인을 했다. 일본에 오기 전 한국의 황실 자손이 일본 천황궁 앞에서 한일병합 시위를 할 예정이다는 예고기사를 내보냈다.

그는 아마도 이 기사를 확인 한 후 우리 일행의 동선을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천황궁 앞서 한일병합 무효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01년 3월1일 필자가 찍은 사진이다.
일본 천황궁 앞서 한일병합 무효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01년 3월1일 필자가 찍은 사진이다.

동경 하늘에 부슬 부슬 이슬비가 내렸던 3.1일 오전 10시. 우리 일행들은 일본 천황궁 앞 시위 현장에 도착했다. 한국에선 3.1일이 휴무지만 일본은 아니다. 평일이고 비까지 내려서 그런지 천황궁 앞은 조용했다.

이석 씨와 일행들은 천왕궁 입구 다리 부근에서 태극기와 ‘한일병합 무효’라고 적힌 현수막 펼친 후 구호를 외쳤다. 나는 그 장면을 쉼 없이 셔터로 눌렀다. 일행들은 천황궁 쪽을 향해 한국식민지배 사과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외국인 관광객과 몇몇 일본인들이 신기한듯 일행들을 쳐다보았다. 문재인 좌파 정권이 들어서서 그런지 지금은 청와대 부근서 시위를 하곤 한다. 과거 정권 때는 어림도 없었다. 청와대 앞은 보안상 시위금지 구역이었고, 이를 어기고 시위를 할 경우 경찰이 즉시 체포해 갔다.

일본 천황궁 앞도 마찬가지다. 거기선 소수든, 다수든 대중이 모여서 집회하는 것은 상상 할 수가 없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 당시는 이를 몰랐기에 시위를 할 수 있었다. 나에게 누군가 “지금 당시처럼, 일본 천황궁 앞에서 시위를 벌일 수 있겠는가” 묻는다면 한마디로 “노”다.

아니나 다를까, 시위를 하자 마자 일본 경시청 사이카가 순식간에 달려왔다.

천황궁은 전 세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또 일본에서도 삼엄함 경비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은 천황을 위해 살고 천황을 위해서 목숨을 던지는 민족인데 그 천황궁 앞에서 천황 사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는 것은 정말 큰 사건중의 사건이었다.

아마도 한일 통틀어 천황궁 앞 시위는 나와 우리 일행들이 처음일 게다. 경시청 소속 경찰들은 “얼른 돌아가라, 그러지 않으면 연행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 때 우리 일행 중 계속 시위를 벌여 일본 경찰에 연행 당하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언론이 주목할 것이고, 한일병합 무효를 더 알릴 수 있지 않겠는가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자칫 이 문제가 한일간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고, 만약 언론이 외면하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 시위를 멈추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사실 동경 거주 한국 특파원들이 이 광경을 취재해 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동경 주재 한국 언론사들은 모두 외면했다.

당시 기자단에서 이에 대한 취재를 하지 말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거 같았다. 황손 이석 씨 등 일행들이 천황궁 앞에서 한일병합 무효와 일본 식민지배 사과 시위를 벌이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일본 천황과 조선 황손 이석 씨는 같은 황손이다. 조선 마지막 황손이 시위를 벌였는데도 취재를 외면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국내 언론들은 반일선동을 하고 있다.

당시 나는 일본 경찰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일제 36년 간 영향이 컸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선 일본 경찰은 늘 조선인을 짓밟고, 고문하고 억압했던 상징 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 경찰은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경찰도 친절이 몸에 밴 일본인 모습 그대로 였다.

어제 저녁 우리 일행 숙소를 파악한 경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는 우리 일행들에게 굉장히 친절했다. 그가 일행들 다음 행선지 정보를 파악하려고 그러는지 몰라도 그는 일본서 혹시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라며 전화번호까지 남겨주었다.

일본 후지산
일본 후지산. 출처=네이버 이미지

나의 일본 첫 일본 방문은 시위로 시작해서, 시위로 끝났다. 나는 그 다음날 일본의 심장부 후지산(富士山)으로 갔다.

일본 시즈오카현(靜岡縣) 북동부와 야마나시현(山梨縣) 남부에 걸쳐 있는 후지산은 일본을 대표하는 미의 상징이다. 해발 3,776미터의 일본 최고봉으로 홀로 우뚝 솟은 후지 산의 카리스마는 주변의 풍경을 압도하기에 손색이 없다.

오늘날 후지산은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는 영산(靈山)이다. 난 그 후지산에 올라갔다. 거기에서 나는 한국에서 부터 가슴에 품고 가져갔던 빨간 글씨가 새겨진 하얀 천을 후지산 중턱에 파묻었다.

그 하얀 천에 적힌 글은 아주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지금의 '반일', ‘노 아베’ 문구는 저리가라다. 나는 독립군의 심정으로 일본에 비수를 꽂는 글을 하얀천에 적은 후 일본의 신산 후지산서 일제강점기 시절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들의 영혼을 위로해주었다.

그런 나는 지금 친일이 되었다. 친일을 해야 비로소 지일이 되고, 그 후 마침내 극일이 된다. 나의 친일은 일본을 이기기 위한 극일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오직 반일을 외친다. 친일은 매국노, 반일은 애국자. 그 이분법으로 갈라 놓았다.

현재 한국에선 좌파 정치인과 시민단체들이 반일 시위를 펼치고 있다. 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아베가 한국 수상이 아니다. 촛불을 들고 아베 퇴진을 외치려면 일본 수상 관저 앞에 가서 하지 왜 한국서 하느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