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탄- '문재인도 모르는 사노맹', “이래도 조국인가?”
-제1탄- '문재인도 모르는 사노맹', “이래도 조국인가?”
  • JBC까
  • 승인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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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사노맹 산하 조직으로 '남한사회주의과학원'을 결성하고 구속
황교안 "국가 전복을 꿈꿨던 사람이 법무부 장관이 될 수 있나”
20대 시절 조국 전 민정수석
20대 시절 조국 전 민정수석

문재인이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했다. 이에 대해 자유한국당은 물론 야당 등 범 보수 우파들까지 나서 지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조국의 ‘무능’을 떠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지난 1993년 사노맹 산하 조직으로 '남한사회주의과학원'을 결성하고 구속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노맹 사건에 연루된 이력이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사노맹은 어떤 조직 이었길래 범보수 우파가 한 목소리로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것일까. JBC까가 사노맹 핵심인사들의 자료를 토대로, 5회에 걸쳐 사노맹의 실체를 파헤친다. 이 자료는 90년 11월 작성된 것과 사노맹 중앙위원장 백태웅씨가 91년 4월에 직접 쓴 것이다. 사노맹 실체를 가장 적나라게 알 수 있다.<편집자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 12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조 후보자를 겨냥해 “무장 공비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 달성을 목표로 했던 사노맹 관련 사건으로 실형까지 선고받았던 사람이다. 국가 전복을 꿈꿨던 사람이 법무부 장관이 될 수 있나”라고 날을 세웠다.

황 대표는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국가 전복을 꿈꾸는 조직에 몸 담았던 사람이 법무부 장관에 앉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즉각 조국 후보자 지명을 철회하기 바란다”고 재차 강조했다. 황 대표는 대표적인 공안검사 출신에 법무부장관까지 역임했다.

이에 대해 조씨는 지난 14일 사노맹 논란에 대해 “장관 후보자가 되니 과거 독재 정권에서 맞서고 경제민주화를 추구했던 저의 1991년 활동이 2019년에 소환됐다”며 “28년 전 그 활동을 한 번도 숨긴 적 없다. 자랑스러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고 언급했다.

그는 “20대 청년 조국은 부족하고 미흡했다. 그러나 뜨거운 심장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아픔과 같이 하고자 했다”면서 “앞으로도 비가 오면 빗길을 걷고 눈이 오면 눈길을 걷겠다”고 말했다. 사노맹 활동에 대한 당시의 사법적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법무부 장관으로서 소명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황 대표 주장대로 사노맹이 국가전복을 꿈꾼 조직일까. 조씨 말대로 사노맹이 ‘경제민주화’를 지향했던 조직일까.

2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90년 11월 10일 오후 3시 서울 삼성동 무역전시관. 이날 이곳에서는 ‘민중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민중당은 대표적인 좌파 정당이었다. 당시 민중당의 출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난 1987년 6월 항쟁이후 합법적인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출현한 정당이다. 당시 상임대표에 이우재 전 한나당당 의원, 정책위원장에 신문명정책연구원장 장기표, 사무총장에 이재오 전 의원이 선임됐다. 노동운동권 출신 김문수 전 의원이 노동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임해규·차명진·박형준 전 의원도 민중당 출신이다.

이날 민중당 창당대회가 열리기 전 큰 소동이 벌어졌다. 우뢰와 같은 환호성 속에 당기가 입장하려는 순간, '붉은 깃발'을 든 몇 명의 젊은 청년들이 연단을 향해 돌진했다.

이에 당황한 민중당측이 이들을 적극 제지하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져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우재 대표(오른쪽)가 민중당 창당 대회 깃발을 흔들고 있다. 출처=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이우재 대표(오른쪽)가 민중당 창당 대회 깃발을 흔들고 있다. 출처=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이우재 대표가 민중당기를 흔들면 셔터를 누를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던사진기자들은 황급히 '붉은 깃발'에 몰려가 플래시를 연방 터뜨렸다.

1년 가까이 '잔치'를 준비했던 창 당대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사회자는 "외부침입자의 난동"이라며 장내를 진정시키려 했다. 이 소란은 30분쯤 지나서야 진정되었다.

'붉은 깃발'을 혼든 이들은 붉은 띠를 이마에 동여매고 붉은 티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상의의 앞쪽에는 “사회주의만세", 등 뒤에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창당대회가 끝난 후 경찰에 모두 연행된 이들은 사노맹 노선을 지지하는 ‘서울민주주의학생연맹’ 소속 대학생들로 알려졌다.

그날 사회를 보았던 사무총장 이재오씨는 이 사건에 대해 "처음에는 창당을 방해하려는 안기부의 공작인 줄 알았다”며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이라고 분개했다.

그런데 일반인에게는 상식을 초월한 이 같은 '특공작전' 이 사노맹에게는 상식적인 전술방침이다.

민중당 창당 다음날 11월11일 고려대에서 열린 노동자대회에서도 사노맹은 자신들의 정치구호가 적힌 적색 플래카드 세 개를 연단 쪽에 설치하려다 주최 측과 격렬한 실랑이를 벌였다.

이들은 '대중적 계급투쟁의 시대'인 현 시기에 “사노맹의 투쟁목표 이념인 '사회주의의 깃발' 을 숨기지 말고 노동자대중과 민중 앞에서 전면적이고 공공연한 사회주의 선전선동을 시작해야 함"을 역설했다.

사노맹은 무장봉기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할 노동자당을 결성키로 하고 민족민주혁명론(NDR)을 추종자들을 모은 뒤, 같은 해 11월 12일서울대에서 열린 전노협 주최 건국노동자대회에서 사노맹 결성을 공개 선언했다.

사노맹은 당시 전노협 결성을 위해 서울대에서 개최된 전국노동자대회 현장에 ‘출범선언문’을 뿌렸다. 이때 주최 측인 전노협은 이를 안기부의 공작으로 추정, 이 '혁명적'인 선언문을 거두어 소각하고 전노협과는 무관함을 누차 강조했었다.

당시 사노맹이 서울대에 뿌린 출범선언문이 ‘한국판 공산당선언’이라 불렸다. “40여년 동안 허공을 떠돌던 '붉은 악령’이 마침내 남하땅에 출현하였다.” 출범선언문 서두인 이 구절은 1847년 마르크스 엥겔스가 작성한 국제공산주의동맹의 ‘공산당선언’의 첫머리인 “하나의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라는 표현과 너무도 흡사하다.

'유령'을 '붉은 악령'으로 대체한 고의적 표절에서 이들이 추구하는 사상을 쉽게 해독할 수 있다.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전 세계를 향해 “자신들의 견해· 목표 · 성향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자기 당파 자체의 '선언’을 통하여 공산주의 유령이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 대처해야 할 때가 닥쳐왔다”고 선포했다.

사노맹은 스스로 '혁명적 사회주의자’임을 공표하고 “자본가계급을 향한 전면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사노맹은 ‘출범선언문‘ 을 통해 그리고 북한의 조선로동당과 소비에트연방 산당에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이 출범했음을 뜨거운 감격으로 보고 드린다”는 메시지를 띄우기도 했다.

사노맹은 노사분규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배후에서 선동해 임금투쟁을 정치혁명투쟁으로 격화시켜 총파업으로 유도한 뒤, 결정적 시기에 봉기해 사회주의혁명 달성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한 1990년도 중점수행과제로 ‘사회주의혁명 선전 선동의 대중적 확산’, ‘노동자계급 주도 합법 민중정당 결성’, ‘전국 주요공장에 혁명적 사회주의자 공장소조 창출’, ‘학생운동의 노동자계급 동맹세력화’, ‘독점재벌 재산몰수 국유화’, ‘물가관리민중위언회 설치’,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등을 투쟁 슬로건으로 삼았다. 

사노맹이 일반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91년 10월 30일 안기부의 사노맹 수사발표 때였다.

이 같은 사노맹의 '원색적’인 출범선언문이 뿌려지자 공안당국은 사노맹에 대한 '일망타진'에 나섰다.

1991년 10월30일 안기부 김영수 제1차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사노맹은 종전의 지하혁명과는 달리 자신들이 혁명적 사회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엄청나게 큰 규모의 사회주의혁명조직”이라고 그 '실체'를 규정했다.

이에 "사노맹 핵심조직원 40명을 구속하고 신원이 확인된 핵심조직원 150여명을 수배했다"고 밝혔다.

안기부는 사노맹 조직원은 노동계 230여명, 학원계 130여명, 중종교계 청년운동단체 90여명, 민중당 30명, 청년운동그룹 230여명 등 모두 16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노맹은 기존의 비합법동조직파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규모이다. 안기부의 수사발표 중 국민들의 눈길을 끈 것 중 하나는 대표적 민중시인인 박노해 씨가 중앙위원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