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C의 재팬터치⑩]일본 천황은 백제인 후손
[JBC의 재팬터치⑩]일본 천황은 백제인 후손
  • JBC까
  • 승인 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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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노노 니가사 제50대 간무 일왕을 낳은 백제 왕족
일본인들은 이를 부정하지만 일왕은 간접 시인
아키히토 일왕(오른쪽)이 지난 1월 도쿄 왕궁에서 나루히토 왕세자(왼쪽)가 지켜보는 가운데 신년 축하 연설을 하는 모습. 지난 5월 나루히토 왕세자가 일왕으로 즉위했다.
아키히토 일왕(오른쪽)이 지난 1월 도쿄 왕궁에서 나루히토 왕세자(왼쪽)가 지켜보는 가운데 신년 축하 연설을 하는 모습. 지난 5월 나루히토 왕세자가 일왕으로 즉위했다.

2002년 3월.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일본어판이 백제 여성 고닌천황 황후 다카노노 니가사 오에릉(光仁天皇皇后 高野新笠大枝陵)취재에 나섰다.

다카노노 니가사는 일본 ‘헤이안 문화’의 창시자인 제50대 간무(桓武 781∼806 재위) 일왕을 낳은 백제 왕족이다.

“일본의 수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인과의 혈연관계를 공적으로 인정한 일왕의 성명에 대해 ‘아무것도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고 무뚝뚝하게 군다. 그러면서 조선 문화가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천황과 한국인과의 연계성에 대해선 딱 잡아뗀다. 교토에 있는 다카노노 니가사 묘지 주변의 주민들은 니가사가 조선인이었다는 것은 몰랐다고 입을 맞춘다. 대숲으로 둘러쳐진 니가사의 묘는 산책이며 하이킹에 잘 어울리는 나지막한 야산이다.

그곳에는 간무일왕의 어머니라는 것이며 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그의 경력을 설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 여자였다니요? 전혀 몰랐어요”라고 이웃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는 한 주부는 놀란다. 일본인들에게 이것이야말로 다카노노 니가사라는 여성의 역사를 아는 좋은 기회가 아닐 것인가.

그것은 일본인 자신의 역사를 아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ニユ-ズウイ-ク’ Newsweek 〈天皇家と朝鮮〉 2002.3.20일자 일어판)

간무 일왕 초상화. 생모가 백제인이다.
간무 일왕 초상화. 생모가 백제인이다.

간무일왕의 생모 다카노노 니가사 왕후의 초상화가 전해지는 것은 없다. 일본 왕실 관찬 역사책 ‘속일본기’에서는 그에 관해 여러모로 상세하게 기술하면서 “왕후의 조상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의 왕자 순타(純陀) 태자로부터 이어지고 있다.

왕후는 덕망 넘치며 우아한 모습으로 귀품을 갖춰 젊은 날로부터 평판이 드높았다.

엔랴쿠 9년(790년)으로 거슬러서 ‘왕태후’의 존호를 추서하였다.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주몽)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精)을 감응하여 탄생했다. 왕태후는 그 후손이다.

그 때문에 시호(諡號)를 천고지일지자희존(天高知日之子姬尊)으로 받들어 모셨다. 왕후 묘소 옆에 세워진 궁내청(宮內廳·천황궁 관청) 현판에는 이 시호만이 밝혀져 있다.

다카노노 니가사 왕후는 서기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일본 왕실로 건너온 조신 화을계(和乙繼·야마토노 오토쓰구 7∼8C)라는 백제 왕족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신라계의 귀족 여인 하지노 마마이(土師眞妹)다.(신찬성씨록)

화을계는 왜 왕실에 와서 야마토노 아소미(和朝臣)라는 고관으로 우대받던 조정의 신하로서 본래 백제 무령왕 후손이었다.

야마토(和) 성씨는 백제 무령왕의 왕성(王姓)이기에 ‘일본’을 상징하는 야마토(和)는 그 옛날의 백제 왕실과의 연고가 드러난다.

다카노노 니가사 왕후는 아비가 왜 왕실의 조신이었기 때문에 시라카베(白壁·709∼781) 왕자와 결혼했다. 이 시라카베 왕자가 뒷날의 고닌(光仁·770∼781년 재위) 일왕이다. 고닌 일왕이 등극한 것은 그의 나이 이미 환갑이 지난 61세 때의 일.

일왕 계승을 둘러싸고 일왕가가 왕권 쟁탈로 극히 험악하고 어수선했던 시대에 그는 늙은 왕자의 몸으로서 왕위에 올랐다(桓武天皇 2006)고 했다.

그의 윗대에서 일왕들이 폐제 되거나 또는 거듭 왕으로 복귀하는 중조(重祚) 등, 그야말로 왕실의 살벌한 정치상황에서였다.

더구나 왕위 계승자가 결정되지 않았던 시대의 여러 왕자들 중의 하나였던 노인 시라카베 왕자. 그 당시 입 한번 벙긋 잘못 놀려 폐왕자 되는 자도 있었다.

그러기에 늙은 시라카베 왕자는 애꿎은 화를 피하느라 때로는 고의로 무능한 술주정뱅이 처신을 하며 남 모르게 행방을 숨겼고, 고심참담하게 이리저리 몸을 사려 용케도 재앙을 면하여 끝내 옥좌에 올랐다.

시라카베(제49대 고닌일왕)가 왕자 시절에 다카노노 니가사 왕후와 결혼한 후, 둘 사이에 첫 왕자 야마베(山部·뒷날의 제50대 간무일왕) 왕자가 태어난 것은 서기 737년. 그러기에 아버지 고닌일왕이 등극했을 때 야마베 왕자는 이미 그 나이 34세의 청년이었다.

이 당시 어머니 화신립 왕후는 50세 전후였다고 본다. 화신립 왕후는 뒷날, 아들 간무일왕이 등극한 후 8년째였던 서기 7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라카베 왕자는 770년 10월에 일왕 자리에 등극하자 서넛을 헤아리던 왕자비들 중에서 가장 나이든 화신립 왕후가 아닌 가장 나이 젊은 이노우에(井上·생년미상∼775) 공주를 첫 번째 왕후 자리에 앉혔다.

이 당시 이노우에 공주는 고닌일왕과의 사이에 11살짜리 왕자인 오사베친왕(他戶親王·759∼775)이 있었다. 최초의 왕후가 된 젊은 이노우에 공주는 제45대 쇼무(聖武·724∼749 재위) 일왕의 공주였다.

왕실에서의 근친결혼은 다반사였다. 일왕이나 왕자도 여러 비빈을 거느렸던 것은 한국 왕실과 진배없다. 고닌일왕이 등극한 이듬해인 서기 771년 1월에 이노우에 공주의 몸에서 태어난 오사베왕자(당시 12살)가 여러 왕자 형들을 물리치고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후 이노우에 공주는 황실 여인천하의 독부였다. 젊은 왕후는 고닌일왕의 손위 친누이 나니와(難波) 공주를 저주하며 남몰래 그녀를 암살하는 끔찍한 살인사건을 저질렀다.

야마베 왕자(간무일왕)의 친고모인 나니와 공주는 34세의 친조카 야마베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오래도록 고닌일왕과 조신들에게 강력하게 밀어댔던 것.

이에 반감을 품었던 이노우에 왕후는 자신의 친쇼무일왕계 세력과 손잡고 늙은 남편 고닌일왕을 닦달하며 제 어린 아들을 끝내 왕세자로 책봉시켰다. 그러나 고닌 일왕의 옹립자였던 조신 후지와라노 모모카와(藤原百川·732∼779) 참의(參議) 세력은 이노우에 왕후가 나니와 공주를 저주하여 살해한 흑막을 끈질기게 파헤쳐 끝내 그녀의 죄상을 밝혀냈다.

실은 이노우에 왕후는 남편 고닌 일왕마저 저주하다가 서기 772년 3월에 폐위되었고, 다시 5월에는 왕세자 오사베 왕자도 어미의 대역사건에 연좌되어 폐서인되었다.

이들 죄인 모자는 773년에 멀리 우치군(宇智郡)으로 유배되었다가 775년의 똑같은 날 동시에 죽었다(독살설). 772년 5월 왕세자를 폐서인한 조정에서는 곧 35세의 야마베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함으로써 이노우에 왕후에게 곤혹스럽게 시달려 왔던 화신립 왕후에게 마침내 새빛이 비쳤다.

끝으로 간략하게 부기하자면 간무일왕의 생부 고닌일왕(袋草子·1156∼58)도 백제인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