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C까 반성문]JBC까의 우파 분열
[JBC까 반성문]JBC까의 우파 분열
  • JBC까
  • 승인 2019.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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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론 밑바탕에는 ‘자유대한민국’이 있다
탄핵 찬성세력에 대한 증오만이 자리 잡아

 

날이 갈수록 선한 한국인 모습에서 섬뜩함이 보인다. 내가 나를 바라보아도 그렇다. 이를 바라보니 걱정도 되고, 한편으론 두렵기도 하다.

사람들의 칼 같은 날카로움은 이제 일상의 표출이다. 인간의 근본이 파괴된지 오래다. 진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거짓과 날조된 왜곡, 증오와 분노 그리고 이글거리는 그 공격적 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거 같다.

나는 특정 주제로 글을 썼거나, 혹은 JBC까 방송을 하고 나서 반성을 한 적이 한 두 번 아니다.

내가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았는지, 나는 그 판단의 잣대에 독자와 애청자들을 끌어들여 독선을 주입시키지 않았는지 뒤돌아본다.

또 오직 '문재인 퇴진', '박근혜 대통령 탄핵무효'와 '석방'이라는 그 우선적 가치에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를 매몰시키려 하지 않았는지 반문도 해본다.

나는 이것을 우리끼리의 공감으로 보았다. 나의 이 주장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또다른 논리에 빠진 사람일게다.

이를 떠나서 이 공감이 과연 올바른 공감인지, 아니면 나의 사견 합리화를 위한 형성된 공감을 희생양 삼지 않았는지 돌이켜 본다.

사실 나의 공감론 밑바탕에는 자유대한민국이 있다. 이 자유대한은 그 어떤 절대적 가치와도 바꿀 수 없다. 공감의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도 분명 있다. 같은 우파끼리도 형성된 공감의 틀과 방향성이 각각 다르다.

어쩜 이것이 모두의 착각과 무지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우리는 가슴보다 머리를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도덕의 영역에서는 이성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공감, 분노, 혐오, 사랑과 같은 직감에 따라 결정된다. 숙고나 추론과 무관하다.

그런데 제기랄 나와 당신의 공감은 '탄핵'의 공감에서 출발하고 있다. 탄핵 찬성자들은 이 공감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공감의 배신이다.

그래서 일각에서 말하는 ‘JBC까가 우파 분열 방송이다는 지적에 대해 고개가 숙여진다.

인간은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관조하는 사고방식, 세상에 대한 비유, 고정관념 등이 각각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 이것의 공통적인 인식이 모아지면 공감이 된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판단 잣대가 탄핵 정국 이후 저만치 가버렸다. 오늘날, 한국이 정치, 경제, 외교, 사회 전반에 걸쳐 대재앙을 맞은 것은 박 대통령에 가해진 탄핵에서 비롯됐다.

만약 탄핵이 없었다면, 또 당시 박근혜 대통령 피를 빨아서 당선된 새누리당 62명이 탄핵에 동조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문재인도, 조국도, 또 우리공화당도, 태극기 시민단체도 없었다.

각종 집회도 없이 추석의 일상, 가족들과 오손도손 추석을 보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탄핵이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탄핵을 지지하는 자들을 보면 주관적 분노자로 돌변해버린다. 그들을 향해 내던져지는 증오의 눈빛이 살벌하다. 나는 탄핵 찬성자들과는 그 어떤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이제 그들이 덮고 가잖다. 사람 죽여놓고 없던 걸로 하자는 이치다. 속된 말로 죽을 때까지 패고 또 패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그들 입장에선 나의 이런 과격함과 주장이 독선이요 노골적 천박함을 드러낸 것으로 볼 것이다. 이 노골적 천박한 앞에서 이성과 논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개념인가

나는 반문해본다. 나의 귀가 열렸을까? 증오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도, 가슴깊이 박힌 탄핵 찬성세력에 대한 증오만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방송을 통해 착하고 선한 사람의 의식에 과장된 감정을 낳게 하고, 그 감정은 독선과 아집이 되어 상대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솔직히 나는 지금도 보수 우파가 낯설다. 먹고 살기 바쁜데 뭔 보수냐. 그 보수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당신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한국에서 보수 우파가  뭔가. 그 개념과 정의가 궁금하다.

한국과 서구 사회의 보수 우파는 그 결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우파의 기준은 반 문재인 정서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부정하는 자, 그리고 석방을 외치는 자여야만 하는가.

특정 이슈가 보수 우파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어느 정당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진짜우파’, ‘가짜우파로 나눈다. 인간과 사회의 보편적 진리가 아닌 이런 기준으로 나누는 게 너무 엿같다

예컨대, 우리공화당을 지지하면 진짜우파라 하고,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을 지지하면 가짜우파라 한다. 물론 이런 각 정당 지지자들은 이런 등식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만 너 편, 내 편 선 긋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것을 지켜보면서 한국서 과연 보수 우파가 무엇인지 그 개념과 정의론이 헷갈리고 어리둥절 하다박근혜 대통령 석방과 탄핵무효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수 우파가 불러야 하는가.

한국 보수 우파의 특징은 이익 중심, 선과 악의 판단이 아닌 어느 쪽이 이익인가를 먼저 판단하는 기회의주의, 황금만능주의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이것은 오직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사악한 이기주의다. 스웨덴 출신 경제학자 뮈르달(1898. 12. 6. ~ 1987. 5. 17.)은 "그 현실주의로부터 이익을 보고 있는 세력이 보수주의 세력이다고 밝혔다.

또 우파의 적은 누구일까. 우파에 있었다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한 적이다. 이 말은 우파의 적이 바로 우파라는 말이다. 덧붙이면 좌파들에게 있어서도 좌파의 적은 좌파다. 우파의 적인, 우파는 좌파의 적인 좌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그 차이가 있다. 이 좌파들은 이념과 조직의 발전을 놓고 끊임없이 상호 보완을 해왔다.

우파는 치열한 논쟁이 없다. 치열한 비방과 비난만 있을 뿐이다좌파는 논리적 싸움을 즐긴다. 반면, 우파는 상대와 생각이 다르면 아주 비방한다. 또 온정주의가 강하다.

지금의 형국은 체제전쟁이다. 그 순수하고 이성적인 감성을 들어내어야만 한다. 그 온정주의와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 너그러움도 걷어차야 한다. 거만하고 오만하고, 잘 난 척 태도를 버리고, 안주함과 나태함은 태워버려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먹고 살 때 생길 수 있는 한가한 인간성 표출이자 도덕 윤리적 행위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죽고 사는문제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냐, 민중민주주의냐를 놓고 대결중이다.

문재인 좌파 독재정권과 김정은의 합작 사회주의에서 살 것인가,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자유시장경제에서 살 것인가. 지금은 체제논쟁중이 아니다. 전쟁 중이다.

이 자리에 치열함과 독함을 채워 넣어야 한다. 근본 문제에 대한 접근과 그 접근 방식을 놓고 왜 피 터지는 논쟁을 해야만 하는 이유다.

좌파들은 자신들을 단단한 강철로 단련시킨다. 지금 문재인 정권을 포섭해 있는 주사파들은 바로 80년대부터 이 강철로 다듬어지고, 단련된 자들이다. 모래성 같은 우파가 이런 강철 같은 주사파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착각이다.

우파들은 이런 좌파들의 정신과 이념적 무장을 너무나 모르고 무시해버린다. 우파는 우파의 시각에서만 세상을 바라본다.

나약하고, -온탕적 사고에 젖어 있고, 이로 인한 이성과 감성의 롤로코스터를 탈 뿐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선의, 이해가 체제를 이기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가족주의적이고, SNS로 단합이 잘되는 친목적인 조직이 체제 승리를 안겨다 주는 것도 아니다.

1차 체제전쟁에 승리한 좌파 문재인 정권이 도대체 대한민국을 어디로 이끌고 가는 것일까. 지금 진행되고 있는 2차 체제변화에서 문 좌파 정권은 북한 김정은과 어떤 음모를 그릴 것인가. 이에 따른 경계와 우려만 할 따름이지 근본적인 질문과 논쟁도 없다.

한 시대에 따라 그 정권을 바라볼 때, 어느 변화가 중요하고, 어느 변화가 덜 중요하지 않다. 그 변화의 징후를 예측하고 거기에 따른 대비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책조차 없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조국 사건만 봐도 그렇다.

한 특정 사안에 대해 논리적으로 경합하는 대신 서로가 자기 말이 옳다는 노골적 천박함을 드러낸다. 이 우격다짐 천박함 앞에서 이성과 논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개념인가. 특정 사안을 깠다. 그런데 깠다고 난리다. 대안을 제시했다. 그 다음은 침묵이다. 말을 해도, 글을 썼지만 외면당한다. 

우파는 목소리가 큰 사람과 증오와 분노가 더 심한 사람이 이긴다. 그 논쟁에 없었는데도 목소리 큰 자들의 주장이 맞겠지 동조 한다.

그게 아니다. 목소리가 작은 그 사람의 주장이 맞다’”고 말하는 것이 나를 무시한다고 오인한다.

혁명의 기운이 전 유럽을 휩쓸던 19세기 말~ 20세기 중반. 혁명을 목표로 투쟁을 하던 운동가들이 스스로의 엄격한 도덕성을 다짐하기 위해 만든 용어와 방법론이 있다. '자아비판'이다.

말 그대로 스스로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다. 혁명가가 세 치 혀를 통한 선동과 카리스마만으로 움직인다면 너무도 쉽게 타락할 수 있다.

말로만 정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언행이 일치하도록 뜨겁게 살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자아비판이다.

전체주의 체제에서 자아비판이 상대를 걸고 넘어지는 정치투쟁의 장이 되는 변질로 확산되었지만 이 자아비판은 동지들을 심판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마음가짐으로 들어 주고 함께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보수는 이런 자아비판에 대해 귀가 열렸을까? 자아비판을 했다가는 날벼락 당하기 일쑤다. 상대를 비판만 하면 너나 잘해라고 질식시킨다. 왜 못 믿느냐고 되레, 윽박지른다. 지금 내가 딱 그 꼴이다

왜 좌파가 정권을 잡았고, 체제전쟁에서 우파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지 그 이유가 짐작된다.

문재인 정권의 좌파 지형이 바뀐 것이 아니다.이들의 혁명적 노선은 똑같다. 그동안 우파는 그 지형과 방향을 제대로 예측했는가. 우파의 감성주의와 천박함, 배척주의와 우리끼리의 공감이 스스로 눈을 닫게 해버렸다. 우파는 우리의 덫에 갇히고 말았다.  

지난 9일 문재인은 조국을 임명했다. 전국민에게 좌파의 이중성과 위선 사악함을 보여준 임명이다. 국민은 들끊고 있다. 우파는 그 분노의 공감을 하나로 엮지 못하고 있다. 하늘이 준 이 라스트 찬스를 놓칠까 걱정이다.

이 기회조차 불씨를 살리지 못하는 우파가 문 좌파독재와 싸워서 승리하겠다고. 문재인 퇴진과 박근혜 대통령 석방만 목놓아 질러대면 자유민주주의가 지켜지고, 석방된다고 믿는가.  

3년이 다가온다. 이제 그 막연한 승리의 환상에서 깨어나길 바랄 뿐이다. 사회운동은 과학이다. 물은 99도에서 절대 끊지 않는다. 100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