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길남 미스터리 6탄. 유학 의혹
노길남 미스터리 6탄. 유학 의혹
  • JBC까
  • 승인 201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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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73학번인가, 74학번인가

 

노길남 김일성 대학 박사학위 받을때, 오른쪽이  아내

문화 간첩 노길남(71·미국 LA거주)씨의 인생 스토리는 의혹 투성이다. 재미교포들 사이에선 온갖 의혹으로 가득찬 노길남 그 자체가 종북 좌파의 실체라는 지적이다.

특히 노길남이가 운영하는 ‘민족통신’은 리퍼트 미국 대사 피습사건을 일으킨 김기종에 대해 “윤봉길·안중근 같은 열렬 애국자”라고 추켜 세워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민족통신의 이같은 글은 북한이 주장하는 연관선상이다.

연세대 영자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미 8군 ‘성조지 ’기자였다 밝힌 그는 왜 그토록 미국에 대해 적대적 관계를 보이는 것일까. 가장 미국의 혜택을 많이 받은 그가 “미군철수”니 “미제국주의 물러나야 한다”고 외치는 그 자체가 이중성의 극치라는 지적이다. 그는 그토록 증오하는 미국을 어떻게 갔을까.

그는 민족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으로 유학 온 배경과 미국 시민권을 갖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답변1>

“사실은 ‘도망성 유학’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20대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에 우리세대는 깜깜할 정도로 답답하여 복통이 터질것 같은 시대였습니다. 긴급조치 몇호다 하여 다방이나 공공장소에서 박정희 비판도 못하고 아예 정치이야기를 할 때에는 좌우 앞뒤를 둘러보고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망성 유학’길을 택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이 있는 동안 공부나 하고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미국에 왔는데 그 정권이 끝나지도 않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할 경제사정도 되지 않고하여 졸업후 대학후배가 미주한국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는 바람에 로스엔젤레스 한국일보에 첫 직장을 갖고 생활하다가(1976.9~1978) 6개월만에 영주권도 받고 그 이후 5년이 넘어 미국시민권으로 국적을 바꾸고 이른바 ‘재미동포’가 되었습니다. ”

<답변 2>

“제처는 미국유학오기 1년전에 결혼하여 임신 6개월이 된 것을 보고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1973년에는 가족이 함께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유학생이 학교에 등록하고 한학기 다녔다는 기록이나 증명이 있어야 6개월 후에 올수 있었던 시절이고, 유학도 그 당시에는 유학시험을 쳐서 합격해야 유학이 가능했던 시절입니다. 제 큰애 진이는 제가 택사스주립대학 대학원 한학기를 마치던 시기인 1974년 여름에 제 처가 안고 미국에 왔고···”

#긴급조치 피해 유학

노길남은 유신시대 긴급조치를 피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연도과 맞지 않다. 긴급조치 1호는 1974년 1월 발효된 법이다. 노길남 말대로라면 그는 197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면 긴급조치와 그는 관계가 없다. 그땐 노길남이는 자기 말대로라면 미국에서 텍사스 주립대학원 1학년 2학기 재학중이어야 맞다. 그래서 도망성 유학을 택했다? 이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대학원 몇학번인가

그렇다면 그의 포괄적 주장을 인정하고 1974년 긴급조치 이후에 유학을 갔다고 백보 양보를 하자. 1974년 9월에 미국서 1학기 수업을 들었을텐데 그렇다면 노길남의 ‘답변2’는 “제 큰애 진이는 제가 택사스주립대학 대학원 한학기를 마치던 시기인 1974년 여름에 제 처가 안고 미국에 왔고”는 몽땅 허위다. 이를 근거로 따질 때 노길남은 텍사스 주립대 73학번 74학번 인가.

#영주권 의혹

“영주권이 입사 6개월 후에 바로 나왔다” 유학 비자로 체류 한건 영주권 발권시 인정 안하는 체류기간 이다. 취업비자 받고 6개월 만에 영주권 받았다고 하는 말인데 여기서 또 넌 센스가 있다. 이는 노길남이 모친을 따라 미국에 초청받아 갔을 가능성이 높다. 재미교포들은 가족 초청 이민 아니면 미국 입국 후에 바로 영주권이 나오지 않는다.

다른 비자로 들어와서 영주권을 미국서 받는 건 빨라야 3년, 길면 10년~20년 그렇게 걸린다는 게 재미동포의 주장이다.

#미국 고학

“미국에 와서 고학하며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 대목도 미국 유학생은 재학중에 아르바이트나 직업을 구하는게 금지 사항이다. 워크 퍼밋(노동허가증)이 없고 장학금도 제한적이다.

교민들이 모아서 주는 장학금이면 몰라도, 그러나 이것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유학생들 몰래 편의점이나 가게서 일을 한다. 가게 주인들은 워크 퍼밋이 없는 약점을 이용해서 최저 임금으로 주고 부려 먹는 게 다반사였다.

그 돈을 가지고 미국 대학원에 고학으로 공부 했다는 것은 말 자체가 불법이다. 미국 대학원 학비가 아무리 적어도 1만불(1천만원) 가까이는 된다. 그 돈을 독학으로 해서 충당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 스폰서를 해주었다는 까닭이다.

나아가 미국에서 대학원 고학으로 가능를 하려면 영주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학자금 융자나 주 정부에서 주는 Grant (무상)으로 1만불 지원 받고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또 각종 장학금을 수여 받으면 된다. 공부 조금만 하면 50% 이상 장학금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게 당시 미국대학원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그런데도 노길남은 이런 저런 과정을 다 뛰어넘고 독학으로 공부를 했다는 것은 참으로 낭만적인 답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