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C까]진짜보수와 위장보수 구분법
[JBC까]진짜보수와 위장보수 구분법
  • JBC
  • 승인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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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보수정치인들은 “나는 보수 정치인이다”라고 자랑스럽게 말을 못하는가.
유승민이 보수통합 조건으로 들고나온 개혁보수는 보수의 돌연변이 변종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보수가 마치 구시대 상품처럼 취급당한다.

보수가 이런 구악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문재인 좌파 독재정권이 들어선 후 보수궤멸론을 부르짖을 때부터 예고됐었다.

그러나 이 보수궤멸론이 문 뻥 정권 때문일까.

보수궤멸론은 반대로 진보주의 내지 민중민주주의를 꽃피우겠다는 것이다 

문 뻥 정권이 이런 보수 궤멸주의를 들고 나왔을 때, 지금의 야당은 이 보수의 정치를 꽃을 피울 생각은 않고 오히려 더 시들게 했다.

보수 정치인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서자 홍길동도 아닌데, 왜 그들은 나는 보수 정치인이다라고 자랑스럽게 말을 못하는가.

최근 유승민은 개혁보수론을 들고 나왔다. 유승민은 이 개혁보수론을 통합의 3대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 뿐만 아니라 최근 정치권과 언론에선 개혁보수란 말을 부쩍 많이 사용한다.

도대체 그가 주창한 개혁보수가 무엇일까. 개혁보수의 가치가 평등, 공정, 정의라고 한다. 이것은 보수주의 정신이 애당초 지향했던 가치였다.

보수가 몰락하면서 보수의 혁신과 새로운 보수에 대한 갈망은 이제 국민 전체의 관심사가 되었다. 1950년대 초 미국도 보수의 몰락을 겪었다. 미국의 보수는 정치인이 나서서 '개혁'이니 '혁신'이니 그 따위 말장난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정치인이 아닌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

미국의 사상가 러셀 커크(1918-1994)는 자신이 쓴 '보수의 정신'에서 인간이 지향해야할 보수의 가치에 대해 연구했다 '위대한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에서 시작해 토크빌, 프로스트, 엘리엇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정신적 전통을 종합함으로써 보수를 정치나 경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의 지적 세계관 또는 라이프스타일로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커크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는 변화에 신중함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사회는 미묘하고 복잡한 실체이므로 한꺼번에 바꾸는 것보다 주의를 기울여 천천히 바꾸어갈 때 좋은 결과를 얻는다.

이러한 신념 아래 보수주의자는 아래의 10가지 원칙을 좇아서 행동한다.

'불변의 도덕적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널리 오랫동안 합의된 지혜를 중시한다.' '규범을 존중한다.' '신중함에 따라 행동한다.' '다양성을 중시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스스로 절제한다.' '자유와 재산권이 연관 있다고 확신한다.' '자발적 공동체를 지지하고 강제적 집산주의에 반대한다.' '인간의 격정과 권력을 자제할 필요를 인지한다.' '활력 넘치는 사회라면 영속성과 변화를 조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 보수는 어떻게 비쳐져 있는가. 절제를 모르는 부패 보수, 초법적 행위를 일삼는 갑질 보수, 권력을 남용하는 농단 보수, 변화를 부정하는 수구 보수 등이 기억될 뿐이다.

이러한 보수를 청산할 보수의 새로운 주체를 모두가 기다린다. 그런데 유승민이 느닷없이 개혁보수를 들고 나왔다. 유승민이 보수의 사상가 쯤 되는 인간인가. 그는 배신과 역적의 대명사 정치인에 불과하다.

보수의 피를 빨면서 정치를 해온 유승민이 온갖 특혜와 반칙은 다 누려왔다. 그런 유승민은 박 대통령 탄핵 이후 배신의 배에 올라타면서 개혁보수를 외치고 있다.

유승민이 외치는 개혁보수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말장난이다. 이것을 통해 자신의 이중성을 합리화하고 있다. 유승민은 차라리 사회주의로의 개종을 선언하는 것이 마땅하다.

유승민이 보수우파 통합의 3대 조건 속에 개혁보수 카드를 넣었다. 황교안 대표는 개혁보수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것 같다.

황 대표도 어느 날부터 보수를 헐뜯고 바꾸어야 할 구악쯤으로 여기고 있다. 도대체 보수라는 제도가 무엇이 문제인가. 제도가 문제가 아닌 보수라 자처하는 유승민 같은 인간이 문제다. 마치 보수란 제도가 문제인 양 오도한다.

여기에 동참하는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은 어떻는가. 야합과 권력의 하이에나가 됐다.  순수 보수층을 현혹시키고 있다속임수로 국민을 속이고 있다. 그 잘난척 하고 거만하고 오만한 태세다.

탓,탓,탓에 길들여진 그들, 이권의 불나방이 된 그들, 권력의 똥개가 된 개들. , 배신을 밥 먹듯이 한 그들, 거만함이 하늘을 찌를 듯한 그들을 보면서 왜 좌파가 정권을 탈취했는지 이해된다.

왜 좌파가 보수궤멸론을 외치면서 동시에 20, 100년 장기집권 플랜을 짜는지도 짐작된다.

이들 보수 정치인만 그런가. 보수 우파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감성과 안주함에 머물러 있다. 치열함도 보이지 않는다. 또 근본 문제에 대한 접근과 그 접근 방식을 놓고 논쟁마저 피해버린다.

문재인 좌파 정권은 도대체 대한민국을 어디로 이끌고 가는 것일까. 그래서 이 정권은 세상을 어떻게 변화 시킬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논쟁도 없다.

그저, ‘문재인 하야퇴진’, 탄핵을 외칠 뿐이다.

한 시대에 따라 그 정권을 바라볼 때, 어느 변화가 중요하고, 어느 변화가 덜 중요하지 않다. 그 변화의 징후를 예측하고 거기에 따른 대비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책조차 없다.

보수의 현실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허무주의, 잘난주의, 안주함. 어쩜 그렇게 보수 정치인이 갖고 있는 이런 저런 보수의 모순과 일치가 되는지 기막힐 뿐이다.

세상은 하나의 절대적 가치와 선이 없다. 그 물체에 대한 모순 또는 대립이 근본 원리 속에 있다. 그런데도 일방의 선택과 방향만 강조한다.

보수끼리 선의가 밥 먹여 주는 것이 아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문제는 정치적 호불호나 이념적 취향과 관계없이 성숙한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하다.

논리적으로 경합하거나 학문적 성취도로 승부를 거는 대신 서로 자기말만 옳다는 노골적 천박함을 드러낸다. 이 노골적 천박한 앞에서 이성과 논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개념인가.

보수층에선 목소리가 큰 사람과 증오와 분노가 더 심한 사람이 이기는 사회가 되었다. 나는 그 논쟁에 없었는데도 이를 보고 짐작으로 그 사람의 주장이 맞겠지 동조 한다.

오히려 그게 아니라 저 나약한 사람의 주장이 맞다고 말하는 것이 상대에겐 더 야만적이다. 늘 부정확한 선동과 자극이 정확한 증거의 상위에 있다.

지식으로 얻어진 기억, 행동으로 얻어진 확신. 그런데 정작 이를 무너뜨릴 이론이 없다. 사실을 입증하지 못한다.

보수는 귀가 열렸을까? 잔혹함이 합리를 짓누르고 있다. 착하고 선한 사람의 의식에 과장된 감정을 낳게 하고, 그 감정은 독선과 아집이 되어 상대에게 피해를 준다.

가짜들이 말하는 것은 진짜 사실보다 더 정확하다고 아우성이다. 이들의 가짜 경험은 검증 속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학습과 공부를 통해 본 것이 아니다.

가설에 대한 사실을 입증하려면 되레 나를 못믿느냐고함부터 지른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직업적 원칙과 도덕적 코드 사이에 사실과 어긋남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비판이 두려워 입을 닫는다.

질문만 있고 문제 제기만 있고 답이 없다. 그 대안이 없는 상황은 답답하다. 질문이 어려워 대답 못하는 경우가 있다. 훗날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을 때 보수 우파는 한층 성장되어 있을 것이다.

보수는 새로운 것에 대해 호기심보다 익숙한 것에 대한 편안함에 더 안주했다.

권력은 정신과 일상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굴종하게 만든다. 일상생활의 미세한 국면에 까지 지배력을 행사케 한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추상적 사고와는 달리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생활양식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문재인 좌파의 독재가 발붙이는 사회적 기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권력이 위로부터 주입한 지배 이데올로기가가 관철되는 내적 식민지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좌파독재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과거 독재에선 침묵했던 인간의 이율 배반성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 진영은 진보가 이식한 민족주의 감정적 선동 앞에서 맥을 못추고 있다.

이것을 먹고 자란 문재인 정권의 좌파주의는 시퍼렇게 살아 있다. 앞으로도 더욱 악랄함을 더할 것이다.

어찌보면 문재인 정권의 좌파 지형이 바뀐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 지형을 잘못 읽은 측면도 있다. 그 밑에는 이념적 당위에 천착함으로써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미국이 문재인 정권을 없애줄 것이란 헛된 기대가 있었다.

정작 큰 문제는 공산주의 사상을 떠받치고 있는 한국사회다. 자신들이 절대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는 착각하는 좌파들의 정의의 비정의성, 도덕의 비도덕성, 진실의 거짓적 행위 등이 우위로 자리 잡았다.

유승민 등 탄핵 세력 보수는 이런 좌파들 달리는 말에 교묘히 올라 탄 후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보수통합을 가장한 야합의 논리로 자신들의 정체를 보일락 말락 하면서 국민들은 이에 잠식당하고 있다. 이런 현혹한 쇼에 사람들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탄핵의 늪에서 빠져나오자. ‘탄핵을 묻고 가자’. ‘탄핵의 강을 건너자면서 배신과 공모와 주범끼리 카르텔을 형성시키고 있다.

보수안에 적이 있다. 적 안에도 우리가 있다. 또한 적의 적도 적일 수 있다는 그 판단을 흐려지게 하고 있다.

이것에 속지 말아야 하는 데 보수의 적들이 교란을 시키고 속도로 유도하고 있다. 차기 총선에서 보수가 승리해서 문재인 좌파 독재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지형도를 더욱 세차게 그리려 한다.

과거 우리의 대립이 독재와 민주, 자본과 노동, 제국과 민족, 평화와 자유, 미국과 북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이분법은 문재인 좌파 독재 대 박근혜 자유 정의의 구도다. 또 보수 우파들도 탄핵세력대 탄핵 반대 세력, 위장보수 대 진성보수, 기회주의 보수와 원칙주의 보수간 이분법으로 나열되고 있다.

그 이분법에서 당신이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투쟁의 대상이 명확해지고, 또 가야할 방향도 알 수 있다. 그 방향에서 동지들이 모아지고 비로서 하나의 우파 투쟁 대열을 형성시킬 수 있다.

지금은 그 때가 아니다. 아직 위장 보수들의 윤곽이 덜 드러났다. 곧 개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