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C 역설 ]박근혜 대법원 판결, 역설로 판결하다
[JBC 역설 ]박근혜 대법원 판결, 역설로 판결하다
  • JBC까
  • 승인 201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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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한 국민들, 대법원 판결에 분통 눈물
그들이 왜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법치 파괴의 고통
문재인 좌파 독재, 사법부 장악, 뻔한 판결, 뻔한 결과

28일 대한민국의 선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대법원이 박근혜 대통령 국가정보원 특활비 사건에 대해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이 같은 결정은 결국 형을 확정짓지 않고 박 대통령의 사면조차도 막아버린 꼴이다. 지난 2016년 탄핵 정국 이후 대한민국 보통의 사람들은 늘 고통속에 살고 있다.

이는 문재인 좌파 독재 정권이 들어선 후 당하는 고통일 수 있지만 그보다 아무런 죄가 없는 박 대통령은 973(28일 현재)까지 인신감금 시킨 것에 대해 울분이 고통으로 굳어져 버렸다. 고통 없는 삶과 세계는 현실일 수 없다. 고통 자체는 아직 문제가 아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왜 자신이 당해야만 하는지 모르는 고통. 무엇보다 고통을 일으킨 그 원인을 찾았지만 그 고통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은 큰 문제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설명되지 않는 고통은 혼돈을 야기한다. 선한 국민들에게 왜 고통이 닥쳤을까. 착하게 살아왔는데도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국민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가라는 그 물음의 외침에 답할 수 없는 것이 문제다.

국민들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국민을 괴롭힌 것은 좌파의 시퍼런 칼이었다. 대한민국 자유와 정통성의 파괴였다.

이것은 신체에 가해진 고문의 고통이 아니다. 누구나 그 고통의 이유를 모르면, 납득하지 못하면,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면, 정당화되지 않으면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국민들은 착하게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불행하다. 이것이 착하게 산 자들의 인생인가. 왜 이들은 대한민국이 무너지는 그 고통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은 항상 양면이 존재한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밤이 있으면 낮이 있다. 음양조화가 세상의 이치다.

진실이 있으면 거짓도 존재 하는 게 세상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양면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만약 어떤 이가 진실을 알고 있는데도 목적이나 이익에 부합되어 그 진실에 눈감아 버린다면 그 속에서 파묻혀 버린 진실은 얼마나 안타까울까.

진실을 가두는 사람들은 분명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진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진실이 파묻혀 지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박 대통령에 대한 대법원 파기환송도 그렇다. 이들은 어쩜, 진실이 묻히기만을 바란 것 같다. 파기환송을 통해 진실을 전가시키고 회피했다. 책임을 지지 않고, 그 책임의 전가와 회피를 통해 마치 진실의 판결을 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은 진실 합리화의 극치다.

진실은 멀리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런 판결은 법의 미명하에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자기가 느끼고 말하고 싶은 것만 강조한다. 이것은 법의 합리화를 위한 진실 왜곡이다.

법의 합리화는 악법도 법이다는 논리로 거짓도 진실로 둔갑시킨다. 남 탓을 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잘못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날 판결을 한 대법원 2부 김상환 대법관은 실정법을 위반한 자다. 탈법을 저질렀다. 이런 범법자가 법을 잣대 한다.

이런 자에게 대법관은 헌법과 법률을 수호하고 판단하는 법치의 최후 보루다. 당연히 어느 공직보다 더 높은 도덕성과 준법 의식이 요구된다고 이야기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식의 인생을 산 자들의 경우 대부분 자기합리화 틀에 갇혀서 때론 진실을 왜곡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과거의 사건을 활용하고, 왜곡하고, 그 결과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 저울질을 해댄다. 그러기 위해선 거짓을 해야만 하는데 문제는 인간은 자신의 거짓말에 최면이 걸린다. 그 거짓을 진실 인 것으로 믿게 되는 경향이다.

내가 지난 3년 간 박 대통령 사건을 취재하면서 제일 역겨웠던 것은 모두가 진실을 외쳤다.그런데 좋습니다. 진실로 가봅시다고 하면 그땐 진실외침의 꼬리를 살며시 내렸던 점이다.

이것은 진실은 가볍게 보고 마치 진실을 프레임화 시키려는 의도다. 진실을 프레임 속에 가두어 버리면 인간은 환상과 현상을 보고 웃고 즐기는 형이 되면서 매우 심각한 불안에 휩싸일 수 있다.

주위의 많은 만류를 뒤로하고 내가 박 대통령 취재를 했던 것은 진실을 외면 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에 역행 할 수 없었다. 또 심각한 불안에 대한 정면대응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거짓을 진실이라 하면 그 사실은 진실이 되어 우리사회에 만연해 진다. 그 진실에 귀를 막고 생각까지 닫고 다수의 의견이 진실로 거듭나는 세상. 하나의 타깃을 목표삼아 이성을 마비시키고 미친 듯 달려드는 마녀사냥식의 좀비 같은 세상.

그런 세상의 중심에는 항상 프레임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프레임속에 살고 있다. 박 대통령 판결은 프레임에 빠진 전형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현상만을 봄으로써 마치 현상이 본질에 우선한다는 프레임에 빠져버렸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 프레임 속에 갇혀서 스스로의 사고가 고착화 되어 이미 다른 사람의 프레임은 보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수가 판을 치는 사회 그 속에서 반기를 들면 마치 사회역행자의 눈총을 우려해 자신의 사고를 포기해 버린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정의의 시대라고 한다. 그 반면 정의를 상실한 시대이기도 하다. 반대를 위한 반대 대중의 눈치를 보는 찬성. 이런 모든 것들은 정의라는 미명하에 집단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 집단의 프레임이 개인의 맹목적인 추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건을 바라보는 개인들의 감정이 모여 프레임을 고착시키고 그 프레임에 눈치보며 집단들은 진실을 왜곡 외면 하는 것인가.

그러한 상황에서 현상에 집착하다 보면 사람들은 깊은 타성에 빠져들게 되며, 헤어 나오지 못한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박근혜 판결에서 생각과 진실을 가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가장 진실과 정의를 외쳤던 그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모든 것에 대한 해명과 책임은 오로지 그들이 져야 한다. 이제 그들이 그 진실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 설명은 나의 생각을 프레임에 가두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빙자한 거짓은 진실을 가둘 수 없다. 자신에 대해 제기된 모든 의혹과 상황들에 대해 완벽히 해명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실은 해명이 아니다. 진실은 각자 증명을 해야 한다. 그 진실에 대한 입증 책임을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프레임이다.

분노와 증오 거기서 나오는 진실이란 단어가 낯설어 보였다.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 그저 현상 속에만 그들은 진실을 외치고 있었다.

나의 펜은 꺾이지 않는다. 추접하고 역겹움으로 인해 그 펜을 잠시 내려놓았을 뿐이다.

결국 객관적 시각이란 당신과 내가 아닌 즉 이해 당사자가 아니여서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시각을 말한다. 하지만, 객관적인 시각의 기준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옳다”, “그르다고 생각하는 기준인가.

집단 이기주의와 조작에 의해 옳다는 기준이 세워졌다면 그것이 객관적 기준인가. 스스로가 바라보는 시각이 사회적으로 기준이 될 만한 것인가? 주관적인게 집단으로 모여 의미있는 형태를 띈다면 객관적인 된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 기준일 수 밖에 없다. 흔히 객관적으로 봤을 때라는 말은 모두를 설득하기 위한 술수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을 말할 때 객관적인 시각에서 혹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러이러하다고 표현을 하곤 한다. 그런데, 객관적인 시각이나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사기탄핵을 당했고, 체제전쟁의 희생자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런 일상의 주장과 거리가 멀었다. 법치도 맞지 않았다.

흔히들 좌파 쿠데타적 관점에서 박 대통령 사건을 볼 경우 왜 탄핵당하고 구속됐는지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잃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국민들이 박 대통령을 마녀살인식으로 했다면 객관적 시각은 사라져버린다.

여론이든 아니든 판결은 그 여론의 객관적 사실로 굳어져 버린다. 여기에 언론보도가 보태어져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프레임에 갇히는 구조다.

그동안 박 대통령의 재판은 이런 관점의 되풀이였다. 그러나 나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이 사건에 대해 나만의 시각을 점점 드러낼 것이다.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하는 주관적인 시각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또 완전하게 이성적일 수 없다. 반드시 자기 신념에 관계한 가치판단이 선행되며 그에 따라 세계를 보는 시각과 행동이 나타난다.

물론 인간에게 이성이 있고 논리에 따라 생각할 수 있는 게 있다. 그러나 그걸 너무 높게 쳐서 정말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대로 타인을 바꾸고 싶어 하는데, 논리로 들이대서는 사실 사람이 절대로 안 바뀐다.

사람이란 무척이나 감정적인 동물이다. 좀 바꿔서 말하면, 논리로 사람이 움직인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 논리가 감정을 움직였기 때문에 사람이 바뀐다는 말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명제는 그 명제 자체가 자신을 부정한다. 진리가 없기 위해서는 진리가 없다는 그 말도 진리가 아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 없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그 말조차 사실 상대적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말을 좀 바꿔 하면 이렇다. 진리가 없다는 말은 당신이 생각하는 진리일 뿐이며, 따라서 그렇게 주장하는 시점에서 당신 역시 그 누구에게도 그 생각을 종용할 수 없다.

그런데 대체로 자신의 관점과 시각이 보편 객관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모두 다른 자신만의 관점과 시각이 있는 것인데 말이다.

나와 다른 관점과 시각에서 같은 사물을 보는 습관, 이 과정이 바로 타인이 본 시각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관점과 시각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것들이 세상에 던질 수 있는 자신만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거기에 강한 의문점이 있다.

나는 이제부터 나만의 경험과 느낌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판단하고자 했다. 객관적인 사고의 정답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보편타당성 주관적인 것들이 모여서 결국 객관성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충실하지만 취재를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생각과 판단으로 이 사건을 보고 싶었다.

공통적인 시각은 한 가지 뿐이었다. ‘박 대통령은 억울하게 희생당했다는 것.’

대법원 판결에서 박 대통령이 국정을 농단했다니, 국정원 특활비가 뇌물이었다니, 선거개입을 했니, 안했니 등을 놓고 법리를 따지는 것이 진부하다.

문재인 좌파 독재는 이미 박 대통령 사건을 법으로 마무리 지었다. 새삼 대법원 판결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면서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약점만 잡힐 뿐이다. 내일의 해는 뜨고, 달은 저문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