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C일사일언]유식한 좌파와 무식한 우파, 그 차이
[JBC일사일언]유식한 좌파와 무식한 우파, 그 차이
  • JBC까
  • 승인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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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이념도 없는 우파, 그저 분열 대립
이론과 이념으로 무장 좌파, 체제혁명 중

1990년 소련이 붕괴됐을 때, 좌파 사상가들이 큰 충격에 빠졌었다.

공산주의혁명이론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서 집대성되고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소련 붕괴는 자본주의가 먼저 무너질 것이란 마르크스 예언이 빗나가고 말았다.

이것은 막스주의 폐단과 붕괴를 가져온 이유이기도 하다. 막스주의가 허물어지면 동유럽의 혁명가들의 신념도 무너졌다.

그런데 한국만은 예외였다. 한국의 좌파는 공산혁명에 대한 신념이 더 단단해졌다. 80년대부터 기생해온 주사파들 때문이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과 행동지침으로 내세웠던 세력이 주사파다. 북한의 남한혁명노선인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추종하는 세력이다.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을 강조한 이들을 NL파라고도 불렸다.

좌파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은 트로츠키, 그람시, 알튀세르 이념들이 겹겹이 쌓여져 있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주사파 이론이 뒤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에서 이념과 신념은 아주 중요하다. 과거 좌파들이 독재 정권에 끌려가서 각종 고문과 고초를 겪었는데도 굴하지 않았던 것은 이념이 신념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을 끌고 가서 불교로 개종시킬 수 없다. 온갖 협박과 고문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차라리 순교를 선택할 것이다.

인간에게 이념과 사상은 그만큼 무서운 신념이다. 이들을 이념의 맹신자라고도 한다.

조희연, 들어본 이름일 게다. 서울시교육감이다. 그는 1990년 박현채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작고)와 함께 사회구성체 논쟁이란 책을 썼다. 당시 이 책은 대결과 비대결, 이분법 구도 등 이른바 한국 사회 논쟁의 대결 심화 구도를 전개 시켰다.

이 책은 진보진영 좌파들이 꼭 읽어봐야 할 추천도서였다. 이 책에 따르면 그 논쟁의 전개에서 1단계(80년대 중반기)= 소시민적 인식틀과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이론 사이의 대립구도 2단계 제1소시기(86-87)= NL(민족해방변혁론) CA(제헌의회론)의 논쟁구도 2단계 제2소시기(88-89)= NL PD(민중해방변혁론)의 논쟁구도 3단계(89년이후)= 소련및 동유럽 개혁이후 혁명적 진영과 비혁명적 진영의 논쟁구도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시대적 단계별 논쟁의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90년 이후에도 논쟁 구도를 이어가고 있다. 좌파들의 논리 유발 핵심은 이분법이다. 실은 이 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좌파들이 대중 전술시 가장 많이 활용하는 것이 가진 자가지지 못한 자의 대결 구도를 형성 시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강남과 비강남을 편가르게 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문재인은 촛불 좌파와 태극기 우파간 대립 구도를 형성해 놓았다.

나는 80년대 한국 운동권들이 사회구성체 이론을 논의할 때 이론과 실천의 두 항목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요약하면 민족해방(NL)-민중민주(PD) 논쟁이 핵심이다.

이는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대한민국을 신식민지반봉건사회론(NL)로 볼 것인가, 국가독점자본주의(PD)로 볼 것인가에 대한 대립 논쟁이었다.

신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선 필연적으로 민족모순이 우선이고 그런 점에서 북한과의 공조 내지는 그들을 혁명기지로 지도력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고 오히려 북한은 남한의 혁명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보는 시각이다. 지금도 정의당과 민노총, 전교조 등에선 이 논쟁이 간헐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보수 우파로 넘어와 보자. 보수 쪽에선 이런 논쟁은커녕, 어떤 논쟁을 벌이기 위한 특정 이론도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탄핵론은 대한민국 보수층에서 매우 중요한 아젠다다.

이 탄핵론은 보수 우파끼리 모든 갈등과 대립의 원인이다. 자유한국당과 새보수당의 통합도 결국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은 탄핵세력과 반대세력 간 섞어져 있기 때문이다.

탄핵은 유승민 등 사탄파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탄핵의 강을 건너자’, ' 탄핵을 묻고가자', '역사에 맡기자' 등의 봉합의 ㅜㄴ제가 아니다.

보수 우파는 이를 놓고 찬성파와 반대파간의 피터지는 논쟁을 펼쳤어야 하고, 그 논쟁을 통해 갈등과 대립을 좁히고 그래서 범보수 통합의 길로 가야 한다.

이런 논쟁을 펼치지 못하는 것은 탄핵에 대한 불편함과 토론에 성숙되지 않는 보수 우파 분위기 탓이다.

또 차기 총선을 앞두고 보수진영에선 보수대통합을 외치고 있다. 차기 총선서 보수가 승리하지 못하면 문재인 좌파 독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범보수가 통합을 해야 한다는 그 당위성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무엇으로 통합을 이끌 것인가. 통합의 아젠다가 무엇인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고작, ‘문재인 정권 독주를 막기 위해서’, 혹은 차기 총선서 보수의 승리를 위해서.

이것은 '슬로건'이지 이념을 바탕으로 한 이론이 아니다. 통합의 이론조차 없는데 슬로건만으로 하나로 묶는 것은 억지다.

최근 태극기 우파 통합의 한 이론이 탄핵무효. 탄핵무효를 위해 태극기 우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탄핵무효는 이론과 이념이 아니다. 이는 '진실과 정의 대 거짓과 불법'의 구도다. 나아가 법치 회복과 법치 사망의 문제로 집약된다. 태극기 우파들은 이에 대해선 이의가 없다. 

문제는 이것은 좀 더 집약적이고, 체제적 이론으로 재정립 시켜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왜 탄핵을 당했는가. 촛불로 들고 일어난 좌파들의 체제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이는 좌파들이 탄핵을 벌인 후 대한민국을 좌파 민중민주의로 변화시킨 '반역'이다.

우파들이 당연히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즉 체제 전쟁이면 체제전쟁으로 맞서야 한다. 상대는 전쟁을 일으키고 총을 쏘우는 데, 우파는 다툼만 벌인다.

현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대 민중민주주의 대결구도로 형성됐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이냐와 반대한민국이냐다.

한 시대에 따라 그 정권을 바라볼 때, 어느 변화가 중요하고, 어느 변화가 덜 중요하지 않다. 그 변화의 징후를 예측하고 거기에 따른 대비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책조차 없다.

한 특정 사안에 대해 논리적으로 경합하는 대신 서로가 자기 말이 옳다는 노골적 천박함을 드러낸다. 이 우격다짐 천박함 앞에서 이성과 논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개념인가.

우파는 목소리가 큰 사람과 증오와 분노가 더 심한 사람이 이긴다. 그 논쟁에 없었는데도 목소리 큰 자들의 주장이 맞겠지 동조 한다.

그게 아니다. 목소리가 작은 그 사람의 주장이 맞다’”고 말하는 것이 나를 무시한다고 오인한다.

혁명의 기운이 전 유럽을 휩쓸던 19세기 말~ 20세기 중반까지, 혁명을 목표로 투쟁을 하던 운동가들이 스스로의 엄격한 도덕성을 다짐하기 위해 만든 용어와 방법론이 있다. 자아비판이다.

말 그대로 스스로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다. 혁명가가 세 치 혀를 통한 선동과 카리스마만으로 움직인다면 너무도 쉽게 타락할 수 있다.

말로만 정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언행이 일치하도록 뜨겁게 살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자아비판이다.

전체주의 체제에서 자아비판이 상대를 걸고 넘어지는 정치투쟁의 장이 되는 변질로 확산되었지만 이 자아비판은 동지들을 심판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마음가짐으로 들어 주고 함께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보수는 이런 자아비판에 대해 귀가 열렸을까? 자아비판을 했다가는 날벼락 당하기 일쑤다. 상대를 비판만 하면 너나 잘해라고 질식시킨다. 왜 못 믿느냐고 되레, 윽박지른다.

왜 좌파가 정권을 잡았고, 체제전쟁에서 우파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지 그 이유가 짐작된다. 이론이 있나, 논쟁이 있나, 신념이 굳어져 있나.

오직 나, 나, 나를 중심으로, 오직, 우리, 우리, 우리를 중심으로 모이고 가야한다 뿐이다. 지구도 사람도 내 중심으로 돌고 돌아야 한다는 기막힌 나, 우리주의.

문재인 정권의 좌파 지형이 바뀐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 지형을 잘못 읽은 측면도 있다. 우파의 감성주의와 천박함이 스스로 눈을 닫게 해버렸다.

한국사회에서 좌파와 우파를 비교할 때, 좌파는 이론과 이념에 매몰되어 있고, 우파는 사람에 매몰되어 있다. 좌우 대결에서 우파가 패하고, 좌파가 승리하는 것은  사람에 매몰 된 까닭 일게다.

사람은 때론 실망을 안기지만, 이념과 이론은 가치의 혼란만 줄 뿐이다. 우파는 자신만이 절대적 진실과 정의를 독차지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자기 집착에 매몰된 우파가 설쳐대고, 마치 자신이 소영웅주의인 양 대중 앞에서 우쭐대고 있다. 학습과 이념이 없기에 그 다음 체제 노선 투쟁에서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꼬인다.

SNS를 통한 의사 소통 역시 편 가르기다. 언어와 논리의 폭력이 그 공간에서도 재현된다. 현상을 비판하는 그 논리 자체가 사람 속에 갇혀 있다. 각종 집회와 시위조차 그 의식 구조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논리 자체가 현실과 동떨어진 또 다른 현실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영화 식스센스는 자신이 유령인데, 정작 자신은 살아 있는 사람인 것으로 착각한다. 자신 속에 유령이 있고. 그 유령이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도 자신은 정작, 자신은 살아 있는 정의론자로 착각한다.

한마디로 무지하고, 때론 무식하다. 무지와 무식은 용감하다. 그러나 정작, 용감해야 할 때에선 비겁해진다.

한국의 우파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순수하고 이성적인 감성을 들어내라, 그 온정주의와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 너그러움도 걷어차라, 거만하고 오만하고, 잘 난 척 태도를 버려라, 안주함과 나태함은 태워버려라.

이것은 인간이 먹고 살 때 생길 수 있는 한가한 인간성 표출이자 도덕 윤리적 행위다. 체제전쟁 과정에서 이성과 감성은 독이 된다. 체제를 바꾸고 싶어하는 자들의 최대적은 실은 온정주의다.

좌파들은 그래서 더욱 자신들을 단단한 강철로 단련시킨다. 지금 문재인 정권을 포섭해 있는 주사파들은 바로 80년대부터 이 강철로 다듬어지고, 단련된 자들이다. 모래성 같은 우파가 이런 강철 같은 주사파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착각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사상이 한국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좌파가 절대적 진실과 정의, 선이라는 독점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파끼리 헐뜯고 짓밟고 싸운다. 그러나 부탁하고 싶다. 그 진흙탕 싸움에 제발 박근혜 대통령과 민초들을은 끌어들이지 마라.

좌파가 박 대통령과 민초들을 한번 죽였다. 이젠 우파가 다시 죽일 셈인가.

대명천지에 이런 오호통재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