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까(5)]그 사람을 믿습니까. 왜?
[아무튼 까(5)]그 사람을 믿습니까. 왜?
  • JBC까
  • 승인 20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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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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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 사람 그럴 줄 몰랐어.” “백 개 물 속은 알아도 역시 한 사람 속은 몰라.”

인간에 대해 실망했다거나, 배신감을 느꼈을 때 튀어나오는 말들이다. 요즘, 태극기 우파들은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인간사 다 그런거죠, 실망할 게 뭐 있습니까.” 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전제에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깨지니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왜 이토록 사람에 대해 분노하고 실망을 금치 못하고 사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다워야 한다는 전제는 무엇일까. 정직한 인간인가, 신용을 잘 지켜야 하는가, 진실적인 사람이어야 하는가, 도덕과 윤리 의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부합되면 사람다운 사람인가.

우리가 한 인간에 대해 느끼는 실망은 결국 인간의 이중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문재인과 조국 등 좌파들을 통해 그 이중성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이런 자를 흔히 이중인격자라 부른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서로 구분되는 정체성을 지닌 채 개인의 행동을 번갈아 가며 통제하는 것이다.

인간사는 늘 이중성이 드러난다. 합리적인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와 그것으로부터 일탈하는 일종의 마성에 대한 매혹이다.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지적인 인물이지만 동시에 합리성을 넘어 초인이라는 마성에 지배된다. 이는 곧 인간사회의 합리적인 특성과 그것이 지닌 허구성의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티븐슨이 1886년에 발간한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Dr.Jekyll and Mr. Hyde).

이 책의 핵심은 인간은 누구나 이중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일면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을 가지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악행을 행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을 그린 게 이 책이다. 인간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누구나 이러한 이중성을 품고 산다. 누구나 선행을 할 수도 있고, 악행을 할 수도 있다.

사실 인간의 이중성을 컨트롤 하는 기능이 윤리와 도덕 철학이다. 인간이 항상 선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항상 선행을 할 것이고, 반성을 해볼 행위는 없을 것이다. 이럴 때에는 윤리와 도덕 등은 필요 없다.

반대로 인간이 항상 악한 존재로 가정하면, 윤리와 도덕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인간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들이대는 것 자체가 필요 없는 짓인지 모른다.

그래도 교육을 통한 인간개조를 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겠지만 괜한 헛수고라고 본다. 윤리가 존재하더라도 인간을 개선, 변화시킬 여지가 없다. 윤리가 악한 행위를 개조 변화시키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윤리는 인간의 성향이 이중적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악한 모습을 극복하면서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유도를 한다.

인간에겐 이런 윤리와 도덕성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게 있다. 이성이다. 철학자 칸트가 인간을 다른 존재들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로 본 근거는 이성에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적 본질은 현실 삶에서 언제나 그 자체대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흔히들, 인간은 자연적 본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자연적 본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개인의 이기심 쪽으로 기울어진다.

이성과 상식이 무너지고, 판단과 인간적 가치 기준이 무너진 인간을 흔히 인간 말종이라 부른다. 조직이 이렇다면 어떻게 불러야 할까. ‘말종 조직이다.

말종 인간과 그런 조직에는 공통점이 있다. 윤리와 상식은 당연히 없다. 아주 독선적이고 독재적이고 무례하고 건방지고, 폭력적이다.

말종사회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쓰레기들이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대통령 사기 탄핵, 대통령 구속 등은 마녀사냥의 전형이고, 이것은 우리 사회의 집단 이성과 상식 법치가 무너지고, 헌법이 유린 된 것이다.

또 위장과 기회주의 행태로 선한 사람을 속이고 있다. 권력은 정신과 일상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굴종하게 만든다. 일상생활의 미세한 국면에 까지 지배력을 행사케 한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추상적 사고와는 달리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생활양식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위장 기회주의 자가 발붙이는 사회적 기반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생충들이다.

이를 말종들이 주도하는 사회는 그로 잉태된 또다른 말종들이 설쳐된다. 우리는 오늘도 이런 말종들을 보고 살아야 한다. 그 말종 탓에 어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치를 떤다.

말종들은 인간을 현혹함으로써 인간을 철저히 지배한다. 말종들은 분탕과 분란을 먹고 산다. 이를 통해 혼미스러운 상황을 야기시키고, 그 혼미에 빠뜨린다.

혼미는, 인간을 현혹함으로써, 인간을 철저히 지배한다.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을 믿는 순간, 그 다음은 실망이 따라온다. 사람이 신이 아니기에 믿을 수 없는 존재다. 사람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숙함을 드러내는 것일까.

실망과 배신은 믿음에 대한 허탈적 가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모여서 만든 그 조직을 보고, 정당이나 사회단체 등이 그 기본 입장이나 방침, 운동 규범 따위를 열거한 강령을 믿음의 가치로 본다.

나는 추잡한 속임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나의 가설이 이젠 정설로 굳어질 판이다.

"선생님 그 사람을 믿습니까." 

"네." 

"왜 믿죠?"

"메시지가 있습니다. "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착한 인간이 인간 말종을 잉태하는 공헌자다. 

세상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