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C단상]조원진 무관심을 증오한다
[JBC단상]조원진 무관심을 증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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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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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필자.

요즘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는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시자 그람시는 실제 무관심을 증오했다.

그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어떻게 역사의 주인공이 되느냐 마느냐는 결국 인간의 관심과 무관심에서 엇갈린다고 강조했다. 증오란 무엇인가. 증오는 혐오감과 분노가 같이 느껴질 때 나타나는 것이다. 싫은 감정과 비난하려는 의도가 중첩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증오는 사랑이란 전제를 깔고 봐야한다. 인간이 한 상대를 사랑하고 관심이 있기 때문에 증오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해야 한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제정 러시아의 저항시인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끄라소프(Nikolay Alexeyevich Nekrasov)는 인간의 나약한 방관적 자세를 질타했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인간이 무관심 할수록 인간을 이루는 구성 요소 하나 하나씩 잃어버리고 개 돼지 국민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처지를 지적했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굳이 네끄라소프의 말이 아니더라도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무관심은 새로운 문재인 종자를 양성시키도록 하는 협력자다. 무관심한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나 존재한다.

겉으로 특정 사안과 이슈에 대해 환호하고 맞장구를 쳐놓고선 뒤에 가선 다른 길로 빠지는 사람들 있다. 인간이 만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소한 독재자와 위정자 가짜와 껍데기에 대해서 무관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재앙을 받아들이고 살겠다내지 지옥의 길로 가겠다는 것과 같다.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산다는 것에 대한 지지자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관심을 받고 관심을 주고 산다. 무관심은 산다는 것을 무기력하게 이끈다. 세상에는 관심종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관심 종자가 있다. 관심종자 이기 때문에 애국자 내지 지성인이고, 무관심자들은 그냥 이방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역시 인간이어야 한다. 살아가면서 어떤 것에 관심을 보이고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모습이다. 무관심은 무기력증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할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와 당신, 우리는 무관심을 증오해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무관심이 잠재적 피해자가 된다. 독재자는 국민의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무관심은 나라를 죽어가게 할 독버섯이다. 위선자들에게 무관심 국민은 최대의 협력자다. 그들은 이런 무기력한 무관심 종자에게 독버섯을 이식시킨다.

무관심을 이끌어내면서 역사와 체제를 뒤바꾸려 한다. 무관심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 치명적이다. 무관심은 독재자에게 판을 깔아주는 도구다. 악은 항상 무언가를 행하고자 하는 몇 몇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일은 다수의 무관심을 먹고산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관심도 마찬가지다. 몇몇이 할 수 없다. 시위를 한다는 것은 저항이요, 이는 관심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깨어나서 이 나라를 지키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다수의 무관심이 존재하는 한 독재자의 지배를 받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독재자와 위선자들을 향해 실천과 행동의 투쟁을 한 들, 실은 착시다. 오늘이라는 시점에서 우리는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 또 무엇을 해야하는가. 소수만이 관심자가 되고 다수가 무관심으로 돌아설 경우 대한민국의 희망은 없다.

인간은 가설을 먹고 산다. 가설은 만약에 기반을 둔다. 정치인들인 그 가설에 미래와 희망을 담는다. 만약 가설이 틀리다면, 사람들의 삶은 위험으로 내달리고 반란이 일어나며, 기근이 넘치고 사람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정치적 삶에서 환상적 활동은 도덕적 기반을 갖춘 힘에서 나올 때만 빛을 발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에게 동조를 얻을 수 있다.

한 시대의 운명은 소수가 제기한 행동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 이는 관심 있는 군중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이들은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알았든, 몰랐든, 행동을 했든, 안했든 무관심했든 관심을 두었든 이에 앞장선 사람은 희생자다 된다.

이는 무관심이 낫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무관심을 증오하고, 그들이 뒤에 숨어서 지속적으로 불평불만을 제기하는 일에 화가 난다. 그러므로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증오하며,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

17일 현재 차기 대선이 112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자유 우파 국민들의 무관심은 여전하다.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가 지난 달 16일 대선 출마 선언을 했을 때, 환호와 박수를 보냈지만 그 후론 무관심으로 바뀌었다.

조원진에게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관심과 무관심의 차이는 참여자이어야 하며,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되어야 하고, 내 역할의 일부분을 통해 대한민국 미래를 설계한다는 주체가 되어야 하고, 역동적인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국민이어야 한다.

작금의 삶의 우리는 살아가고 삶에 참여하는 인간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극성과 호들갑은 관심이 아니다. 무관심보다 더한 것이다.

진정한 관심은 자유대한민국을 어떻게 살리느냐다. 조원진의 자유대한민국 청사진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위정자, 기득권자, 껍데기로부터 나와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는 길이다.

그래서 나는 조원진을 향한 무관심을 증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