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철의 직격탄 "좌파 진영의 그릇된 역사 왜곡을 답습한 이준석 前대표"
심재철의 직격탄 "좌파 진영의 그릇된 역사 왜곡을 답습한 이준석 前대표"
  • JBC까
  • 승인 2022.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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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서울역에 모인 시위자들.
80년 5월 서울역에 모인 시위자들.

이준석 대표가 법원에 제출했다고 공개한 탄원서에 좌파 진영의 역사왜곡, 그릇된 역사관이 인용되어 있어 유감이다.

80515일 대학생들의 서울역 시위에 대해 이 대표의 해산하지 않았다면 5·18도 없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가정법으로 낙인찍는 것은 올바른 역사관도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아픔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광주 비극이 안타깝다고 해서 서울역 해산이 없었으면 광주참사도 없었을 것이라는 인식은 진영 갈등이 첨예할 때마다 시위의 동력으로 이용한 좌파 진영의 단골논리이다. 역사적 진실은 외면하고 그릇된 역사 논리를 정쟁에 이용하는 이 대표의 발언이 심히 유감이다.

대표는 탄원서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신군부에, 자신을 위기에 빠진 정당 민주주의 투사로 대입하며 1980년 서울역 회군이 신군부의 오판의 계기가 되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발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과거 진영간 치열한 이념 투쟁 때마다 좌파 진영이 투쟁의 동력으로 이용했던 그릇된 역사관, 역사왜곡을 추종한 논리이다.

1980년대 중후반 극단적인 진보세력의 서울역 회군 때문에 광주 참사가 생겼다는 식의 근거없는 낙인찍기로 시작된 사실과 다른 가정을 2012년 쇠고기 광우병 사태 이후 좌파 진영에서 집중 왜곡한 것을 보수 진영의 대표가 사실처럼 인용하고 반복하는 지금의 현실이 유감이다.

이 같은 주장은 1980년 서울역 시위에 참여했던 10만 학생들의 열정과 희생을 배신으로 폄하하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2011년 저서와 2019년 기고문과 궤를 같이 하는 잘못된 발언이다.

80년 5월 서울역에 모인 시위자들.
80년 5월 서울역에 모인 시위자들.

“1980년 찾아왔던 '서울의 봄'에도 물줄기가 바뀔 수 있는 지점들은 있었습니다. 서울역에 모인 학생들은 유혈충돌을 우려해 해산했습니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 선의의 해산을 폭력의 성공 가능성으로 잘못 받아들였고, 비상계엄을 확대했습니다. 그들의 오판에 따라 결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전선에 서도록 강제된 것은 민주주의의 수호가 그들의 역할인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광주의 시민이었습니다. 서울역에서 회군했던 사람들이 며칠 뒤에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을 보고 그 짐을 나눠 짊어지지 못한 것을 평생 자책하는 것을 보면서 작금의 정당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도 제가 짊어질 수 있는 만큼은 짊어지고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이준석 대표 탄원서 중)

대표는 824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서도 이를 부연 설명하면서 서울역에서 만약에 그런 어떤 투쟁이 지속되었다고 한다면 광주처럼 무슨 공수 부대가 투입되고 이렇게 해가지고 유혈 사태가 발생하고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라며 역사적 가정을 전제로 한 좌파 진영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사실로 단정해 주장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지금 또 이런 어제 신군부 지적이라는 것도 신군부가 했던 양태에 대해서 얘기를 한 겁니다. 결국에는 그때 서울에 봄이 왔을 때 그 당시에 우리가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라는 것이 있었고 심재철 의원이 나중에 소회를 밝혔지만 그때 그런 것을 감당하기에 우리들은 너무 어렸다. 그런 것 때문에 그때 학생들은 유혈 충돌을 막기 위해서 회군했고 그때 신군부는 그것을 오판했던 것이 야, 힘으로 찍어 누르니까 되는구나 해 가지고 그 며칠 뒤에 더 엄청난 일을 벌인 겁니다. 그게 뭡니까? 우리 사회의 굉장한 아픔으로 남아 있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아닙니까? 만약에 서울역 회군 때 서울이라는 공간은 광주와는 또 다릅니다. 서울역이라고 그러면 옆에 외신들도 많이 있고요. 광주에 무슨 택시운전사 해 가지고 잠입할 필요도 없어요. 외신이 모여 있는 곳이 서울입니다. 서울역에서 만약에 그런 어떤 투쟁이 지속되었다고 한다면 광주처럼 무슨 공수 부대가 투입되고 이렇게 해 가지고 유혈 사태가 발생하고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그들이 위협했을 때 그것을 너무 어렸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었던 그런 것들 때문에 나중에 그것이 사실 제가 편지에 썼지만 전혀 본인들이 민주주의 투쟁에 선봉에 설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고 그것이 자신들의 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광주 시민들이 그것에 의해서 피해를 입고 민주주의의 선봉에 선 겁니다.

대표가 심재철 본인의 소회라고 언급한 내용은 심재철의 소회가 아니라 유시민이 2012년 광우병 쇠고기 사태 이후 강연 다니면서 대중 선동용으로 이용한 허위사실 주장이고 진영 논리일뿐이다. 그런데 이를 사실로 단정한 이 대표의 탄원서 주장은 서울역 해산이 광주 희생의 원인이라고 역사왜곡한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5·18 기념사와 저서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고, 유시민처럼 80년 합수부 참고인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논리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며, 2012년 쇠고기 광우병 시위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좌파 진영이 단골로 이용한 역사왜곡 논리일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5·18 기념사에서 내가 광주 518의 발단이 된 서울역 회군 때 그 자리에 있었다.”라고 말했고 그에 앞서 기고문 평범함의 위대함에서는 서울역에 모인 대학생들은 신군부의 무력진압을 우려해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이때 광주의 민주화 요구는 더 활활 불타올랐습니다.”라고 썼다. 앞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1년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대학생들의 마지막 순간 배신이 5·18 광주항쟁에서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도록 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를 보수진영의 대표가 사실로 단정해 법원 탄원서에 인용하고 인터뷰하는 것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대표는 서울역에서 만약에 그런 어떤 투쟁이 지속되었다고 한다면 광주처럼 무슨 공수 부대가 투입되고 이렇게 해 가지고 유혈 사태가 발생하고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좌파 진영의 논리를 그대로 추종하는 발언을 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

1. 서울역에서 해산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어도 (서울에) 공수 부대가 투입되고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이 대표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5.15. 서울역 시위 중에도 잠실운동장과 용산구 효창운동장에서 공수부대가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시민들의 제보가 다수 전달되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미 5.3.부터 시위에 투입하기 위한 군부대 배치가 이뤄지고 있었다. 5.15. 시위 전날 당시 계엄군은 학생 시위대의 진출에 대비해 이미 무장하고 출동 대기 상태에 있었다.

육본작명 제12-80, 13-80호에 따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출동이 불가피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5.3.에 특전사 9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시켰고, 5.7.에는 특전사 13여단을 서울 거여동에 이동시켰으며, 5.8.에는 특전사 11여단을 김포에 이동시켜 대기상태에 두고 있었습니다.(1995.3.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등에 대한 내란, 내란목적 살인 피의자전두환 답변서)

, 서울역 시위가 있던 “51518:25서울역 광장 5킬로 주변에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30, 33단 병력 670명과 전차 8, 장갑차 22대가 출동해 대기하고 있었으며, 1, 2, 3군 지역 내에 있는 71개 송전국과 중계소에 계엄군 1,067명을 출동시켜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20사단 3개 연대를 잠실종합운동장과 효창운동장에 출동시켜 대기해 있었다.(육본작명 제16-80, 17-80)

검찰: 신군부내에서 이른바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비상 권력기구의 설치가 최초로 논의된 때가 언제인가요.

권정달: 80.5. 초순경이었습니다.

검찰: 한 자료에 의하면 803월 말경, 정권장악에 뜻을 두고 집권계획 연구에 착수하여 4월 말경 비상 권력기구인 국보위 설치 방안, 국보위 위원 인선 등의 준비를 완료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 4월 말경이 아니라 5월 초순 무렵에 비상기구 설치문제를 검토하였습니다.(1995.3.14.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 등에 대한 내란, 내란 목적 살인사건 권정달 진술조서, 27121, 53)

“805월의 충정부대 이동상황을 보면, 5.3 육작명 제12-80호에 의거하여 9특전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 지시하고, 5.6. 육본 작전전 제214호를 통해 해병1사단 1개 연대를 소요사태에 투입하도록 지시하고, 동일 육작명 제3-80호에 의거하여 13 특전여단을 5.8. 01:00경 거여동으로, 11여단을 5.10. 01:00 김포로 각 이동시키고, 5.9. 육본 작전전 제214호 수정1호를 통해 해병 1개 연대를 추가 투입토록 지시하고, 5.13. 1군의 경장갑차 26대를 수경사에, 3군의 경장갑차 24대를 수도군단에 각 배속시키고, 5.14. 08:50경 전 소요사태 진압부대에 투입준비를 지시하고, 5.15. 12:00경 육작명 제16-80호에 의거하여 20사단(60연대와 포병단 제외)을 잠실종합운동장과 효창운동장으로 이동시키고, 5.17. 00:01 육작명 제17-80호에 의해 20사단 60연대를 태릉으로 추가 이동시키는 등 비상계엄확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되기도 전에 이미 많은 군부대가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런 군병력의 이동은 누가, 언제 어떻게 결정하였는지.”(1995.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 등에 대한 내란, 내란 목적 살인 피의자 전두환에게 보낸 질의서’)

2. ‘광주 시민들이 그것에 의해서 피해를 입고 민주주의의 선봉에 선 겁니다라며 서울역 시위 해산 때문에 광주에서 희생이 생겼다는 이 대표의 논리는 좌파 진영의 단골 논리임

대표의 주장대로 서울역에서 해산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으면 아무런 희생도 없었을 것인가?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신군부가 광주에서 학생 시위에 발포하고 비극이 벌어졌던 것을 보면 서울에서는 광주보다 훨씬 더 큰 참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은 자연스럽다. 또한 서울에서 유혈사태가 생겼으면 광주 참극을 막을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도 없다.

역사적 진실은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겠다는 신현확 국무총리의 TV, 라디오 생중계 기자회견를 얻어냈고 앞으로 이어질 전국 시위를 준비하며 전국 53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열렸다가 5.17. 저녁 계엄군에 의해 흩어졌다는 것이다.

5.15. 오후 서울역 광장에는 대학생들을 비롯해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는데 맨손의 서울역 광장의 학생들은 경찰의 저지선에 막혀 더 나갈 수 없었고 광화문, 종로에서도 산발적인 시위대가 화염병, 각목을 사용해 전경들과 대치 중이었는데 남대문 근처에서 신원불상자가 버스를 탈취해 대치 중인 경찰을 덮쳐 현장에서 전투경찰 1명이 사망한 일이 터졌다. 이에군 투입의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주장이 커졌고 냉랭한 시민들 반응에 지원은 전혀 없고, 장비라고는 마이크로버스 위에 달린 마이크 하나 뿐인 상태에서 사상자 소식은 들려오고 야간의 행동에 대한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학생 지도부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냉정한 시민 반응에 시위 동력을 잃은 총학생회장단 회의에서 대국민 홍보작업을 기약하면서 내무부장관과 통화해 민주화일정을 앞당긴다는 신총리의 약속과 연행 학생들의 석방, 그리고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보장받고 해산을 결정한 것이다. 학교로 돌아간 후의 향후 행동 지침은 16일 오후 3시부터 열릴 전국 53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에서 결정하기로 했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역 시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학생들 가운데에는 자제하지 못하고 문제를 확대시켜 폭력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세력이 있었고, 그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다. 13일 저녁 늦게, 서울 고려대 학생회관에서 전국 33개 대학의 대표 35명이 모였다. 13일 밤에 시위가 일어나자 시민들의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냉정했다. 학생들은 완전히 공중에 붕 뜬 상태였다. 다음날인 14일 오후 예정대로 학생시위는 서울, 대구, 광주, 청주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열렸다.”(김대중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일본NHK취재반 구성, 1999, 도서출판 인동, p.115-116)

다음날인 5.16. 서울대의 경우 많은 학생들이 유인물을 들고 대국민 홍보전에 나서는 한편 오후 3시부터는 이화여대에서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 53명이 모여 다음날까지 28시간 연속 회의를 하던 도중 17일 저녁 계엄군의 급습으로 서울의 봄은 막을 내리고 말았고 이것이 미완의 서울의 봄으로 역사에 남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의 발단에 대해서도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석방요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을 체포했다고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것을 듣고 광주 시민들이 다음날인 518일에 대대적인 저항을 한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김대중 즉시 석방’, ‘비상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투쟁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김대중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일본NHK취재반 구성, 1999, 도서출판 인동, p.119)

5·18광주민주화운동의 피해 당사자인 김대중씨조차 광주항쟁이 자신의 체포가 시발이었다는 것이지 서울역 해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정기용 검찰관도 “1980.5.27. 미국에서 귀국 전 뉴욕타임즈를 보았을 때 광주사태가 발발하였는데 김대중씨를 석방하지 않으면 광주사태를 진정시킬 수 없다는 취지의 보도를 보고 귀국했다고 밝히고 있다.(1994.12.10.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 등에 대한 내란죄 등 피의자진술조서 26701)

심 재 철 국회부의장

심재철 전 국회부의장.
심재철 전 국회부의장.

심재철과 서울역 회군

심 전 국회부의장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큰 사건인 서울역 회군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1958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한 심 의원은 광주제일고를 졸업한 호남토박이에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서울역 회군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광범위하게 일었던 민주화 운동인 서울의 봄의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다.

19791026일 박 전 대통령의 사망 이틀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서울의 봄은 계엄령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기까지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가리킨다.

서울역 회군은 서울역 앞에 전국대학생 10만여 명이 운집한 날이다. 심 의원은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시위 철수 결정을 내린 주역 가운데 한 명으로 분류되며 직접 학생 시위대 해산이란 회의 결과를 발표했다.

심 의원은 서울역 회군에 대해 대학생들은 서울역 광장에 모여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었으나, 시민들의 반응은 냉랭했다연락이 닿는 대로 모인 9개 대학 학생회장단 회의가 난상토론 끝에 통제 불가능한 유혈사태가 날 수 있으며, 학생들의 시내 진출에 시민 반응을 보면 대국민 홍보가 좀 더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