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C현장 르포]14년만에 찾은 박정희 저격범 김재규 묘지에서 떠올린 조선의 반역사건
[JBC현장 르포]14년만에 찾은 박정희 저격범 김재규 묘지에서 떠올린 조선의 반역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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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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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 오포읍 엘리시움묘원에 있는 김재규 묘지. 사진=문상철 기자
경기도 광주 오포읍 엘리시움묘원에 있는 김재규 묘지. 사진=문상철 기자

선조 22(1589)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두고 당시 권력 암투를 벌였던 서인이 동인을 말살시키기 위한 사건이었다와 실제 정여립이 모반을 모의했었다는 논란이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정여립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 등 주장은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었다. 이것이 정여립이 역적으로 몰렸던 이유였고, 기축옥사의 서막이었다. 기축옥사는 조선 최대 비극 중 하나인 사건이다. 당시 조선이 정여립 등 연관되는 역적을 어떻게 죽이는가를 보면 역적에는 단 0.1%의 동정도 없었다.

선조 때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정여립과 9촌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은 정여립과 역모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묘향산에 끌려가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았으며, 사명당(四溟堂)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훌륭한 인사들이 고초를 겪었다.

역모 사건이 당쟁으로 까지 확대 되어 공안 정국으로 치닫게 되었고 피를 부르는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당시 1,000여 명이 죽고 유배에 처해졌으면 엄청난 사건이었다. 정여립의 시체는 한양에 도착하여 능지처사 되었으며, 한 토막씩 잘린 다음 8도에 흩어졌다. 선조는 정여립의 집터를 파헤치고 숯불로 지져 그 맥을 끊고 연못으로 만든 다음, 제왕의 기운이 있다고 전해 오던 정여립의 조상 묘 터까지 파헤쳐 유골을 꺼내어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렸다고 한다.

조선에서 역모가 성공한 적이 없다. 대부분 역모는 실패했고 주도자는 능지처참되었다. 1728년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의 결말도 그렇다.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정여립의 기축옥사와 조선의 역모 사건을 떠올린 것은 필자가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1926~1980) 당시 중앙정부부장의 묘지가 있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의 엘리시움묘원에 갔다 오면서다. 만약 조선시대였다면 김재규 묘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김 부장은 80520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면서 나흘 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죄명은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수괴미수죄였다.

사형 집행 다음날 새벽 비밀리에 경기도 광주 소재의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필자는 2008년 언론인 중 최초로 김재규 묘소를 찾아가서 단독보도 한 적 있다. 14년 만인 26일 다시 가본 김재규 묘역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공원묘역이 더 확장되어 김재규 묘소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무덤으로 향하는 길은 급격한 경사다. 어떻게 김재규 관을 매고 이 높은 경사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까 고개를 절래 흔들 정도다. 김재규 무덤은 공원묘역 가장자리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자리해 있었다.

누구나 쉽게 볼 수 없도록 묘지 주변은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겨우 찾은 김재규 묘소 앞에선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람이 피자와 콜라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오늘이 10.26이라 김재규 선생님이 생각나서 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묘소에 오기 전 한 사람이 술을 따르고 갔다고 전했다. 김재규 묘소는 30여평 쯤 된다. 묘소만을 놓고 따져볼 때 왕족 묘소와 비견된다.

19805월 김재규는 사형을 당하기 전 가족들에게 "만약 내가 복권이 되면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라고 묘비에 적어다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김재규 묘 입구에 세워져 있는 비석에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義士 金載圭 將軍 追慕碑)’라고 적혀있다.
김재규 묘 입구에 세워져 있는 비석에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義士 金載圭 將軍 追慕碑)’라고 적혀있다.사진=문상철 기자

김재규 묘 입구에 세워져 있는 비석에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義士 金載圭 將軍 追慕碑)’라고 적혀있다. 이 비석은 김재규 사망 9년 뒤인 1989년 초 광주 전남 송죽회가 세웠다. 송죽회는 유신철폐 운동에 앞장섰던 지역 재야인사들 중 일부의 모임이다.

추모비가 세워진 뒤 이 비석은 누군가에 의해 의사장군네 글자가 정으로 심하게 쪼여 훼손됐다. 무덤 바로 옆에 놓인 재단에 새겨진 일부 글자 역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파손됐다. 박정희를 저격한 김 재규를 의사장군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세력들의 소행으로 보인다.

문재인 좌파정권 이후 김재규 미화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김재규 명예회복은 박정희를 유신독재자로 굳히게 하기 때문이다.

문 정권때 김재규 미화운동이 전방위에서 펼쳐졌다. 명예회복과 관련한 사업을 하기 위해 모금운동까지 전개됐었.

이 후원금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위원장 함세웅 신부)’ 등이 재평가를 위한 현대사콘서트를 열고 전시회를 개최하는 데 쓰였다.

김재규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2년 전 김재규 장군 평전을 썼다. 김재규를 미화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를 미화한 영화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 좌파 정권은 20198월 김재규 사진을 군()에 다시 걸도록 했다. 김재규 사진은 육군 3군단과 6사단에 걸려 있다. 김재규는 육사 2기 출신으로 183군단장과 156사단장 등을 지냈다. 군은 10·26 이후 김재규 사진을 전 부대에서 떼어냈다. 그가 거쳤던 부대의 기록물에서도 이름을 삭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범으로 군에서 금기의 인물로 남아있던 김재규 사진을, 그가 지휘했던 군부대 역사관 등에 다시 내걸었던 것이다.

3군단 시절 김재규

김재규 사진을 군부대에 내건 근거는 역대 지휘관 사진물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담은 국방부 훈령이다. 국방부는 20194월 역사적 사실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 한해 역대 지휘관의 사진 전부를 게시할 수 있도록 훈령을 개정했다. 당시 국방부장관이 송영무 현 자유총연맹총재다.

20205월 김재규 전 부장의 유족은 10.26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유족과 변호인단은 재심을 청구한 이유에 대해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해 10.26을 내란 목적의 살인으로 왜곡했다라고 주장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하면서 김재규가 미화되는 틈을 타서 유족이 재심청구 소송을 했다는 것이다.

2020년 12월 AFP통신과 인터뷰 한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인 김정숙씨. AFP=연합뉴스
2020년 12월 AFP통신과 인터뷰 한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인 김정숙씨. AFP=연합뉴스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인 김정숙씨는 202012AFP통신 인터뷰에서 김재규가 받았던 내란 혐의를 부정했다. 그는 오빠는 자신 스스로가 대통령이 되고자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지 않았고, 국가에 반역을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역모는 아주 엄하게 다스렸다. 지금이 조선시대가 아니다. 만약 지금이 조선시대였다면 감히 김재규 미화와 명예회복 운운 할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 역모죄 처벌은 명나라 법률인 대명률에 따랐다. 이 법은 모반대역죄를 아주 강하게 처벌하고 있다. 대역죄를 지은 본인은 능지처참하고 그의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목을 매달아 죽인다. 그의 16세 이하의 아들과 어머니·처와 첩·할아버지와 손자·형제자매 및 아들의 처와 첩은 공신가(功臣家)의 종으로 삼는다. 또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며, 백숙부와 조카는 동거여부를 불문하고 유 3천리 안치형(安置刑)에 처하도록 되어있다.

조선시대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