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빠가야로'
아베 '빠가야로'
  • JBC까
  • 승인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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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국화' 허리에는 '칼'찬 일본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볼때마다 떠오는 것이 ‘전형적인 일본인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쩜 그렇게 하는 짓거리 모두가 일본인 속성을 그대로 빼닮았는지 놀랄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필자는 지난 15년 전 부터 수없이 일본을 오갔고, 일본에서 잠시 체류한 적 도 있었다.

일본의 많은 역대 총리를 봐왔지만, 이베 총리만큼 일본의 이중성을 그대로 드러낸 총리가 있었을까.

겉으로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대화를 모색하는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뒤에서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사진 아래>를 강행하는 이중플레이를 펼친 게 아베다. 군국주의적이지만 탐미적이다.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다.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다.

충실하지만 불충실하다.

용감하면서도 겁쟁이다.

보수적이지만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인다.

모든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매우 신경을 쓴다.

이런 일본과 아베의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제로, 일본인들은 개인적으로 사귀어보면 참 친절하고, 겸손하며, 예의바르다.

일본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도 일본하면 떠올랐던 게 “친절한 일본인이다”고 말한다.

반면, 개인이 아닌 집단적 행동일 땐 저들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을 감내하고 칼을 숨겼다가 가는 이중적 얼굴의 국민성이다.

 

실제로 일본인과 깊이 접촉해보면 절대로 속내를 감추고 확실한 대답을 회피한다.

어떤 상황에 대해 확신의 답을 해도 될 일을 “글세요“라든지 애매모호하게 답한다.

”소 대쇼까 내“(아 그럴까요), 절대로 그렇다(소대쓰)라고 확실한 답을 하지 않고 피한다. 이런 일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본인의 성격을 특징짓는 말로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가 있다.

간단히 말해 혼네는 속마음, 다테마에는 겉치레다.

일본인들은 상대와 대화할 때 ‘소우데스네(그렇네요)’라면서 맞장구를 잘 쳐준다.

하지만 그것을 동의하는 것으로 해석했다가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아베의 ‘입’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과거에는 일본이 다테마에를 표면적으로 내세웠다면,

최근 아베의 언행을 보면 혼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까닭이다.

일본이 혼네를 드러내는 것은 계산기를 두드렸을 때 이익이 난다는 결론이 섰을때다.

아베 정부 이전에는 보수 우익단체 등에 의해 제기된 과거사나 신사참배 문제 등에 대해 속마음이야 어찌됐든 간에 사과나 특사 파견 등 다테마에를 사용했다.

그러나 아베 정부는 “침략의 정의는 정해져 있지 않다” “위안부 제도는 전시에서는 합법적이었다” 등의 궤변과 같은 혼네를 정부차원에서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 방점이 아베의 야스쿠니 참배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이는 주변국이야 비난하든 말든, 계산기를 두드렸던 결과 일본의 우국화가 새로운 일본 건설이라는 이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일본인을 만나면 항상 일본의 이중성을 먼저 떠올린다.

일본 사람과 미팅시 이 사람 앞에선 “네, 네” 하고 관심을 표명하지만, 겉으론 계산기 두드리구나 이젠 그런 이중성이 훤히 보인다.

문제는 이런 일본의 이중성은 이웃나라나 다른 민족에게까지 적용하려 든다는 점이다.

신사참배를 강행한 아베는 외교적 비난행위가 일자, ‘일본의 변화를 위해서 한 것’이라든지, 주변국에 자세히 설명하겠다는 식이다.

마치 시혜를 베풀 듯하는 행태는 차마 목불인견이다.

일본의 이중성은 일본의 근현대사를 보면 적나라게 드러난다.

 

미국의 페리 제독에게 개항을 당할 때는 하루빨리 서구화하자고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이 되자’라고 했다.

그런데 세가 불리해지자 귀축영미(鬼畜英美), ‘귀신과 짐승 같은 미국·영국놈들’을 섬멸하는 성전에 나서자며, 소년들까지 끌고가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일본 현대사다.

러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까지 산과 들, 골과 섬마다 사람의 피로 물들여놓고 전몰자들의 영혼을 위로한답시고 급조한 것이 야스쿠니 신사였다.

저희 백성만이 아니라 대동아(大東亞)라, ‘큰 동아시아’라며 이웃나라 사람들까지 끌고가서 죽여놓고 ‘나라를 위하여’ 죽은 영혼을 위무한단다.

문화인류학자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일본의 이중성을 아주 잘 지적했다.

태평양전쟁 끝무렵, 미군은 일본군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투 중에는 남김없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다가, 포로가 되고나면 자기편을 철저하게 배신하는 일본군의 표변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

미 국무부의 요청으로 쓴 일본문화 보고서가 루스 베네딕트<위 사진>의 <국화와 칼>이다.

미국의 컬럼비아대학 인류학교수였던 루스 베네딕트 여사는 일찍이 1944년 펴낸 이 연구저서에서 일본, 일본사람들의 문화와 이중적 속성을 잘 드러냈다.

일본을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던 베네딕트는 미국에 사는 일본 면담과 방대한 자료 조사만으로 연구만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는 편이 더 객관적 일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본을 순수 연구 대상으로 파악하여 일본인의 의식 구조를 객관적으로 예리하게 분석했다.

‘국화’는 차 한 잔 마시는 데도 도(道)를 운운하는 일본인의 섬세한 미학적 세계를 상징한다.

반면 ‘칼’은 잔인하게 상대방을 살상하는 야만적 행태를 뜻한다.

‘국화와 칼’이라는 모순된 제목 속에 일본인의 이중성이 잘 함축되어 있다.

이런 태생적 모순이 일본인의 진실이란 것,

겉으로는 아름다운 국화를 들고 있지만 허리에는 상대를 베는 차가운 칼을 찬 사람들이란 것이다.

베네딕트가 일본인들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