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C의 시선]'일제강제징용 판결' 김능환과 김명수의 두얼굴
[JBC의 시선]'일제강제징용 판결' 김능환과 김명수의 두얼굴
  • JBC까
  • 승인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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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일해 화제를 모았던 김능환 전 대법관.
편의점에서 일해 화제를 모았던 김능환 전 대법관.

요즘 부쩍 언론에 김능환 전 대법관 이름이 오르내린다. 김 전 대법관은 대법관 재직시절 2012524일 대법원 소부의 일제 강제징용 사건파기환송 사건 심리를 맡아 항소심 판결을 뒤집고 청구권이 살아 있다는 해석을 내렸다.

이에 따라 강제징용은 한일 관계의 폭탄으로 돌아왔다. 당시 주심인 김 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고 했다. 201810월 김명수 대법원은 그 판결을 최종 확정했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한일 외교의 최대 현안이다. 2018년 한국 법원이 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 한일 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 됐다.

김 전 대법관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7월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임명 당시 재산이 13,800만여 원으로 사법부 전체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를 기록했다. 서울 송파구의 30평형대 아파트 한 채가 거의 유일한 재산이었고, 자동차는 1993년식 프린스 승용차였으며, 3천만 원의 빚까지 있었다. 그는 가족이 살 집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의연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취임 당시 인터뷰에서 퇴임 후에는 작은 책방을 열고 무료법률상담을 하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청백리 법조인으로 꼽았다.

20127월 대법관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대법관에서 퇴임했을 때, 부인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부업으로 편의점과 채소가게를 열어 화제가 됐다. 참고로 2012년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때 김능환 재산은 9억여 원이었다. 임명 당시 재산에 비해 8배가 뛰었다. 2021년 기준 대법원장의 봉급액은 1200만 원, 대법관은 850만원 선이다.

김 전 대법관은 20133월 중앙선거관리위원장 퇴임 후 공직을 떠났다. 그는 당시 로펌으로 직행하지 않고 부인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알바처럼 일해왔다. 김 전 대법관이 점퍼 차림에 목도리를 둘둘 말고 음료수 박스를 옮기는 모습에서 먹고사는 데 지친 국민들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전직 대법관으로 누리는 풍족한 생활을 뿌리치고 서민적 삶을 선택해 동고동락해온 그의 애민정신이 화제를 모았었다. 이런 모습에 국민들은 감동을 받고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총리 후보 등으로 거론됐으나 그동안 과분한 일을 했다. 나에게 더 이상 공직은 없다고 못박았다. 여러 대학의 초청에 대해서도 선생이 돼 학생을 가르칠 만한 사람이 못된다며 거부했다.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꿈이 있다면 편의점과 채소가게가 먹고살 만큼 잘 돼서 집사람과 함께 잘 지내는 것이라는 말을 하여 수많은 네티즌이 앞다투어 존경을 표시했다.

그런 그가 5개월 만에  율촌로펌에 출근했다. 그는 맹자의 왕혜왕상편에 나오는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는 말로 변심의 이유를 댔다. 무항산 무항심이란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란다. 그가 퇴임 후 받는 연금이 월 400만 원 가량이다.

일반 샐러리맨이 평생 국민연금을 붓고 받는 돈은 월 150만 원 선이다. 무려 4배에 가까운 액수이다. 여느 노부부는 알량한 연금으로 노년을 견뎌낸다. 김 전 대법관의 경우는 사정이 좀 더 낫다. 부인이 편의점을 했다. 두 곳에서 나오는 돈을 합치면 400만 원이 훨씬 넘는다. 그런데도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를 대고 로펌 행을 택했다. 그가 로펌으로 간 이후 어떻게 지내고 살고 있는 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법원장 임명당시 버스 지하철로 이동 화제를 모았던 김명수 대법원장.
대법원장 임명당시 버스 지하철로 이동 화제를 모았던 김명수 대법원장.

김명수 대법원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2017822일의 일이다.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된 다음 날이었다. 춘천지방법원장이었던 그는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며 이날 대법원을 방문했다.

그는 이때 관용차를 쓰지 않았다. 춘천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동서울터미널에 내려 지하철 2호선으로 환승해 대법원 바로 앞 서초역에서 내렸다. 그가 대법원 청사로 걸어 들어오는 장면은 전국에 생중계됐다. 나랏돈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기는 장면이었다.

이로부터 805일 뒤 김명수는 47천만원을 대법원장 공관 리모델링용으로 썼다. 이 일을 챙기고 지시한 사람이 김 대법원장 부부였다. 당시 법원 내에선 “(대법원장 부부가) 공관 내부의 벽지와 커튼도 직접 골랐는데 상당히 고가(高價)였다” “공관 안 계단 난간까지 손보라는 지시를 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렇게 리모델링된 공관에 그는 강남 재건축 아파트를 분양받은 판사 아들과 변호사 며느리를 불러들여 같이 살았다. 공관에 공짜로 살게 해 강남 아파트 분양 대금을 마련할 수 있게 도운 것이다. 손주들을 위해 공관 잔디밭에 그네와 모래사장, 축구 골대를 설치했다. 대법원장 임명 후 관용차를 거부하고 버스·지하철로 대법원에 온 그였다. 일종의 쇼였다. 그는 이미 거짓말쟁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김능환은 일본기업에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취지의 파기 환송 판결을 내렸다. 그의 판결 내용을 보면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그 논거로 제헌헌법에 나와 있는 우리 대한국민이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선포한 사실을 들었다.

그의 판결대로라면 1948815일 대한민국 건국절이 부정당했다. 이는 문재인 등 좌파 세력들이 줄기차게 강조해온 ‘1919년 건국절 사관이다. 그가 대법관 재직 시절 내렸던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 판결은 박근혜 정권 당시 큰 논란을 낳았다. 이 판결을 확정할 경우 외교적 후폭풍이 예견되었다. 따라서 양승태 대법원장과 수많은 법원행정처 엘리트 판사들은 청와대, 외교부 등과 은밀히 협의를 하면서 이 사건 확정 판결 연기를 논의하기도 했다.

이것이 훗날 사법농단으로 비판을 받았고, 결국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구속되었으며, 수많은 판사들이 경징계를 당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민관 공동위를 꾸려 7개월간 검토한 끝에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다고 결론 내렸다. 개인 청구권은 살아 있지만 청구권 협정에 따라 행사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당시 민관공동위 위원장은 이해찬 총리였고, 문재인 민정수석은 멤버였다. 우리 정부는 그러나 한일 협정 당시 논의되지 않았던 위안부, 원폭 피해자 등 비인륜적 문제에 대해선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당시 발표로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는 청구권 협정으로 종료된 것이란 입장을 유지했고, 법원도 관련 소송들에서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2012년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을 뒤집고 청구권이 살아 있다는 해석을 내렸고, 이후 20181030, 김명수 대법원장을 포함한 13명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김능환의 판결을 따라 신일철주금이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윤석열 정부는 6일 우리 정부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공식 발표한다. 이에 대해 여야는 물론 피해자들까지 가세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왼쪽이 김능환 전 대법관, 오른쪽이 김명수 대법원장이다. 두 사람 얼굴이 너무나 닮았다. 네티즌들은 두 사람을 김 대법원장으로 알고 있었다.
왼쪽이 김능환 전 대법관, 오른쪽이 김명수 대법원장이다. 두 사람 얼굴이 너무나 닮았다. 네티즌들은 두 사람을 김 대법원장으로 알고 있었다.

필자는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 비슷해서 6일 커뮤니티에 글과 사진을 올렸다. “누굴까. 두 사람 다 맞추면 당신의 사법지식은 A+, 한 사람만 맞추면 B+, 두 사람 다 모르면 F. 정답은 왼쪽이 김능환, 오른쪽이 김명수다. 두 사람을 보니 '선을 판자도 위선이요, 악을 판자도 위선이다'는 말이 떠올려진다. 설마 두 사람 중 김능환이 선과 악을 판 위선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