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C논점]尹"김구가 공산주의에 가장 강하게 반대"…이영훈 교수 '김구의 유령'이 이 나라 상공을 배회
[JBC논점]尹"김구가 공산주의에 가장 강하게 반대"…이영훈 교수 '김구의 유령'이 이 나라 상공을 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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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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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대통령과 백범 김구.
이승만 건국대통령과 백범 김구.

김구 선생은 공산주의에 가장 강하게 반대하신 분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독립유공자 및 유족 158명과 8·15 광복절 기념 오찬을 하면서 백범 김구 선생을 이같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은 같은 편인데 왜 후세 사람들이 나누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건국론과 관련, “윤 대통령은 ‘1919년 건국론이나 ‘1948년 건국론등 일체의 건국론을 배척한다는 입장이라고 용산대통령실 관계자의 말로 입장을 전했다. 김구가 진짜 공산주의에 강하게 반대했고, 이승만과 김구는 화해와 협력을 해온 관계였을까. ‘1919년 건국론이나 ‘1948년 건국론까지 배척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가.

아래는 이승만 학당 교장이자 전 서울대 경제학 이용훈 교수가 201834일 펜앤드마이크에 게재한 칼럼이다. 제목이 김구의 유령이 이 나라 상공을 배회하고 있다는 글이다. 김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곁들인 글이다. <편집자주>

한 유령이 이 나라의 상공을 배회하고 있다. 때가 되면 나라의 지도자들은 그를 부르는 초혼굿을 벌린다. 다시 살아난 그의 말과 행동은 이 나라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영력의 주술이다. 그의 손짓에 따라 끝도 없이 긴 행렬이 죽음의 동굴로 향하고 있다. 민주당의 간부가 효창공원에 놓인 김구의 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할 계획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김구 선생이 꿈꾼 세계 평화를 주도하는 문화강국으로 나아가자고 역설하였다. 넋이 빠진 채 사지를 비틀며 어디를 향하는지 알지 못하는 좀비들의 구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끈 김구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여 그가 남긴 글을 세밀하게 읽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나는 그 몰()역사와 반()근대의 저()지성에 충격을 받았다. 김구는 1945년 해방의 소식을 듣고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하였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했던 그가 귀국 후 조금씩 달라져 결국 해방은 우리의 애국적 선열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선구적 거짓말은 세월이 흐르면서 국가적 진실로 둔갑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1937년 한 해 동안에만 국내에서 무려 3,600건의 크고 작은 무장독립투쟁이 있었다고 하였다. 뻔뻔스런 역사의 날조이다. 이 나라는 점점 역사를 상습 날조하는 북한을 닮아가고 있다. 김구가 뿌린 씨앗이다.

김구의 거짓말은 그의 반미(反美)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김구의 서운한 감정은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반미는 그 이상이었다. 그는 미군의 남한 점령은 부당하며, 하루 빨리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은 일본이나 독일처럼 세계평화를 해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는 미국의 신탁통치는 한국을 식민지로 병합하기 위한 의도라고 주장하였다. 이 대목에서 나는 숨이 막혔다. 나는 그가 반공주의자로서 찬탁에 깃든 공산화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반탁운동을 벌인 줄 알았다. 그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김구는 동시대 자국의 현실과 세계의 동향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동굴의 투사였다. 더없는 몰역사였다.

김구는 일제 하 국내에서 민족의 갱생을 위해 교육, 실업, 언론에 헌신한 선각자들을 친일파로 매도하였다. 사업을 일구기 위해서 어느 정도 총독부의 시정에 협력할 필요는 있었다. 그 고초와 번민은 중국 내륙에서 국민당정부의 보호와 지원 하에 있었던 임시정부의 요인들보다 덜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솔직히 말해 국민당정부의 충실한 식객이었다. 김구 스스로 나 자신의 중경(重慶) 생활은 임시정부를 지고 피난하는 것이 일이요, 틈틈이 먹고 잤다고 할 수 있다고 토로하였다. 그러했던 그가 한민당의 인사들을 민족의 박테리아라고 비난하였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미군정에 협조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김구는 근대에 대한 일말의 이해도 결여하였다. 대책 없는 반근대였다.

김구는 민족을 두고 영원한 혈통의 바다라고 하였다.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것도 이 혈통의 바다에서 이는 일시적 파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 화려한 수사는 물론 그의 것이 아니다. 당대의 문필 이광수의 대필이다. 어쨌든 김구의 사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단언컨대 혈통’, 곧 피의 순수 계통만큼 허구적인 것은 없다. 이념이 다르면 부모형제도 흩어지고 심지어 원수까지 된다. 이념이 같으면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누구와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그것이 선진사회에서 눈으로 보는 진실이다.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마음의 38을 없애자고 호소하였다. 그러면 위대한 소비에트혁명에 성공한 소련도 감동을 받아 물러날 것이라 하였다. 결국 김구는 순수 혈통의 부족정치를 지향하였다. 절망의 저지성이었다.

19479월 반탁운동이 종결되었다. 미국이 신탁통치 방침을 철회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한 것이다. 반탁운동의 구심으로 역할을 해 온 김구는 이후 방향감각을 상실하였다. 원래 그 역사의식과 지성수준에서 건국의 대업을 감당할 위인이 못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외친 부족정치의 호소력은 대단하였다. 그는 통일이 없으면 독립이 없다고 외쳤다. 사람들이 물었다. 소련이 북한을 점령해 있고 공산주의자들이 이미 사실상의 정부를 세웠는데, 실현성이 없는 주장이 아닙니까. 김구는 대답하였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아니라 옳은가 그른가가 문제이다.” 가없이 순진한 도덕정치였다.

김구는 5·10선거의 적법성을 부정하였다. 미군정 하에서 치러진 억압 선거라는 이유에서였다. 대한민국이 독립을 선포하는 날 그는 비분과 실망을 담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후에도 대한민국을 허물고 남북한의 총선거를 다시 하자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양성한 한독당의 당원은 저간에 벌어진 갖가지 테러의 주역이었다. 북한 공산체제로부터 추방당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이 울며 소리쳤다. “우리 선생님이 왜 저러시나.” 결국 김구는 그의 당원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후 전개된 역사는 그 젊은이의 극단적 선택이 옳지 않음을 증명하였다. 테러는 영구평화의 적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1948년 평양에 올라간 김구는 김일성에게 자신의 노후를 부탁하였다. 1967년 김일성이 어느 일본인과의 인터뷰에서 토로한 이 사실을 나는 믿지 않았다. 워낙 거짓말에 능숙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2004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쉬띄코프일기를 공간하였다. 거기에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렇게 교차 확인되는 사실을 믿지 않을 도리는 없다. 평양에 머문 김구는 머잖아 늠름한 군세의 인민군이 남한을 휩쓸어 버릴 것으로 예측하였다. 비록 그 전에 사망했지만, 김구의 예측은 적중하였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김일성이 김구의 노후를 살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자연히 소거될 존재였다. 그 인물이 어느 젊은이의 철없는 혈기로 영원히 죽지 않은 사령으로 승화하고 말았다.

그 혼백이 연례의 초혼굿으로 소생하여 이 나라의 국민을 순수 혈통의 부족으로 훈육하고 있다. 부족 수준의 지성일진대 연간 3,600회 무장독립투쟁의 날조쯤이야.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소리친 세계 평화를 주도하는 문화강국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근대문명의 철인들로부터 세계 평화는 자유민주와 자유통상과 자유국제연합의 조건으로 보장된다고 배웠다. 우리의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몰역사와 반근대의 저지성이 판을 치고 있다. 부족정치의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그 선구를 달린 김구는 결국 성공한 것일까. 여기까지가 이영훈 교수가 쓴 칼럼이다.

2023년 2월 필자와 인터뷰를 가졌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2023년 2월 필자와 인터뷰를 가졌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1919년 건국론이나 ‘1948년 건국론등 일체의 건국론을 배척한다윤 대통령 입장과 관련, JBC뉴스 견해를 곁들인다. 윤 대통령의 이 같은 입장은 좌파와 우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발언이다. 1919년을 건국절로 볼 것인가. 1948년을 건국절로 볼 것인가. 좌우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논란을 이어왔다.

좌파진영은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을 상해 임시정부 수립일인 1919413일로 보는 반면, 보수진영은 이승만 정부가 출범한 1948815일을 건국일로 보고 있다.

좌파진영은 지금까지 우리 헌법이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이때를 대한민국의 건국절이라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한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다.

반면 우파진영은 국가의 3요소인 국민과 영토, 주권을 모두 갖춘 현대 국가의 모습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보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에는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적혀 있다. 그것은 임시 정부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것이지 임시 정부 자체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가 세워짐은 영토와 주민을 합법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의 성립이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음을 말한다.

모든 건국은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줘야 한다. 1919년 건국했다는 것은 우리의 주장이다. 국제적으로 용인될 때 비로서 세계지도에 자기 국호와 국경을 가진 나라가 그려진다. 이것이 건국이다. 1919년의 임시정부는 이 같은 요건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머니 뱃속에 잉태되어진다. 잉태된 날을 생일로 볼 수 없다. 아기가 어머니 배에서 나와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를 생일이라한다. 임시 정부 수립일은 대한민국의 정신이 잉태된 때라고 할 수 있다. 1948815일은 대한민국이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 날이다. 1948815일이 대한민국의 생일, 건국절이다. 이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것은 당연하다.

역대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는 1948년을 기준으로 당시 건국 60주년 사업을 진행했다. 박근혜 정부는 국정역사교과서에 1948년 건국절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모색했고, 박 전 대통령은 1948년을 건국절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문재인은 2019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2019년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며 ‘1919년 건국을 규정한 바 있다.

윤 대통령의 건국론은 이도 저도 아닌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건국 운동이라고 퉁쳤다. 윤 대통령의 진짜 정체성과 역사정통성이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