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C 시론]박근혜·최서원 프레임의 교묘한 이론따위들
[JBC 시론]박근혜·최서원 프레임의 교묘한 이론따위들
  • JBC까
  • 승인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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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필자.

인간의 사상과 의식, 신념 따위에는 항상 이론이 성립되어야 한다. 사회과학 이론의 핵심은 가설에서 출발한다. 이론은 오류 가능성을 가진다.

이론은 상호 간의 혹독한 논리적 논박과 경험적 반증이란 비판에서 살아남는다. 이 살아남은 이론들이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하면서 하나의 이론으로 정착된다.

최서원 씨 문제로 옮겨오자. 최서원 씨는 국정농단 주범으로 7년 째 실형을 살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하 박근혜)은 중앙일보 회고록을 통해 그런 최 씨를 다시 짓밟아버렸다. 박근혜가 진짜 최 씨를 국정농단 주범으로 알고 있는가. 아님 지난 7년 전 언론과 수사 당국의 마녀사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예컨대, 최 씨가 국정농단주의라면, 이것이 타당한 이론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그녀에 대한 모든 총체적 사실관계가 입증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진 전제하에서 그녀를 냉혹하게 평가해야 한다.

물은 100도에서 꿇는다. 이것은 과학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상과 감정, 진실 따위는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최 씨가 국정농단 자라면 언론과 수사 당국의 선동만으로 인정될 수 없다. 이것은 박근혜를 끌어내리기 위해 만든 공작 조작 음모 사기 거짓이다.

언론과 수사당국은 최순실을 국정농단 주범으로 엮은 것을 그렇다치더라도 박근혜까지 최 씨를 탄핵과 국정농단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강한 뒤틀림이 온다. 그가 진짜 국정농단자인가. 사실 그는 국정농단 축에도 끼지 못한다.

감히 말하지만 최서원은 프레임 희생양이다.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를 보여준 후 코끼리를 떠올리지 마라고 하면 더욱 코끼리를 또올린다고 했다. 이것이 프레임의 전형이라고 설명했다.

최순실을 생각하지마하면 이미 국민 뇌리 속에는 최순실 비선실세’ ‘국정농단 주범’, ‘테블릿PC’ ‘탄핵 발발시킨 장본인’ ‘박근혜 피해자라는 사실이 연관되어 떠올려진다.

프레임에 갇히면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이것은 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반론이 끼어들 틈이 없다. 한번 각인된 사건의 프레임은 여전히 뇌의 늪에 빠져 있다. 바로 여기에 마녀사냥법의 악순환적인 프레임이 존재한다.

문제는 박근혜마저 그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언론과 수사 당국은 최서원이 장관과 청와대 수석을 임명했다니, 대통령 연설문을 입맛대로 고치고 국무회의·수석회의 일정을 바꿨다고 공격했다. 대통령은 장관·수석을 잘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비서실장까지 일주일에 단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

그런데 알고보니 최서원이 이들을 만나며 박근혜 대리 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최서원의 국정농단100% 맞다. 언론과 사법당국은 국민에게 이 같은 최서원 프레임을 인지시킨 후 그 다음 마녀사냥 프레임을 작동시킨다. 가짜와 선동뉴스를 통해 최서원을 악마화 시키는 것이다. 앞뒤 연결 관계를 억지로 끼워 맞춘 엉터리 보도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박근혜가 이상한 여자, 자격 없는 사람들과 모여서 소꿉장난 같은 국정을 해왔다는 논리를 깔아버렸다. 그 뒤에서 최순실 같은 사람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돈을 챙겼다는 사실이다. 기가막힌 최고의 소설작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최순실 소설을 썼음을 고백한다. 처음 최서원 사건에 대해 인지를 한 후 최서원을 봤을 때 그 다음부터 그가 외치는 억울하다단어에 토할 지경이었다. 이 때 나는 최서원을 향해 맹목적인 증오를 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최서원을 보면서 으로 확연히 구분지으려 애쓰는 이분법적 시각에만 빠져버렸다. 최서원을 이라 단정짓고, 방송과 글을 통해 그 분노를 쏟아냈다. 대중은 그 범죄를 천인공노 최악으로 봤다. 나는 글과 방송을 통해 그에게 좌절과 고통, 벌과 죄를 번갈아 주어야 한다고 외쳤다.

나는 애초부터 언론이 쏟아낸 거짓과 선동 수사 사법당국의 시각에 토를 달지 않고 받아들였고, 거기에 내 악의적 상상력을 교묘히 섞어냈다. 때론 이를 앵무새처럼 받아서 보도했다.

신문기자는 진실과 정의로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난 그 진실과 정의를 교활하게 이용만 해왔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 최순실 사건을 접했을 때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는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이 그럴 듯 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서원 사건은 다양한 전형들이 모두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것은 각종사건들의 지저분한 행위들이 뒤섞여 있는 상상력이다.

나는 박근혜의 탄핵과 잔혹한 마녀사냥을 보면서 최순실 프레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려면서 진짜 범인, 조작자, 음모론자, 악의 재생산자들의 실체를 보아버렸다.

회고록을 통해 최서원을 또 짓밟아버리는 박근혜의 잔혹성에 대해 지적하니, 마치 내가 최서원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 쯤으로 비난한다. 나는 최서원과 일면식도 없다. 그로부터 편지니, 그 딸로부터도 전화 받은 적도 없다.

내가 쓴 글과 방송을 끝까지 읽고 본 후 앞뒤 정황과 그 맥락을 파악한 분이라면 나에 대한 이런 비난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최서원의 입장을 변론하거나 무죄를 주장하는 글을 써온 게 아니다.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 여기에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그 최서원이라는 연관성. 여기에는 거대한 음모와 조작 선동 사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것은 최서원 미끼를 이용해서 권력 찬탈, 헌법파기, 체제전복이었다. 그 본질은 결국 좌익들의 민중민주주의 전환이 깊숙이 자리잡았고 나는 이에 대한 본질을 따지고 묻고 경계성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지난 7년 간 박근혜 탄핵무효와 무죄석방, 명예회복을 부르짖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이것은 가장 어려워 보이기도 하지만 가장 간단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야비하게도 그런 진실에 눈을 감아버린다. 실은 이 연관은 박근혜의 탄핵무효와 무죄와도 절대적 연관성이 있고, 띠지고 보면 탄핵무효무죄’, 박근혜의 명예회복 역설적 절규인데도 이를 박근혜 비난으로 몰아버리며 공격한다. 환장할 일이지만 굳이 이를 해명하고 싶지 않다.

나의 티깃은 이들이 아니다. 이를 실행한 실행자들이다. 언론과 사법 수사 당국에 묻고 싶다. 최서원을 둘러싼 여러 진술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검증도 없이 불확실한 것에 과학이라는 말이 쓰이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다면 검사와 판사가 망설이지 않고 과학입증만으로 사건의 유·무죄를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예측과 추측으로만 된 가설, 그것은 증거주의를 중시하는 재판과 수사의 한 모습이 아니다. 나는 최서원을 둘러싼 이런저런 수사와 재판을 보면서 사건의 본질과 잠재적인 개연성으로 인해 그럴 것이다란 조합을 엮어서 너무나 성급하게 악으로 규정짓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그렇다는 증거는 이들의 진술이고, “그렇지 않다는 것도 이들의 진술일 때 집행자들이 어떻게 판단하는지도 보았다. 이때 진술자와 엮인자들의 전형적인 위증과 은폐의 힘만 보였을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사법 수사당국과 진술인들 간의 거래기술이다. 이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는 왜 모두가 진술의 위증과 위증의 진술을 했었는지 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위증은 합리적일수록 당연히 더 끔찍하다. 죄인의 과오는 환상적인 본질이나 존재론적인 속성처럼 보일 수도 있다. 최순실의 변명은 프레임에 빠져버린 이상 그것이 설령 진실일지언정 무시 외면당한다.

최서원이 위증과 비난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애쓸수록 그것은 더욱 위증에만 짙어지고 진실에선 멀어지게 된다.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이 야비한 상호성은 절대 어떤 결정된 것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돌맹이를 물에 던졌을 때 풍덩 하고 빠졌는데, 나는 그 소리 말고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그 돌맹이를 물에서 건져 올린 후 그 돌맹이를 준 사람이 그녀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죄를 지었을 때 죄인의 눈에 비친 세계의 권력은 비대칭적인 두 개의 세력이 나뉘어져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법정 권력기관이며, 다른 하나는 군중이다. 평상시에는 전자가 후자보다 힘이 세지만 군중의 분노가 야기될 경우 그 반대가 된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단단한 권력기관이 군중으로부터 분노가 나올 경우 하나의 용광로로 되는 것이다.

군중은 공동체 전체를 다시 모을 필요가 없을 만큼 아주 막강하다. 이 두 사이에 오가는 일들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자극하기도 한다. 참으로 현기증나는 일들이다.

아마도 그 분노의 희생양은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막강한 권력 상징인 박근혜가 탄핵당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최서원 사건은 바로 그 프레임 화두를 아주 깊고 짜릿하게 던졌다.

박근혜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프레임에 또 걸려든 사람일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최순실의 국정농단인정과 최순실로 인한 탄핵이 비롯됐다는 논리는 박근혜 스스로 국정농단과 탄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꼴이다. 늘 강조해왔지만 이것이 탄핵의 강을 건넌 것이요, 그래서 이것은 반역의 역사편에 섰음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박근혜가 자신의 책 혹은 국민들에게 진실운운외침은 박근혜의 본심이 아닌 정치인의 전형 유행가 가사였다.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은 박근혜는 속물 정치인과 다를거야하면서 스스로 희망고문을 했었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회고록은 박근혜의 무능함 무책임 무분별 무식의 본질을 드러내주었다. 이를 통해 국민이 박근혜 환상과 희망고문에서 깨어나게도 해주었으니 한편으론 여간 고맙지 않다. 이제는 박근혜 환상과 프레임에서 깨어나서 자유대한민국 체제와 정통성 그 가치를 지켜 나아가야 한다. 어쩌겠냐, 이것이 자유대한민국에 태어난 국민의 팔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