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 팩트와 팩션
영화 덕혜옹주 팩트와 팩션
  • JBC까
  • 승인 2017.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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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덕혜옹주'가 오는 3일 개봉한다.

나는 지난 7월 말 언론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먼저 보았다.

'덕혜옹주'는 일본에 끌려가 평생 조국으로 돌아오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2009년 발간된 소설 '덕혜옹주'가 원작이다. 배우 손예진이 열연한 덕혜옹주는 ‘팩트’를 중심으로 한 ‘허구’다. 여기에 창작성까지 더해졌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팩션'(Faction)이란 말이다.

문제는 이 팩션에, 창작성과 허구가 진하게 나열되면서 관객들에게 '민족주의'와 '반일 감정' 요소들을 살며시 스며들게 한다.

일본의 잔혹성까지 드러내면서 관객들을 더욱 ‘비분강개’토록 했다. 

이 영화에서 팩션은 여러 장면이다.

독립운동가 김장한(박해일 역)이 덕혜옹주의 남자로 등장한 거 ▲김장한 등이 영친왕과 덕혜옹주, 이방자를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기도 ▲덕혜옹주가 일본의 조선 어린이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세운 거 ▲덕혜옹주가 일본에 강제 징용된 조선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을 한 거.

'팩션'의 하이라이트는 동경에서 일본 육사 졸업 후 일본 육군 중장으로 1943년 일본 제1 항공군 사령관이었던 영친왕의 독립운동과 독립군의 폭탄투척이다.

▲동경에서 일본 유력인사들을 향한 폭탄투척을 상정했는지 ▲폭탄투척 작전에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일본군의 총탄에 만신창이가 된 상하이 임시정부 요원 ▲그는 총탄을 맞아 죽어가면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일본군과 경찰이 덕혜옹주와 불사조 김장한 등을 쫓는 장면에서 펼쳐지는 양측의 전투 장면은 팩션의 압권이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그린 영화에선 이같은 창작과 허구적 무용담 장면을 개입시켜야만 영화의 재미와 감동을 이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 창작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이 영화를 본 자칭 영화평론가들도 이런 창작 상상적 장면이 오히려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창작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이런 장면들이 오히려 거북스럽게 다가왔다.

이런 불필요하고 억지적 장면으로 인해 자칫 인물의 왜곡과 오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일본인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일본에서 많은 사람들이 덕혜옹주의 삶을 알고 있다.

나는 영화 덕혜옹주가 조선황실을 말살시킨 일본의 잔혹성과 그 불편함을 한방 날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팩션의 감정적 오버와 남용이 자칫 일본인들에게 "역시 한국인들은 감정이 앞서"라는 인식을 심어줄지 걱정스럽다.

2008년 5월 일본인 혼마 야스코는 소설 '덕혜옹주'를 출간했다. 이 소설은 한국과 일본에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팩션의 정도와 범위다. ‘덕혜옹주’는 시대의 광풍에 정처 없이 흔들린 한 여자의 삶만으로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다.

나라를 잃으면 아무리 '옹주'라 해도 당한다는 그 평범함을 왜 팩션으로 이어지게 하지 못했느냐는 아쉬움이 남는다.  

덕혜옹주는 수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작고했다. 그녀는 27년 전만 해도 우리와 함께 호흡을 하고 살았다.

나는 영화 덕혜옹주에서 처럼 조선황실의 마지막 옹주 덕혜가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가서 기구한 삶을 살았다는 등 그녀의 삶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15년 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덕혜옹주의 기구한 삶을 취재를 했었다.

역사의 격량 속을 살아간 조선의 마지막 옹녀인 덕혜의 삶이 궁금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취재한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세상에 알려지고 입소문이 더해진 덕혜옹주의 기구한 삶과는 많이 달랐었다. 

덕혜옹주가 탄생(1912년생)했을 때 조선은 일본제국주에 한일병합(1910년) 되어 일본 손아귀에 들어갔다.

당시 덕혜만이 아니라 나라 잃은 조선인들은 덕혜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덕혜가 옹주였기에 더욱 기구한 삶을 살았냐고. 당시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들의 삶은 ‘핍박’이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덕혜옹주가 평범한 조선인들이 당한 핍박을 받았냐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 덕혜옹주가 먹을 거 입을 거 조차 없이 궁핍한 삶을 살았냐고?

영화에서 처럼 일본서 독립운동에 관여했다고?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던 덕혜가 한국인 학교를 세웠다고?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덕혜옹주가 당시 조선에 한번도 오지 못했다고?

아무리 덕혜옹주가 영화이고 팩션이지만 27년 전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이것은 팩션의 남용이 아닐까. 

당시 재일 한국인들 삶은 지옥 그 자체였다. 먹지도 입지도 제대로 못했던 일본의 핍박과 박해를 당하고 살아야만 했다.

나는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 대저택에서 살았던 덕혜가 그런 재일 조선인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거나 재일 한국인들을 돌보았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녀가 조선의 마지막 옹주라는 데 집착함으로써, 그녀의 삶이 마치 격량의 세월 기구함으로 이어져왔다는 감정적 함정에 빠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영화 덕혜옹주에선 덕혜가 일본의 대마도 영주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했고, 그 후 덕혜가 정신병을 앓았고, 소 다케 유키가 아내 덕혜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고 그려졌다.

덕혜를 떠올릴 때 ‘정략결혼’과 ‘정신병원 강제 입원’이라는 데서 더욱 그녀의 삶이 기구했을 거라, 판단하고 공감하고 아파한다.

덕혜는 과연 그랬을까. 덕혜는 어떻게 살았는가.

나는 과거 내가 취재했던 덕혜와 덕혜의 남편인 대마도 영주 소 다케유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2일 대마도로 향한다.

그 다음부터 이어지는 나의 글은 ‘팩션’(Factio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