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북한에 납치됐어요"
"동생이 북한에 납치됐어요"
  • JBC까
  • 승인 2017.10.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70대 일본인의 애끊는 호소, 35년 전 납북된 동생 보내주세요

添付画像           
지난 24일 오후 종로 한 음식점을 갔습니다. 한 70대 노구가 북한으로 납치된 동생을 찾고 싶어 한국을 방문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노구는 35년 동안 동생을 찾기 위해 뛰어 다녔다고 합니다. 그 음식점에는 그 노구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25명의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습니다. 

 북한 문제에 관심 있는 한국 분도 참석했습니다. 80년대 한국 지하 학생운동의 대명사였던 김영환씨도 있었습니다. 김씨는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문건과 서적을 통해 주체사상과 민족해방(NL) 노선을 학생운동의 주류로 성장시켰던 인물입니다. 김씨는 1991년 5월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난 이후 북한 민주화운동가로 전향했습니다. 열린북한방송 하태경 대표와 최성용 납북자 가족 협의회 이사장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띄었습니다.  일본 민주당 카자마 나오키 의원이었습니다. 구면 입니다. 지난 6월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대표 등 민주당 의원 일행과 함께 한국에 왔을 때 만났던 분입니다. 
  그와 악수를 건넨 후 자리에 앉았습니다. 헌데, 옆자리에 앉은 일본측 인사들이 명함을 주더군요. 일본 니가타시 의회 의원과 시 공무원, 그리고 니가타 참의원 보좌진, 납치된 동생을 찾기 위해 자비를 턴 일본 납치자 시민 단체 임원 등이었습니다. 순식간에 10여장의 명함이 테이블에 쌓였습니다. 
 
  일본 니가타 아사히 방송 기자도 명함을 줬습니다. 사실 저는 그 자리에 취재할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일본 지인과 카자마 의원이 한국을 방문했다고 해서, 인사차 들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 아사히 방송 카메라맨이 제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더군요. 졸지에 인터뷰 당했습니다. 대북과 납치자 문제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후 동생을 찾겠다는 그 진지한 분위기에 빨려들었습니다.
 
  참, 묘한 혼란 스러움을 느꼈습니다. 동생이 북한으로 납치 된지 35년. 이제 그 사건이 잊혀질 만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니가타시 납북자 문제 담당 실장과 시의회 의원, 심지어 국회의원까지 나서 그 동생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은  "북한에 납치된 오오사와를 우리나라로 되찾아오게 하기 위해 활동한다"고 했습니다. 

 카자마 의원은 "납치된 국민을 어떻게든 되돌아오게 하는 게 국가의 공복인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일본 문제에 관심 있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일본은 국회가 해산됐고, 8월말 총선거를 실시합니다. 
 선거 운동에 동참 하기도 시간이 부족하고 벅찹니다. 그런데 한국까지 와서 35년 전 납북된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앉아 있는 카자마 의원을 보니, 일본의 힘이 느껴졌습니다. 

 한국의 국회의원들, 입만 열면 국민을 속이고, 싸움질이나 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런 인간들과 비교하는 게 창피합니다. 

  그 묘한 열정적인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취재하기로 맘 먹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자료를 받았습니다. 한국어 자료였습니다. 질문도 던졌습니다. 
 
 35년전 납치된 생사도 모르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한 열정과 끈기에 놀랐습니다. 그들의 열정에 저도 무엇이든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흔히 한국에선 일본이 납치문제에 너무 집착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종로식당에서 본 그들의 집착은 집착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인 그런 복잡한 계산에서 나온 게 아니라, 정말 찾고 싶다는 인간의 순수한 그 열정의 집착이었습니다.
 그들은 북한에 납치된 오오사와를 되찾겠다는, 되찾아 주겠다는 기본적인 인간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미국 병사들의 유해 찾기에 온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미국 정부가 발벗고 나섭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그들 중 한명은 저에게 "한국에도 납치자가 많은 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다음은 24일 오후 작성했던 기사 입니다. 참고하세요.

 1974년 2월 24일 오후 6시30분, 일본 니가타(新潟)현 사도섬. 농업기술자로 사도섬에 파견 근무중이던 오오사와 타카시(당시 27세)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헤어진 후 흔적도 없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족들은 타카시를 찾기 위해 해안가 주변을 다 뒤졌지만 그는 오간데 없었다. 가족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섬에서 사라진 타카시가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파악했다. 당시 그가 식당에서 나왔을 때 건장한 청년 두 세명이 뒤를 따라갔다는 목격자의 증언도 나왔다. 

그로부터 35년이 흘렀지만 가족들은 타카시가 북한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모른다. 일본 니가타에 살고 있는 타카시 형, 오오사와 쇼이치(73)가 동생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찾기 위해 22일 한국을 찾았다. 

백발이 성성한 타카시는 카자마 나오키 민주당 참의원과 니가타 시 간부 및 시의회 인사와 니가타 실종자문제조사회 회원 십여명과 함께 방한 했다. 그는 이틀 동안 통일부와 국내 납북자 단체 등을 찾아다니며 동생을 찾아달고 호소했다. 

견디기 힘든 비극을 평생 안고 살아왔던 쇼이치는 일본인 납북자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가 도와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는 "동생은 북한에 납치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일본 정부가 납치 문제에 대해 입을 닫고 있기 때문에 가족이 직접 찾아 나섰다"고 말했다. 그는 "동생은 북한에 확실히 생존해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70년대초부터 일본인들을 납치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간첩을 일본인으로 위장시켜 한국에 침투시키던 북한은 공작원에게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교육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납치했다. 일본에 침투한 북한 특수공작원들은 해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일본인들을 유인한 뒤 선박에 태워 북한으로 끌고 갔다. 

남한에 정착한 한 탈북자는 "1970년대 당시 납치사건이 빈번했던 것은 대남사업 종사자의 세대교체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 납치자들의 최종 행적이 밝혀진 곳이 바닷가 근처라는 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타카시는 섬에서 실종됐다. 당시 북한은 공작선을 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일본 사람을 납치하기가 용이한 섬을 주된 납치 지역으로 선택됐던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카자마 참의원은 "북한의 여러 문제 중 특히 납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김정일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있어서도 지극히 중요하다"며 "8월말 일본 총선거 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후 정권을 잡으면 대북 문제에 대한 기본 방침을 잡고 납북자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이다"고 말했다. 

아라키 가즈히로 일본 납북자 단체 대표는 "지난 2002년 김정일은 일본의 납치자 문제를 인정했다. 그런데 납치 증언 등 목격자 나오지 않아 한국에 도움을 청한다.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 단체들이 손잡고 협력하는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최성용 납북자 가족 협의회 이사장은 "북한은 인도적 차원에서 타카시 등 납치한 사람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