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 복부에 칼 꽂은 그 야쿠자를 아시나요
역도산 복부에 칼 꽂은 그 야쿠자를 아시나요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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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 역도산 모습

1963년 12월8일 일본 도쿄 아카사카 뉴라틴쿼터 나이트클럽. 건장한 체구의 한 남자가 화장실 입구에서 야쿠자 조직원과 시비가 붙었다. 그 남자는 야쿠자 조직원이 건방지다며 뺨을 한대 때렸다. 그러자 야쿠자 조직원은 숨겨놓은 칼로 그 남자의 복부에 칼을 꽂았다. 피로 범벅이 된 배를 움켜쥔 채 쓰러지는 남자. 그가 바로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역도산(力道山)’이다. 이날 상처를 입은 역도산은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12월15일 역도산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전문>
 당시 역도산을 칼로 찌른 야쿠자 조직원은 야마구치조(山口組)와 함께 당시 일본 밤의 무대를 주름잡았던 스미요시가이(住吉會) 소속의 스물네 살 무라타 가쓰시(村田勝志)였다. 그는 역도산을 칼로 찔러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인물이다. 그는 일주일 뒤인 12월 15일 역도산이 사망하자 살해 혐의로 기소돼 7년형을 선고받고 1970년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만든 영화 '역도산'과 각종 자료에는 역도산이 심한 폭행을 하자 무라타가 방어 차원에서 역도산을 칼로 찌른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러나 일본 수사 자료와 당시 아시히 신문보도에 따르면 역도산은 뺨을 한대 때렸고, 그는 얼굴에 약간의 멍만 들었을 뿐이었다.


 ■역도산 뺨만 한대 때려
 때문에 역도산의 심한 폭행은 사실이 아니다.  무라타는 현재 일본 롯번기에서 야쿠자 조직 무라타구미 오야붕으로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무라타구미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조직명으로 일본 3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인 스미요시가이의 분파다. 야쿠자 조직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아마도 역도산을 칼로 찌른 후 자신의 이름을 딴 조직을 만들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일본 프로레슬링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무라타는 역도산 사망일을 즈음해 역도산 묘지를 찾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역도산 묘지에서 지난 일에 대해 잘못을 뉘우치는 지 아니면 형식상 묘지 방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역도산 얘기만 나오면 상당히 곤혹스러워 한다는 것.

   ■왜 역도산을 찔렀을까
 역도산이 죽은 지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선 수많은 의혹들이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다. 무라타는 왜 역도산을 찔렀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당시 일본 야쿠자 조직간의 관계를 짐작해야 한다. 1960년대 초 일본 동경 밤의 무대는 스미요시가이가 지배했다. 여기에 동경 긴자에서 조선인으로 주축된 활동했던 '동성회'(東聲會)도 있었다. 동성회 두목은 도쿄 밤의 경찰서장으로 불린 미치이 정건영(일본명 町井久之)이었다. 동성회는 조선인이 주축된 야쿠자였던 관계로 당시 도쿄 야쿠자 사회에서는 이단자로 취급받았다. 역도산은 이 동성회 두목 정건영과 의형제처럼 지냈다. 정건영은 역도산과 출생년도가 같았다. 역도산은 레슬링 흥행 차원에서 이들과 매우 절친했고, 정건영은 역도산의 스폰서 역할을 해줬다.
 ■역도산 제거는 치밀한 작전 
 당시 무라타에게 칼에 찔리자 역도산은 가장 먼저 정건영에게 전화를 걸어 "야쿠자가 나를 칼로 찔렀다"며 피격 사실을 전했다. 무라타가 역도산을 칼로 찌른 것은 우발적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온다. 이는 당시 야마구치와 스미요시 야쿠자간의 세력 싸움에 알 수 있다. 1960년대 초 야마구치는 도쿄에 진입하지 못했다. 오사카를 근거로 활동한 조직이었다. 야마구치가 동경 진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동성회의 도움이었다. 동성회는 당시 야마구치와 의형제 결연식을 가졌을 정도로 막연했다. 야마구치가 동성회간의 결연식이 가능했던 것은 야마구치의 핵심들도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그 핵심의 인물이 바로 역도산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스미요시는 바로 그 핵심을 제거하기 위해 무라타에게 역도산 살해지시를 내렸지 않았냐는 시각도 있다.
 무라타의 당시 직책은 일본 흥행 업무, 즉 조직을 알리는 임무였다. 스미요시가이는 동성회와 대립각을 세웠던 최고의 라이벌 조직이었다. 역도산은 스미요시가이 나와바리(구역)인 아카사카에서 사고를 당했다. 단순한 사고였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박치기왕 김일(왼쪽)이 세계 챔피언에 등극후 스승 역도산 사진 앞에서 챔피언 벨트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역도산 업적 재평가
 무라타는 경찰 조사에서 "절대 죽일 생각은 없었다. 사소한 시비가 붙어 찔렀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역도산을 찌른 후 달아났고, 뒤쫓아 온 동성회 부두목 노쿠치까지 칼로 찔렀다. 역도산이 사망하면서 동성회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스미요시가이가 동경 최고의 조직으로 급부상했다. 또 동성회와 스미요시간의 대전쟁을 멈추도록 중재한 야마구치도 큰 선물을 받았다. 바로 스미요시가이의 묵인 하에 동경 입성에 성공한 것이다.  역도산 죽음이 우발적이 아니라 야쿠자간 세력 다툼으로 인해 의도됐다는 냄새를 풍기는 대목이다.
 무라타는 그후 이 사건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다. 무라타는 도쿄 롯번기에 활동을 하고 있지만 몇년전 한국의 한 기자와 통화 한 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주변에선 여전히 이런 소문이 있다.  무라타가 역도산 죽음과 관련,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무라타가 책을 냈을 경우 역도산 사망과 관련, 어떤 증언들을 쏟아낼지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일본의 한 관계자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살아 있는 야쿠자들은 역도산이 야쿠자 조직원을 마구잡이로 폭행해 방어 차원에서 역도산을 칼로 찌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기정사실화했다"라고 말했다. 역도산 마지막 제자 고트네씨는 "역도산의 묘비 고향을 찾아주는 것도 중요지만 역도산 왜곡을 바로잡는 게 더 급선무"라고 말했다. 한국에선 역도산은 영화 역도산으로 인해 난폭꾼 이미지로 비쳐지고 있다. 살아 생전 김일씨는 "역도산은 일본에서 영웅으로 인정하지만 한국에선 3류 깡패로 인식한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고 밝힌바 있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 사회학 박사 출신인 유연미씨는 "한국에서 역도산 업적을 재평가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라타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