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 죽음 미스터리-끝-
역도산 죽음 미스터리-끝-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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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에게 죽음 의혹 세가지, 이노키가 왜

오토바이를 즐겨탔던 역도산

야쿠자는 왜 역도산을 찔렀을까.

1963년 12월8일 발생한 이 사건은 5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미스터리다.

우선 이 사건이 사소한 시비 끝에 일어난 우발적 사고였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역도산을 칼로 찌른 야쿠자 조직원은 야마구치조(山口組)와 함께 당시 일본 밤의 무대를 주름잡았던 스미요시가이(住吉會) 소속의 스물네 살 무라타 가쓰시(村田勝志)였다.

그는 역도산을 찌른 후 달아났고, 뒤쫓아 온 동성회 부두목 노쿠치 마사히치까지 칼로 찔렀다.

당시 노쿠치 포함한 네명의 결사대는 역도산이 칼에 찔렸다는 소식을 듣고

무라타를 잡기위해 그 조직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9일 새벽 스미요시가이 조직원들에게 붙잡혔다.

스미요시가이가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던 듯한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무라타

이때 동성회 부두목급인 노쿠치가 그 조직원의 칼에 찔렸다.

노쿠치는 창자가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

그는 큰 병원으로 옯겨져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후유증으로 인해 고생을 해야만 했다.

노쿠치가 칼에 찔리면서 동성회와 스미요시가이 간에는 피할 수 없는 대전쟁이 예고되었다.동성회는 수백명의 조직원을 모았다.

스미요시가이도 동성회 공격에 대비하였다.

경찰은 양측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역도산 자택을 비롯해 동성회와 스미요시가이 본거지에 경찰 병력을 대대적으로 투입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투입되었다고 해서 전쟁이 곧바로 멈춰지지는 않았다.

두 조직은 이틀 동안 서로 결투를 벌였다.

일종의 국지전이었다.

이 내전은 또 한 사람의 오야봉에 의해 멈춰줬다.

당시 정건영과 의형제를 맺은 다오카였다.

다오카는 두 조직이 전쟁을 벌일 경우 엄청난 피해가 예상된다며 양측에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무라타를 역도산에게 보내 사과케 한다는 것이었다.

 

동성회측은 이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역도산에게 사과하러 간 무라타는 동성회측 조직원들에게 붙잡혀 약간의 폭행을 당하였지만 큰 일은 없었다.

이같은 극적인 타협이 가능했던 것은 역도산 상처가 경미했기 때문이다.

역도산은 전치 2주였다.

또 역도산은 두 세력간의 전쟁을 반대하였다.

그러면 마치 역도산이 야쿠자와 깊이 연관 있다는 오인을 받을 수 있기 떄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야쿠자 세계에서 말하는 ‘데우치’(화해 표시로 박수를 치며 끝내는거)를 하면서 화해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JAL 항공에서 내려고 나오는 역도산. 뒤 따라오는 사람이 안토니오 이노키

15일밤 10시쯤 역도산이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역도산은 무라타 칼에 찔린 하루 뒤인 9일 일본 동경 산노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때가 월요일이다.

산노병원에 간 것은 역도산과 병원장간의 친분때문이었다.

또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큰 병원에서 치료받는다면 괜한 요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고, 천하의 역도산이 칼에 찔렸다면서 팬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치 2주 상처에 대한 치료는 극비리에 했다.

역도산은 병실에서 프로레슬링 흥행 대책 회의도 주재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복막염을 일어났다.

복막염 상태가 악화되면서 재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15일 오후 2시 30분 시작해 4시 무렵에 끝났다.

역도산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잠든 상태였다.

의사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안심시켰다.

그래서 역도산 가족과 제자들은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그때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역도산은 그들이 저녁 식사하러 간 사이 호흡곤란에 고통스러워하면서 사망했다.

역도산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병원 병사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2월 9일 새벽에 실시한 수술은 잘됐고, 순조로운 회복 단계였다. 하지만 14일 저녁부터 복막염을 일으켜 일반적인 상태가 차츰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15일 오후2시30분 재수술에 들어가 4시에 종료됐다. 수혈을 했고, 약간의 차도를 보였으나 오후 9시 급격하게 쇼크 상태에 빠졌다. 모든 치료효과 없이 오후 9시 50분에 불행한 전기를 맞았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역도산 사망 원인은 화농상 복막염.

야쿠자의 칼에 찔린 역도산은 소장에 상처를 입어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그 부작용으로 동연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도산은 수술후 회복했고, 부작용이 일어날 만한 다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건강을 되찾고 있던 역도산의 갑작스러운 상태 악화와 2차 수술.

과연 12월 8일~15일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일주일 동안 역도산에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수술 후 의사의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물과 탄산음료는 절대로 마시면 안된다.

그런데 역도산이 탄산음료를 마셨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셔선 안 될 탄산음료를 섭취한 것이 복막염을 유발한 직적적인 원인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며 역도산에게 탄산음료를 준 사람은 누구일까.

 

제자 중 안토니아 이노키가 역도산에게 탄산음료를 직접 건내준 사람으로 의심받기도 하였다.

수술한 후 갈증을 느낀 역도산이 탄산음료를 달라고 하는데 누가 거역하겠는가.

이노키는 그런 소문에 억울해 하였다.

아무도 주지 않았다면 역도산이 일어나서 그것을 직접 마셨단 말인가.

그러나 역도산은 의사에게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탄산음료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면 북막염은 왜 갑자기 일으켰는가.

역도산 죽음에 대해 일본 의학계에서조차 복막염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서구 미인들을 들어올리는 역도산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원인이었고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었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의사는 “마취제를 보통 사람의 두배로 사용하였다”라고 증언했다.

프로레슬러는 일반인과 다른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마취제량을 늘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마취를 했는지 마취진료 카드가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다.

왜 제출되지 않았을까?

역도산 사망을 둘러싼 의혹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양산됐다.

언론은 마치 특종 경쟁이라도 하듯 ‘역도산 사망 미스터리’를 다루었다.

이로 인해 갖가지 억측과 추측이 쏟아졌다.

그런 기사를 보면 역도산 죽음에 어떤 음모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는 역도산 사망 원인과 사인에 대해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복막염의 원인이었던 탄산음료를 누가 왜 줬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탄산음료 얘기가 나왔느냐는 점이다.

누군가 줬고 그래서 마셨기 때문에 억측과 추측이 음모론으로 확대 재생산된 점이 없지 않다.

역도산 사망과 관련해 외부론도 있다.

 

방송에서 증언하는 필자. 맨 오른쪽

이는 민족 문제다.

역도산은 민족 문제에 날로 관심을 가졌다.

특히 역도산이 북한 김일성에게 고급외제차를 선물했다.

1963년 1월 한국을 극비 방문 했다.

역도산은 남북한 통일을 갈망했던 민족주의자로 변신해 갔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역도산은 남북 공동으로 프로레슬링 대회를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코자 하였다.

나아가 역도산은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는 북한 선수단의 경비를 제공키로 하였다. 때문에 남북이 화해하고 통일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의 보이지 않는 세력이 미국의 중앙정보부(CIA)와 짜고 누군가에게 역도산을 살해하도록 교사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는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숨긴 채 일본 영웅의 자리에 오른 그가 조국으로 눈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데에 따른 의문이다.

이는 당시 국제 정세와 맞물린 해석이다.

당시 역도산이 남북 화해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 미국이 암상을 교사하였다는 것이다.

비이성이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실제로 국가 권력이 개입하는 음모와 공작이 판쳐 온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살아생전 역도산 묘지를 방문했던 박치기왕 김일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재일 한국인 영웅 역도산.

일본 역대 인물중 최고의 영웅중 한명이었던 역도산.

한국은 여전히 역도산을 외면하고 있다.

역도산의 아이러니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