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동 백작 김동회 옹 그를 기억하며
소공동 백작 김동회 옹 그를 기억하며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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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전후해 국내 주먹세계를 주름잡았던 김두한(작고)씨의 친구이자 종로파의 전설적 주먹으로 잘 알려진 김동회씨를 기억하십니까. 드라마 '야인시대' 혹은 김두한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김씨는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김씨는 1930년대 후반 김두한씨와 세력다툼을 벌이던 일본 하야시패의 중간보스로 있다 동갑내기인 김두한씨와 의기투합, 평생지기로 지냈습니다.

 김씨는 1947년 반탁운동을 하다 좌익인사 암살 사건 등에 연루돼 사형을 선고받은 뒤 가까스로 풀려나는 등 암울한 시기를 살았고 말년에는 위암을 앓다 지병이 악화돼 2004년 8월 24일 오후 6시5분 숨을 거뒀습니다. 향년 86세.

 살아 생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김씨와 커피를 마시며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래는 김옹이 살아 계실 때 취재한 내용입니다. 그는 정말 멋쟁이 협객이었습니다.

 

소공동 백작

김동회옹의 노년기 '나와바리(〓구역)'는 서울 소공동이다. 지난 6년간 무궁화 5개짜리 롯데호텔 커피숍에 개근하다시피 했다. 매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하루 4시간씩 이곳에 앉아 있다. 넓은 커피숍 창가 구석진 곳이 그의 지정석이다.

이곳에서 그는 수많은 후배를 만났다. 동년배인 '당계' 윤봉선옹도 있지만 정점수(76) 조일환(67)씨 등 인생의 황혼녘에 만나는 사람 대부분이 후배들이어서 그의 말투는 자연스럽게 하대를 한다. 얼마전 강남구 신사동의 한 아귀찜 집에서는 양은이 후배(조양은씨·53)도 만났다. 조씨는 "큰형님 오래 사셔야 합니다"며 김옹을 껴안고 인사했다.

그는 정장 위에 바바리 코트를 꼭 걸친다. 나이 때문에 한기가 드는 까닭도 있지만 바바리 코트는 외투자락 휘날리며 장안을 주름잡던 지난날 '협객시대' 이후 수십년 동안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김두한씨는 '남자의 머리는 왕관'이라며 생전에 머리 손질에 정성을 다했어. 대장부라면 외모부터 깔끔해야 돼." 김동회옹은 하얀 와이셔츠에 붉은색 등 강렬한 넥타이를 즐긴다. 바지 주름은 칼처럼 날카롭게 잡고 다닌다. 지난날 수십차례 '전투'를 치를 때도 그는 의관이 반듯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옷장 속에는 현재 중절모 5개, 바바리 코트 4개가 있다.

#'설프림차'를 마신다

커피를 일본말로 '고히'라고 부르던 시절부터 그는 반세기 넘게 하루 평균 다섯잔씩 커피를 마셨다. 그의 커피는 '설프림차'라고 하는 편이 옳다. 설탕과 '프림(크림의 잘못된 말)'을 5봉지씩 넣어 마시다 보니 커피 고유의 향과 맛을 논하기 힘들다. 하지만 김옹이 커피숍 양지바른 코너 '지정석'에 앉아 음미하는 '설프림차'는 어떤 커피보다 맛있어 보인다.

"이렇게 마셔야 피로가 풀려." 커피뿐 아니라 일상 식생활도 별나다. 맵고·짜고·달게 먹어야 성에 찬다. 의사들이 말하는 건강비법과 전혀 반대다. 갈비탕도 소금과 고춧가루를 한숟가락씩 가득 쳐 휘휘 저은 후 먹는다.

"짜고 맵게 먹으면 건강에 더 좋아." 그는 하루에 4시간 자고 20시간 활동한다. 젊었을 때부터 그랬다. 선천적인 강골에 근면성도 타고났다.

 

#"커피값은 내가 내요"

롯데호텔 커피 한잔 값이 7,500원이다. 김옹은 한달에 500명 이상의 사람을 여기서 만나고 커피값은 모두 자기가 낸다. "나를 보러 왔는데 커피 한잔 대접하지 않을 수 있나."

그러다 보니 한달 평균 커피값이 무려 500만원이나 된다. 뿐만 아니다. 밥값도 그만큼 든다. 하지만 후배들에게 계산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자식뻘, 손자뻘 되는 후배들도 대선배 앞에서 감히 식대를 계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김두한이나 김옹은 모두 바람처럼 살아왔다. 그에게 커피값·식사값을 감당할 만한 돈이 있을 리 없다. 다행히 후배와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이를 모아줘 '큰형님' 체면을 살려주고 있다. 의리의 사나이들이다. 그들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김옹을 '큰형님'이라고 깍듯이 호칭한다.

 

#두주불사 '양김씨'

소싯적 김옹의 주량은 끝이 없었다. 소주·막걸리·맥주·양주 등 주종도 불문했다. 종로의 한 술집에서 술을 바닥내자 술차가 쏜살같이 달려왔다면 믿을까. 대체 누구와 술을 마셨기에 그 지경이었을까. 김두한이다. '둘이 대작하면 종로에 술이 바닥난다'는 소문은 지금도 전설적인 얘기로 전해온다. 요즘은 한두잔밖에 못한다. 많이 마시면 숨이 가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배는 하루 한갑반을 피운다. 습관도 독특하다. 필터를 항상 물에 적신 뒤 손가락으로 물기를 툭툭 털어내 불을 붙인다. 니코틴 제거용이라나. 김옹은 올해 담배를 처음 끊어봤다. 지난 7일 단 하루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긴 금연기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예의 '물담배' 흡연을 다시 시작했다.

"몇년 더 살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못하면 스트레스만 더 쌓여. 내게는 금연이 오히려 해로운 것 같아." 김옹은 아직도 충치 하나 없다. 병원이란 곳도 지난해 말 난생처음으로 구경했다. 지난해 12월 초 경기도 부천의 <야인시대> 세트장과 김두한 묘지를 잇달아 방문했다가 된통 독감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죽은 김동지 덕분에 그때 주사도 처음 맞았어. 다 그 사람의 '선물'이야." 동갑내기인 그들은 1930년대 후반에 처음 만나 평생지기 우정을 나눴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게…

김옹은 서울 녹번동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다. 그의 가족들은 15년 전에 모두 미국으로 이민갔다. 아내 전옥숙씨(73)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뒀다. 아들이 목사고 아내는 권사다. 김옹을 비롯해 사위와 딸까지 집안 전체가 기독교 신자다.

"미국은 창살없는 감옥이야." 김옹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15년을 지내다 지난해 초 한국에 눌러앉았다. 평생 가깝게 지낸 동지·후배가 그리워 그는 가족 대신 '독거노인' 신세를 택했다.

김옹의 고향은 충북 괴산군 청천이다. 학교는 청천보통학교 1학년 반학기만 다녔다. 그러나 한학을 공부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한글과 한문을 일찍 깨쳤다. 일어는 유창하다. 영어도 꽤 잘한다. 유도가 5단이다.

'그저 모든 사람들이 다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