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묘살이 끝낸 고 장준하 선생 아들 호권씨
시묘살이 끝낸 고 장준하 선생 아들 호권씨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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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 끝낸 장준하 선생 장남 호권 씨

“부친 묘를 두 번이나 여는 큰 죄 지었으니, 시묘 살이 했습니다”
시묘 끝내는 날 김두한 장남 경민 씨도 장 선생 묘소 찾아

고(故) 장준하 선생의 장남 호권 씨가 유해가 안장된 파주시 장준하공원 내 묘지 묘비 앞에서 지난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고(故) 장준하 선생의 장남 호권 씨가 유해가 안장된 파주시 장준하공원 내 묘지 묘비 앞에서 지난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아버님 곁에 더 있고 싶지만 시묘 살이는 오늘(8일)까지만 하고 끝내려 합니다.”

유신독재에 맞서다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1918-1975)의 장례가 치러진 지난달 30일부터 장 선생의 묘소가 있는 파주시 장준하공원에서 시묘 살이를 했던 큰아들 호권 씨(64).


그는 지난 8일 동안 이곳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며 아침·저녁으로 밥과 나물, 국과 술을 묘소에 바쳤다. ‘부모상을 당하면 자식이 무덤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살며 산소를 돌본다’는 시묘를 장 씨가 시작한 것.


장 씨는 8일 일간경기와 단독으로 만나 “다시는 아버님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유골에 대한 정밀감식을 한 것이다. 하지만 묘를 두 번이나 여는 큰 죄를 지어서 시묘를 통해 불효에 대한 벌을 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故) 김두한의 장남 김경민 씨가 장준하 선생 묘소 앞에서 넋을 기린 후 절을 하고 있다. 
▲고(故) 김두한의 장남 김경민 씨가 장준하 선생 묘소 앞에서 넋을 기린 후 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장 씨의 시묘가 길어지자 유신독재에 맞섰던 민주화단체 회원들이 찾아와 시묘를 끝내주길 바랐다. 민주화단체 회원들은 “시묘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자유 민주화를 위해 함께 나아가는 게 장 선생님의 뜻일 것”이라며 시묘를 중단해 줄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8일 동안 텐트에서 기거하면서 장 씨의 건강도 많이 악화됐다.

이에 따라 장 씨는 “8일까지만 시묘를 하기로 했다”면서 민주화운동 동료들과 함께 텐트 주변에 빼곡히 쌓여있던 술과 물병 등을 승용차로 옮겼다. 장 씨는 “자식이 불효에 대한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시묘를 하면서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아버님의 뜻을 헤아려 봤다”고 말했다.

고(故) 김두한의 장남 김경민 씨가 장호권 씨에게 위로의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고(故) 김두한의 장남 김경민 씨가 장호권 씨에게 위로의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장 씨는 지난 3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 겨레장 발인식을 치른 뒤에야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님이 돌아가셨지만 얼마나 화가 머리끝까지 차 있었던지 눈물이 나질 않았다”면서 “38년간 참아온 울음이 그날 터진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날 장 씨가 시묘를 끝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고(故) 김두한(1918-1972)의 장남 김경민 씨(59)도 장 선생 묘소를 찾았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난해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김두한은 지난 1972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져 서울의 한 병원에서 작고했다.


김 씨는 “당시 중앙정보부에 두 차례 끌려가셔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던 아버님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지병이 악화돼 작고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장 선생님과 아버님은 같은 연령이신 데다 아버님의 묘소도 파주시의 한 공원묘역에 있어 두 분이 저 세상에서도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고 계실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민 씨는 장호권 씨와 함께 오는 8월 초 민주화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작고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