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와 정약용
손학규와 정약용
  • JBC까
  • 승인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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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손학규 전 대표가 20일 정계복귀를 공식 선언했다. 2014년 7·30 수원 보궐선거 패배 다음날인 7월31일 정계은퇴를 선언, 전남 강진에서 칩거 생활을 한지 2년2개월 여 만이다. 

손 전 대표는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정치와 경제의 새판짜기에 저의 모든 걸 바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이 일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겠다"며 "국회의원, 장관, 도지사, 당 대표를 하면서 얻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겠다. 당적도 버리겠다"고 밝혔다. 

이날 손 전 대표의 정계 복귀 선언을 지켜보면서 의아스러운 게 있었다. "손 전 대표가 언제 정계를 떠났었는가?" 

정치인이야 그만 둘 때도, 또 복귀할 때도 명분이 뒤따라야겠지만 손 전 대표의 정계복귀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손 전 대표는 그간 자신의 정계복귀를 둘러싸고 발언 수위를 계속 높여왔다. 

지난 5월 광주 5.18 기념식에서 정계 복귀를 강하게 시사했었다. 그후 며칠 뒤 일본 게이오대 특강을 마친 뒤에는 "새그릇을 만들기 위한 정치권의 각성과 헌신, 또 진정한 노력이 필요히다"고 '새판짜기'에 '새그릇'을 첨언해 새바람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어 지난 7월29일 전남 해남군 해남문화원에서 열린 지지자들과의 모임에서는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오늘 얻은 용기를 국민께 꿈과 희망으로 돌려드리겠다"고도 했다. 

손 전 대표는 2014년 7·30 재보궐선거 낙선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후 전남 강진행을 택했다. 그는 전남 강진 백련사 뒷산 토굴에 새 둥지를 틀었다. 16.5㎡ 남짓으로 스님들이 사용해 오다가 비워둔 이 작은 토굴에서 칩거해왔다. 

그러나 2년 2개월여동안 그가 거기서 어느 정도 기거했는지 모르겠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한정식 식당에서 손 전 대표와 두차례 조우했던 적도 있다. 

그에게 '직구'를 날렸다. “강진에 계셔야 할 분이 이곳은 어쩐일이신죠”라고 물었더니 그는 약간 멋쩍어 했었다. 앞서 그는 서울 종로 수송동의 한 빌딩에 서무실을 두고 안팎으로 움직였다. 때문에 손 전 대표의 정계복귀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그는 기거지만 전남 강진일 뿐, 사실상 알게 모르게 서울과 강진에서 정치 활동을 해왔다. 그는 강진에서 수많은 정치인을 만났다. 

이날 정계복귀를 선언한 손 전 대표는 다산 정약용을 수차례 운운했다. 다산은 조선 최고의 학자로 손꼽힌다.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기거했었던 정약용은 그곳에서 수많은 서적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손 전 대표가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사학계 일각에선 다산의 강진 유배론에 대해 논란도 적지않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간 게 아니다는 것이다. 다산의 처가댁이 전남 강진(해남)이다. 다산은 그곳에서 풍류를 즐겼다는 설이다. 다산이 강진에서 각별하게 지냈던 사람은 백련사에 있던 혜장선사였다. 

백련사는 손 전대표가 칩거했던 토굴이 있다. 그리고 다산은 강진만이 한눈으로 내려다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하는 다산초당에서 10년간 기거한 것도 논란이다. 1957년 강진군이 복원한 이곳에서 다산이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권에 달하는 서적을 집필했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사학계 일각에선 워낙 산골이라 낮에도 호롱불을 켜지 않고는 글을 적을 수 없는 초가산가에서 500여권을 집필하기란 사실상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손 전대표가 이날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굳이 다산을 들먹인 것은 다산론을 자신의 정치사상과 결부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해석된다. 그가 정치복귀를 선언한 이상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날마다 새로운 정치인 손학규가 되기를 바란다. 

20일 정계복귀를 선언한 손 전 대표. 다산이 1801년 강진으로 유배 오면서 처음으로 묵었던 주막 사의재. 그곳의 막걸리는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손 전대표에게 사의재 막걸리 같은 정치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