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전처 성혜림 한국망명 비화
김정일 전처 성혜림 한국망명 비화
  • JBC까
  • 승인 201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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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림 친오빠 성일기씨가 털어놓는 가족사-2탄-

살아생전 성혜림 모습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 성혜림(1937-2002)이 남한으로 오고 싶어했다.

친오빠 성일기씨(81)는 필자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성혜림이 남한으로 오고 싶어 했는데 아들 김정남 때문에 결국 못왔다”고 밝혔다.

성씨는 “성혜림은 평소 서울을 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북한이 망하면 김정남이 자연히 엄마인 성혜림이 있는 쪽으로 망명할 것을 염두해 두어 서울에 망명신청을 하지 않았다. 김정남이 모스크바로 오는 것은 가능해도, 서울로 오는 것은 남과 북의 이념상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혜림은 모스크바 망명 후, 김정일과의 소홀한 관계 때문에 심한 노이로제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필자에게 성혜림 비화를 털어놓는 성일기씨 

그는 “성혜랑(성혜림 친언니) 역시 동생이 망명해 눈치가 보여 성혜림을 따라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둘은 모스크바에서 고급 아파트 두 채를 터 함께 생활했다. 생활비 지원은 북에서 조금도 대 주지 않았고, 모두 김정일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갖다 준 돈으로 지냈다. 둘과 성혜랑의 딸까지 넉넉하게 지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성씨는 성혜림의 동거 비화도 전했다.

“혜림이가 워낙 예뻐 소설 ‘땅’으로 알려진 월북작가 리기영이 어렸을 때부터 혜림이를 며느리로 점찍어 놓았다. 리기영은 장남과 결혼시켰으나 결혼한지 얼마 안돼 리기영의 장남 친구인 김정일이 맘에 들어 해 이혼 뒤 김정일과 동거를 했다”

 

성혜림 아들 김정남

성혜림은 김정일과 동거후에도 연극영화 대학을 졸업 하였다.

그뒤 예술영화인 <분계선마을> 을 시작으로 북한 최고의 배우로 성장하게 되었다.

성씨는 “성혜림이 연기를 잘 하기도 했으나, 김정일의 입김도 크게 작용해 주연을 따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성씨는 혜림이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동거를 하게 된 계기도 밝혔다.

 

살아생전 성혜림 모습

“혜림이가 김정일과 동거를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성혜림이 캄보디아에 봉사활동을 갔는데 캄보디아에서 영어로 유창하게 말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자 고위급 관리의 눈에 들어, 성혜림에게 여러개 CF를 제공했다. 이 때 김일성이 이런 식으로도 외교가 되는구나 하여 성혜림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김정일과도 동거를 했다.”

그러나 연예인인데다가, 이미 결혼 경력이 있는 성혜림을 김일성이 인정하지 않아 끝까지 결혼은 못했다. 성혜림은 여기에 대한 스트레스로 모스크바로 건너갔다는 게 성씨의 증언이다.

성씨는 성혜랑과의 만남 성혜림과의 전화통화 비화도 털어놨다.

 

김정일(왼쪽)과 성혜랑(뒷줄 왼쪽) 가족 사진

오른쪽 김정남, 뒷줄 가운데 딸, 아들 이한영

“성혜랑과 1993년 모스크바, 1996년 파리에서 국정원 사람을 대동한 채 각 일주일간 만났다. 성혜랑과는 매일같이 만났으나, 성혜림은 사람들을 심하게 경계해 성일기를 그리워하면서도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나 성씨는 “혜림이와는 하루에도 스무번을 넘게 자주 통화해서 만남지 못하는 아쉬움을 전화를 통해 달랬다”고 했다.

성씨는 “전화는 모두 성혜림과 성혜랑 쪽에서 걸려왔다. 성일기는 성혜림이 2002년 죽기 전 무렵에도 통화를 했다. 성혜림은 ‘오빠 건강해야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성씨는 “전화를 통화할 때면 혜림이가 감정이 북받쳐 울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성씨는 성혜랑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성혜랑과의 만남 역시 반세기만의 만남이라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 한참 동안 둘 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성혜랑을 통해 성씨는 그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의 제사를 날짜를 바꿔 지낸 것을 아는 등 여러 가지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억장이 무너졌다.”

성씨는 “혜랑이는 혜림이가 죽은 뒤, 파리로 건너가 현재 파리에서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고 밝혔다.

 

1940년대 후반 성혜림 가족 사진

그는 성혜랑은 문학을 좋아했다고 한다.

“성혜랑은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실력이 수준급이어서 어머니인 고 김원주 여사가 피아니스트를 시키고 싶어했으나 성혜랑이 싫어했다. 성혜랑은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현재도 글을 쓰고 있다. 해방 이후의 한국문학을 모두 섭렵했으며, 책을 좋아해 나에게 도스도예프스키의 제대로 된 전집을 구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성씨는 혜랑이가 한국에 오지 못했던 게 못내 아쉽다고 했다.

“노무현 정권 당시 윤이상은 남쪽으로 오게 하고 성혜랑은 받아주지 않은 것이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 당시 혜랑이는 한국에 정말 오고 싶어했다.”

성혜랑이 한국으로 왜 오고 싶었던 것일까.

 

살아 생전 이한영

이한영을 아는가.

1960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한영은 78년 모스크바 외국어대학 어문학부을 전공한 엘리트 출신이다.

프랑스어 연수를 위해 스위스 제네바로 들어간 뒤 82년 9월 서방으로 탈출, 같은 해 10월 한국에 망명했다.

87년 12월 KBS 국제국 러시아어 방송 PD로 입사한 그는 저서 ‘김정일 로열패밀리’를 출간하고 북한 독재정권의 실상을 세상에 고발했다.

그러던 중 1997년 2월 15일 밤 9시경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북한 공작원 2명에 의해 총기로 피격당해 10일 뒤 사망했다.

그 생모가 바로 성혜랑이다.

성혜랑은 왜 남한으로 오고 싶어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