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탄-'문재인도 모르는 사노맹' 박노해와 김문수
-제3탄-'문재인도 모르는 사노맹' 박노해와 김문수
  • JBC까
  • 승인 2019.08.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발과정 엄격, 1차 조직원 후보 물색 후 ‘자기소개서'
'필수실천지옥훈련'이라는 합숙훈련 통과 후 최종 평가
김문수 전 의원이 석방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문수 전 의원이 석방 구호를 외치고 있다.

JBC까는 조국 전 민정수석이 90년대 초 활동한 사노맹에 대해 ‘문재인도 모르는 사노맹’ 연속 기획물을 싣고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돋구기 위해 차명진 전 국회의원이 14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먼저 게재한다. 차 전 의원은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함께 90년 창당한 민중당 소속이었다. <편집자 주>

“조국이 법무부장관이 된다 하니 공교롭게 나의 30년 전 불편한 기억이 소환된다.

내가 살면서 가장 헤맸던 기간이다.

몸 담았던 서노련이 와해됐다.

지도자인 김문수 씨가 감옥에 갔고 당시 운동권을 휩쓸던 NL과 PD 논쟁에서 소외됐다.

조직원이 모래성 무너지듯 빠져나갔다.

NL로, PD로, 그리고 이상한 서클로....

끝까지 조직을 지키던 나는 홀로 남아 하루하루 생계걱정이나 해야 했다.

어느 날 조직원이었던 친구가 출판사에 일자리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에 딴 사람이 나와 있었다.

여자였다.

엉뚱하게 나한테 한국 노동자 혁명의 나아갈 길을 강의했다.

내가 "당신 보아하니 얼굴도 하얀데 공장에서 일이나 해보고 그딴 소리냐?" 그랬더니 그냥 잘 가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사노맹 입당심사였다.

거기서 떨어진 후 분해서 며칠 밤을 못 잤는데 지금 생각하니 천만다행이다.

얼마 후 사노맹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조직의 예비조직원이었던 백태웅이가 주도해서 새로 조직을 만들었단다(당시 서노련은 공장 경험을 거쳐야 정식 조직원으로 인정했다. 유시민도 서노련의 예비조직원이었는데 이 친구는 ‘강철서신’을 모방한 편지를 조직원들에게 돌려 상당수가 NL쪽으로 빠져나가게 했다.)

사노맹은 사회주의를 공공연한 목표로 내세웠다.

그때는 운동권에서도 사회주의가 금기어였다.

먼 목표로 공유하긴 했지만 대놓고 강령에 채택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또 북의 김일성을 혁명의 동반자로 인정했다.

박노해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헌시까지 썼다.

사노맹은 무장봉기를 혁명의 수단으로 명시했으며 실제로 총포제작법을 공부했다.

그들은 자금조달을 위해 도둑질까지 했다.

과거 남민전 만큼 과격하고 실천적이었다.

주로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사노맹으로 따라갔다.

박노해는 학출이 아니었지만 관념적으로 과격해서 대학에서 이념논쟁에 단련된 애들한테 혹한 게 틀림없다.

그 이후 박노해가 자기 이름으로 사노맹에서 만든 노동해방문학이란 잡지에 이념적 시를 몇 개 썼는데 생경하고 조야했다.

암튼 사노맹은 여타 좌파조직과도 다르게 아주 과격했다.

법무부장관 후보 조국은 사노맹 출신이다.

그가 검거된 시점은 91년 박노해, 92년 백태웅이 검거되고 난 후인 93년이었다. 그런 것 보면 조국은 잡힐 때까지 전향 안하고 조직 부활을 위해 암약했다는 거다.

그는 비합법조직이 존속을 위해 숨겨둔 소위 세포였다.

조국이 나중에라도 전향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해방후 가장 과격한 공산주의 조직의 세포가 대한민국 법무부장관이 된단다.”

이어 차 전 의원은 추신을 통해 “조국은 청문회에서 당시 수사기관의 고문 얘기를 꺼내며 자신의 사상에 대한 검증을 비껴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노맹의 기본방침이 잡혀가면 자신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밝히자는 거였기 때문에 수사기록에 그들의 활동상이 다 나와 있다. 청문회 준비하는 분은 그걸 참조할 것을 권한다”고 밝혔다.

JBC까가 차 전 의원의 사노맹 악몽을 먼저 밝힌 것은 3탄에서 이어지는 글의 연관성 때문이다.

지난 91년 사노맹 핵심 인물 박노해 씨가 경찰로 연행되는 장면

지난 91년 사노맹 핵심 인물 박노해 씨가 경찰로 연행되는 장면

사노맹은 조직원 선발과정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1차적으로 조직원 후보를 물색하여 ‘자기소개서’를 제출케 한다.

다음으로 신원성향을 은밀히 조사한 후 사상성· 비밀활동 능력 등 50여 가지 기준에 의한 정밀한 심사를 거쳐 예비 조직원으로 선발한다.

이들은 약 1~12개월 간의 '필수실천지옥훈련'이라는 합숙훈련을 통과한 후 최종 평가를 거쳐 조직원으로의 임무를 부여 받는다.

지옥훈련에 대해서는 김미영씨(가명·25)의 ‘마침내 전선에 서다’라는 조직 활동 수기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300일 간의 지옥훈련을 거쳐 완성되는 노동해방주의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형상화하고 있다.

"20~30일간의 공인된 고문 그리고 사형··종신형의 모진 탄압 앞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전향을 거부하고 투쟁할 수 있는 사람."

"전국적으로 널려 있는 적의 포위망과 감시의 눈길을 뚫고 활동할 수 있는 비밀활동 능력, 이론 정치적 능력과 투쟁지도 능력을 갖춘 사람."

사노맹 조직원들은 이 지옥훈련을 통해 “다른 나라 노동해방주의자들이 대개 20여년이 걸려 수행한 선전단계를 단 300일 만에 끝내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한 노동운동가는 “사노맹원들의 치열성은 인정한다. 해도 남들이 몇 십년 걸려 한 일을 단 기간에 이루려는 발상 자체가 소시민적인 조급성에 기인한다"는 지적을 한다.

아직 사노맹 조직의 실상은 낱낱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 보더라도 이제까지의 비합법 운동조직 중 가장 생명력 있는 조직으로 평가 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사노맹의 주도면밀한 비합법 조직운영과 비타협적인 투쟁노선은 박노해 씨의 영향을 입은바가 크다는 견해가 많다.

박 씨는 외부에서 생각하 듯 단지 대중적 명망성을 지닌 상징적 지도자가 아닌 실질적인 사노맹 지도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노해 씨의 이름이 국민들에게 처음 알려질 때는 지금 같은 혁명가가 아닌 시인이었다. 지난 84년 박 씨가 지은 ‘노동의 새벽’은 문단의 지축을 바꿔놓았다.

어떻게 촉망받는 노동자 시인이 직업적인 혁명가로 탈바꿈했을까? 그러나 그와 함께 조직활동했던 사람들은 “박노해씨는 단 한순간도 직업적 시인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애초에 조직운동가였으며 시는 철저히 운동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사노맹 활동으로 귀결된 그의 성장과정과 조직활동의 이력은 어떠한가?

박노해 씨(본명 박기평)는 1958년 전남 고홍군 동강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묵 씨는 일제 때부터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에는 빨치산이 되어 활약하다 박노해가 일 곱살 나던 해 암으로 사망했다.

1973년 전남 벌교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5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선린상고 야간부를 다니고 낮에는 공장에 다녔다.

이때 그는 안병욱, 김형석 교수 등을 찾아다니며 지적 갈증을 채워나가려 했다. 박노해 씨는 일요신문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의식화시킨 최초의 정치 문건이자 시집은 중 3때 읽은 김지하의 ‘오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노해 씨는 1977년 말 경 부터 향린교회 야학을 다녔다. 어느 잡지에선가 민청학련 관계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병곤씨가 향린교회에 있다는 기사를 보고 직접 찾아간 것이다.

그는 향린교회에 적을 두면서도 청계야학을 운영하던 경동교회의 활동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박노해 씨는 야학 시절에 인텔리 활동가를 능가하는 논리력을 갖췄는데 이 때문에 프락치로 오인받기까지 했다.

이 무렵 박씨는 김진주씨(35·사노맹 중앙위원)를 교회에서 만나 83년 명동성당에서 결혼을 한다. 박 씨의 가족은 독실한 가톨릭신자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김옥숙 여사는 물론이고 형 박기호 씨는 사제, 여동생은 수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노해 씨도 태어나자 마자 가스펠이란 영세명을 받았다. 그는 79년경 육군에 입대, 군사령부 장성의 당번병으로 조직 차출됐던 박 씨는 전방부대 근무를 자청하여 경기도 포천 8사단 지역의 수송부대에서 근무한다.

‘노동의 새벽’에는 ‘군대 가는 후배에게’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이는 그가 군대 갈 때의 심정과 군복무경험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다. 그는 모범용사로 뽑혀 표창을 받았으며 부대원 중 가장 많은 포상휴가를 탔다고 한다.

박 씨는 제대 후인 84년 6월 안양의 안남운수 경비공으로 입사한다. 노총위원장이 되어 노동해방을 앞당길 '순진한 생각'을 품고 요령 안 피우고 작업에 임한 그는 회사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사장의 표장장을 받았다.

영차회라는 소모임을 만들고 노조위원장으로 입후보라기 도 했던 그는 85년 11월 회사측에 의해 '불순분자'로 지목되면서 징계 해고된다.

이 무렵 박노해씨는 85년 8월 25일 결성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활동에 참여한다. 서노련은 김문수 전 지사가 지금의 정의당 심상정 대표와 함께 주도적 역할할 했던 단체다.

김 전 지사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울대에서 제적된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청계천 피복공장 재단보조공으로 일했으며 1978년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1985년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김 전 지사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통한다. 김 전 지사는 1985년 서노련이 출범하자 1986년에는 서울지역 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으로 인천시 5·3직선제 개헌투쟁 주도 혐의 등으로 구속되어 2년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88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놨다. 

차명진 전 의원도 서노련에서 활동 했다. 차 전 의원은 최고로 강한 노동자란 뜻의 ‘최강노’란 이름으로 서노련과 민중당 기관지에 시사만평도 그렸다.  박노해 씨는 서노련 기관지 ‘서노련신문’ 창간호에 ‘선봉에 서라’는 축시를 싣기도 했다. <계속>